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한 영혼을 소중히 (눅 15:3-7)

  • 잡초 잡초
  • 473
  • 0

첨부 1


- 윤정현 목사 (대선교회)

오늘 본문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풍경 중에 하나입니다. 양을 치는 사람들은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양들을 우리로 불러들입니다. 한 마리, 두 마리, 하면서 양을 헤아립니다. 그런데 100마리 중에 한 마리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한 마리를 찾아다닙니다. 낮에 개울가로 갔다가 길을 잃었나 해서 개울가를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계곡을 지날 때 낭떠러지로 굴렀나 해서 계곡 일대를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들판을 지날 때 웅덩이에 빠졌나 해서 모든 웅덩이를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마 친구들도 함께 그 밤에 횃불을 들고 찾아 나서든지 아니면 그 다음날 여러 곳을 함께 찾아 나섰을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혹 우리 양을 보지 못했느냐고 여기 저기 묻고도 다녔을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 모두 함께 걱정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어렵게 어렵게 잃어버렸던 바로 그 양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너무 좋아서 그 양을 어깨에 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이웃을 초대했습니다. 잔치를 벌였습니다. 모두들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심정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소원과 마음이 7절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있습니다. 마치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았을 때 정말 기뻐서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아직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않은 영혼이 회개하고 그 품에 안기게 될 때 더할 수 없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 그 품에 안겨 있는 양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밖에 잃은 양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이미 불러 우리에 있는 양 한 마리! 즉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선 목장 안에 있는 양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며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지체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존경해 주고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불쌍히 여겨 주고, 귀히 여겨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몸에 붙은 어떤 지체라도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겉으로 보는 것과 들어가서 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겉으로 볼 때는 다 성숙한 것 같고, 이제는 어린아이의 티를 벗어난 것 같은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아직도 어린아이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볼 때에는 어린 아이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이미 성숙해서 자기의 신앙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성숙을 위해 귀하게 사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의 외모와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실망하고 시험에 들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긴 사람이기 때문에 겉모습을 볼 수밖에 없겠지만 이 점을 늘 유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부족한 줄 알고 서로의 약점을 보충해 주고 잘못된 것을 내가 서로 덮어주는 것과 같은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열심히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도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상처를 준다든지, 아니면 마음을 상하게 한다든지, 실족케 한다든지 하는 행동은 피차에 삼가는 것이 성도의 지혜요, 공동체 생활하는 사람들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있고야 내가 존재하며, 상대가 잘 되어야 내가 행복한 존재가 바로 성도와 성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상대방을 눌러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교회는 다릅니다. 상대가 잘 되야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야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자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선 교회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온 성도들을 피차에 서로 귀중히 여기고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하나라도 잃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을까요?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답은 1-2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그렇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던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셨고, 이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심사가 편치 않습니다. 문제를 삼았습니다. 시비를 걸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생각에는 세리와 죄인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하나님께서 저들을 외면하실 것이고, 저들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문제삼고 있는 점이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말 잘 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관심이 지금 어디 있는지 도무지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눅15:11절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내용의 의미는 잃은 양의 비유와 같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잘 한 일입니까? 얼마나 잘 된 일입니까? 그런데 집안에 있는 맏아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밭에서 일하고 있다가 돌아온 맏아들이 집안에서 잔치 소리가 납니다. 그 자초지종을 물으니 "집나간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면 형이 되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뛰어 들어가 동생을 끌어안고 함께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들은 형은 어떻게 했습니까? 눅11:28절에 보면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집 나가서 고생하던 동생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기쁘지가 않습니다. 그 동생을 맞아서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가 화가 날 정도로 밉습니다. 동생도 밉고 아버지도 미워 견딜 수 없습니다. (눅15:29)

이 맏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관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맏아들은 몸은 아버지의 품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 품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맏아들은 집안에 있는 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 맏아들과 같은 탕자들이 있습니다. 정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아들을 기뻐 환영하며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영혼들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2. 한 영혼을 소중히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관심은 한 영혼에 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우리에 있는 99마리의 양이 더 중요합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99마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 양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99마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1마리 양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고자 합니다. 99마리가 더 중요하다는 논리로 1마리를 소홀히 하는 것을 합리화해 버립니다. 결국 한 마리 잃은 양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고 맙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하나가 바로 비인간화 문제입니다. 도시화, 집중화, 개인화, 전문화 하다보니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람들은 일련번호 화되어서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일련번호가 날 때부터 주어집니다. 너무도 사람이 많아 사람들을 이름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수로 파악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름보다는 그 사람의 고유 번호가 중요합니다. 태어나면서 발바닥에 고유번호가 주어집니다. 출생신고 후에 주민등록번호가 주어집니다.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면 또 번호가 부여됩니다. 운전면허를 따도 번호를 받고, 군에 가도 군번을 받고, 심지어 여행을 하려해도 여권번호를 받습니다. 놀라운 것은 죽은 뒤에도 영안실에서 시신도 번호를 부여받고, 화장터나 공원묘지에서도 번호가 주어집니다. 이제 이름보다도 번호가 그 사람을 나타내는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고유번호화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모두의 특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의 일련번호처럼, 슈퍼에 진열된 물건의 바코드 번호처럼 취급을 합니다. 이름대신 번호로 파악되는 시대에 인간의 인간 됨은 존중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인간화입니다. 사고나 나서 수백 명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비인간화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수로 파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중한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만나주십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알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앞서 행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그런 사랑의 마음, 사랑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마음이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몇 가지 마음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우리의 형제자매가 된 자들과 아직 하나님의 품에 들지 못한 영혼들, 잃어버린 영혼들 저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아무개가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그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을 나누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둘째는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기 위해 수고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목자가 얼마나 애를 씁니까?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잃은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여인이 얼마나 애를 씁니까? 하나를 찾기 위해서 등불을 켜고 집안 구석구석을 쓸면서 찾지 않습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수고해 주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십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그를 만나고, 그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고 정말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해산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여인이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합니까? 그 수고가 고귀한 한 생명을 탄생시키듯이, 여러분의 수고가 한 영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합니다.

모쪼록 우리 모두가 한 영혼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드리는 효성스러운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영혼을 도루 찾았을 때에 크게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겨 주께로 인도함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기쁨에 동참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