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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통찰(通察)의 노래 (시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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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시15편>은 질문과 답변과 그리고 마지막 결론, 이렇게 셋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1절> 이렇게 자문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주의 장막은 하나님이 계신 곳의 상징, 주의 성산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만 올라갈 수 있었던 산, 즉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의 사람만 올라갈 수 있었던 산을 말합니다. 주의 장막에 유하며, 주의 성산, 거룩한 산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경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하나님의 친밀함을 경험하는 것은 신앙인의 지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추구해야 하는 최선의 삶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이 특별난 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이는 “하나님,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인간답게 사는 인생의 길(the way)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시15편은 다윗이 평생에 깨달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인생 길에 대한 결론적인 깨달음을 문답형식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인생길에 대한 통찰의 노래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며 사는 길, 최고의 신앙인으로서 사는 길, 진정 사람답게,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행복을 누리며 사는, 인생의 길은 무엇입니까?

<2-5절>에서 답변도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여러분 이 말씀 중에 그 뜻을 모르는 단어가 어구가 있습니까? 사실 이 본문 중 의미가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이해를 돕기 쉽도록 <현대어성경> 번역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여, 그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으오리까? 그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서 머무르오리까? 깨끗하게 살아가는 이, 바르게 살아가는 이, 마음 속에서 우러난 진실을 말하는 이, 다른 사람 비난하지 않는 이, 이웃에게 나쁜 짓 하지 않는 이, 이웃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소문내지 않는 이, 하나님께 등돌리는 사람 상대조차 하지 않는 이, 여호와 두려워하며 그분 모시고 사는 사람 존중하는 이, 아무리 힘들어도 어떤 희생 치르더라도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이,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하지 않는 이, 죄 없는 사람 짓누르지 않으며 뇌물은 절대로 받지 않는 이, 이런 사람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으리.

다윗이, 인생의 참 길로서 구체적으로 보면, 열 한가지를 제시합니다. 긍정적인 것이 5개, 부정적인 것이 6개인데, 우리가 기억하기 좋게 세 부류로 분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이 신앙인의 지고의 경지, 인생의 참 길인가? 첫째는 <2절>, 말과 행실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말과 행실이 반듯한 것을 말합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정직하게 행하는 것은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는 것, 잔꾀를 내서 술수를 부리지 않는 것, 반칙 플레이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중장부를 두지 않으며, 이중 플레이를 하지 않으며, 투명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중장부를 두는 회사를 좋은 회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투명경영이라는 말이 나오듯이, 정도를 걷는 회사가 좋은 회사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삶을 open하지 못하는 마음이 건강한 마음이 아닙니다. 정직이 경쟁력이고 정도를 걷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입니다.

“공의를 일삼는다”는 것은 이익과 욕심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삶의 목적이 성공보다는 옳은 일을 세우는 것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는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겉다르고 속다르게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자기 생각, 자기 소원을 관철시키려고 교묘하게 말하지 않는 것, 자기를 잘 보이려고 과장하거나 미화시켜서 말하지 않는 것, 자기 의견이나 해석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욕망에 따라 자기를 변명과 미화로 꾸며대지 않고 사실을 말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보면, 머리도 좋지 않은 사람들이 머리를 굴릴려고 애를 써서 술수를 행하고자 하고 말을 꾸며서 하려고 하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이 머리 굴리는 것, 대부분은 다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더 어리석은 사람인 것을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맙니다. 정작 지혜로운 사람은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투명하게 살아갑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실은 제일 지혜로운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신앙이 제일 좋은 모양이며 무엇이 인생의 참 길인가? 둘째는 <3,4절>, 다른 사람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참소한다는 것은 판단하여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반듯한 것을 말합니다.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해꼬지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판단, 비난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못되게 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표현,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현대어성경에 “하나님께 등돌리는 사람 상대조차 하지 않는 이”라고 하였는데, 거부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상대조차 하지 않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 라고 거부감이 우리에게는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멸시하는 자를 동정하는 것은 자기는 하나님보다 더 자비롭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내세우고 싶은 “자기 의”에 기초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반듯하게 하는 것이 미운 사람도 없고 대적하는 사람도 없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이런 사람을 유화주의자라고 그러지요, 그런 모습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른 것이 항상 그 사람 편들어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종종 사랑을 연민과 똑같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대로 다 해주면 그것이 사랑이고 원하는대로 쉽게 안해주면 그것은 이상한 모습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는 괜히 서원하였다가 무시해 버려서 사람들을 분노케 하고 실망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실천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쉽게 서원, 약속, 맹세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실되게 사랑하며 사는 삶을 배우십시오.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반듯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길입니다.

무엇이 신앙인의 지고의 경지, 인생의 참 길인가? 셋째는 <5절>, 더러운 돈을 물리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돈에 깨끗해야 사람답습니다. 시15편에서 더러운 돈으로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이 두 가지인데, 이자를 받는 것과 뇌물입니다. 이자를 받는 것은 노동없이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마음, 뇌물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보여 줍니다. “주머니가 드려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사람이다”고 존 워너메이커가 선언했습니다.

