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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위해 핍박 받는 복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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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영규 목사 (성덕중앙교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10-5:12)


最高 次元의 복

  오늘은 팔복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복 중의 복입니다.  최상의 복입니다.  그 복이 바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복입니다.  팔복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봅시다.  팔복의 前半부 네 가지는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자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자는 심령의 빈곤을 느낍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해 합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순종하기 위해 온순하게 기다립니다.  자신에게 의로움이 전혀 없는 줄 알고 하나님의 의를 갈망합니다.  팔복의 後半부 네 가지는 이미 하나님께 다가간 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남을 긍휼히 여깁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화평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의를 위해 기꺼이 박해를 받습니다.  이런 모습을 신앙의 등급으로 매겨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의 그리스도인은 남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의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청결을 도모합니다.  세 번째 단계의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을 화평케 만듭니다.  마지막 단계의 그리스도인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상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자칭 신령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무슨 환상을 봤다는 둥, 천국을 봤다는 둥, 예언을 한다는 둥, 신유의 은사가 있다, 기적을 행한다 등등.  또 어떤 신자들은 봉사 활동이나 자선 활동을 많이 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과연 최상의 신자입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최상급의 그리스도인은 바로 의를 위해 박해를 견디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슨 이익을 얻기 위해서 박해를 견디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돈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박해를 견디는 것은 여기에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요즘 돈 때문에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의 돈 떼어 먹고 일단 감옥에만 갔다 오면 평생 잘 먹고 잘 삽니다.  돈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사악하나니 지옥이 저희 것임이요!  사리사욕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멍청하나니 멸망과 수치가 저희 것임이라!  오직 의를 위해서 박해를 견디는 것이 최상급의 신자입니다. 

  박해를 견디는 신앙!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10절 말씀을 11절과 12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성경은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반복 용법을 사용합니다.  요셉의 꿈이나, 바로의 꿈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팔복 중에 앞선 일곱 가지도 중요하지만 여덟 번째 복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견디는 것은 정상급 신자의 덕목이기도 하지만, 모든 신자들이 도달해야 될 경지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4,17)  요한계시록에 보면 최상급의 신자들은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20:4) 

  이 정도까지 얘기하면 벌써 오늘 설교 끝장 낸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오늘 말씀은 나하고는 영 상관 없는 얘기로구나!  나는 순교자까지 될 수는 없어!  오늘 말씀은 특별한 신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야!  그래도 조금 더 들어보세요.  초대 교회에서 순교당한 신자들은 별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신자들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어떤 계기에 그들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그런 일등급의 신자들이 다 될 수 있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 받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핍박을 당연하게 받으라는 겁니다.  핍박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다고 핍박 당하는 것이 무조건 복은 아닙니다.  남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얻어터지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사기치고, 거짓말 하고, 도적질하다가 감옥에 가는 것이 무슨 복입니까?  쓸 데 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다가 어려움 당하는 것이 무슨 복입니까?  오직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만이 복이 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를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10절의 “義를 위하여”라는 말은 11절에서 “나를 인하여”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즉, 의란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곧,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박해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누구는 당하고 누구는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 당하는 것이 좋아서 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다 보면 당연히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어떻게 다를까요? 

  첫째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우주도, 자연 만물도, 인생도, 역사도, 다 하나님께 기초합니다.  모든 가치 체계도 하나님 중심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을 경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전혀 반대입니다.  그들의 삶은 무신론, 유물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질서의 중심이 아니고, 인간이 중심입니다.  타인이 중심이 아니고, 내가 중심입니다.  영혼이 중심이 아니고 육체가 중심입니다.  영원한 삶, 영생이나 천국이 목적이 아니고, 현세가 삶의 모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인 문제들은 별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재산이나, 명성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주일이나 예배는 아쉬울 때만 찾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내가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에 필요한 119 대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평소에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삶의 주인공은 오직 내 자신일 뿐입니다.  세상 종교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고, 내가 모든 삶의 주체입니다.  내가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내가 모든 일을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자에게는 내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인 사람들과, 내가 중심인 사람들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표준은 내 자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삶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사상은 상대적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항상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간통이 큰 죄였지만 요즘은 당사자가 고소하지 않으면 무죄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는 간통은 어제나 오늘이나 명백한 죄악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동성애를 자연 현상을 취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형에 해당할 만한 큰 죄악으로 규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때그때 변해가는 상대적 원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 불변의 진리를 삶의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속한 회사에서 영업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쩌니 저쩌니 얘기해 보세요.  별 미친놈이 다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도 종교란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모든 신들을 믿고, 삼국지 수호지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신들로 숭배하고, 산신령 용왕님, 심지어는 부뚜막 귀신