불로소득을 꿈꾸는 마음, 돈에 목이 매여서 남이야 어떻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내 돈만 모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이 죄악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마시고 돈을 다스리십시오. 가난해서 힘들고 불편하게 살아도 내 심령은 떳떳하게 살리라 이 마음이 믿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과 친밀하게 살 수 있는가? 인생을 진정으로 잘 사는 길은 무엇인가? 다윗의 인생 통찰의 노래, <시15편>을 세 가지로 요약해 드렸습니다. 말과 행실이 반듯한 것,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반듯한 것 그리고 돈의 사용이 반듯한 것 이렇게 셋으로 요약해 드렸는데, 그런데 사실, 누군들 이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사실 모든 사람이 정직과 공의가 세워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짓과 불의에 대하여 분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는 정직하게 행하지 못하고 그 말과 행실이 거짓을 일삼습니까? 또 모든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며 살며 다른 사람의 길을 막지 않으며 살고 싶어하는데 왜 현실에 부딪히면, 다른 사람을 등쳐 먹게 되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못되게 굽니까? 왜 사람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쉽게 맹세, 서원합니까? 왜 모든 사람이 고리대금이 나쁜 짓이고 뇌물이 손가락질받는 것임을 알면서도 왜 못 떨칩니까?

질문은 여러 가지여도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정직과 공의를 좋아하며 거짓과 불의에 대하여 분개하면서도 자신의 마음과 삶에서 거짓을 일삼는 것은 자기 명예 때문이며,/ 나도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다른 사람을 헐뜯고 못되게 구는 이유는 자기 생각, 자기 뜻대로 관철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자꾸 하는 것은 자기를 잘 보이려고, 과시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더러운 돈에 집착하는 것은 자기 이익 때문입니다. 자기 명예, 자기 생각, 자기 과시, 자기 이익... 자기를 떨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의 행복과 영광을 누릴 것인가? 누가 정말 인간답게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며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누리며 사는 것인가, 신앙이 제일 좋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 그림은 명확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좋지요. 누가 그것 모르나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self)에서, 자기라는 속박의 틀에서 벗어나야 가능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이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수양을 많이 쌓아서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접근하면 한계에 부딪힙니다. 도리어 “자기”에서 자유로와야 정직과 사랑과 청빈의 삶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엘리트를 징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응답할 수 있는 부르심입니다.

어떻게 자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자기로부터의 혁명, 자아 부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오늘 성령님으로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이 예수님께 내 마음과 인생의 주권을 맡겨드릴 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합니다. 비로소 “자기”에서 벗어나 정직과 사랑과 진실의 삶을 추구합니다.

또 우리가 오늘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며 흥미롭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우리의 마음과 삶의 태도와 행동의 문제이지, 종교적 열심으로 보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특별층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종교적 특별층이 되고자 하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 인간답게 사는 것에 오히려 더 방해가 됩니다.

예) 브러더 로렌스 - 하나님의 임재 연습

이것은 우리가 바르게 인식합시다. 저희가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를 하고 하는 영적 훈련은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르게 세우기 위하는 방편이지, 엉망진창인 마음과 삶의 면죄부를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마음과 삶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움이 없이, 종교행위만 꼬박꼬박 많이 드리면 하나님이 복주시겠지 하는 생각은 기복신앙, 미신입니다.

저희가 부지런히 신앙훈련을 하는 것은 종교적 특권층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라고, 하나님의 피조물답게, 사람답게 살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하신 말씀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는 것, 인간답게 사는 것,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누리며 사는 것은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말씀의 계시와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말씀의 깨달음과 기도에 익숙해짐이 없이는 사람답게 사는 것, 불가능합니다.

  행여 말씀 잘 배워서, 기도 많이 해서 도통해서 종교적 특권층이 되고자 하는 그릇된 방향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답게 살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답게 살도록,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누리는 진정으로 가치있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그 소망으로 부지런히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고 기도의 삶을 사는, 신앙생활을 추구하십시오.

그렇게 말과 행실을 정직히 행하고 이웃을 진실되게 사랑하며 돈을 깨끗하게 사용하는 삶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누렸을 때, 그 사람에게 주어진 오늘 약속은 요동하지 않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바람이 잦습니다. <시13편>에서처럼 그 마음을 시달리게 하는 세상의 바람, 유혹과 핍박의 바람은 사실 더 많이 찾아옵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물결이 있는데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해봐요? 물결에 부딪힘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고 성산에 거하는 자가 요동치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주는 아무런 고통도 없고 어려움도 없고 만사형통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유혹과 시련의 바람 속에서도 중심의 마음이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풍이 많이 불어도 중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 사람이 뿌리깊은 나무입니다. 반대로 작은 미풍에도 중심의 마음이 넘어져 버리면, 그 사람이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여러분은 작은 바람에도 뒤집어지고 넘어지고 날아가 버리는, 그래서 제발 아무런 바람도 불지 마세요, 작은 바람이라도 불까봐 조마조마하며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태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세상이 주는 바람에 시원함을 느끼며 여유있게 견고한 모습으로 살고 싶습니까?

여호와의 장막에 거하며 하나님의 성산에 거하는 자가 요동치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장막에 거하며 하나님의 성산에 거하기를 사모합시다. 진정 인간답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답게 아름답게 사는 우리들의 인생을 소망합시다.

그 소망에 따라, 말과 행실을 반듯하게 드리기를 힘쓰십시오. 다른 사람, 이웃을 진실되게 사랑하기를 추구하십시오. 가난하게 살아도 더러운 돈은 손대지 않겠다고 깨끗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그 소망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따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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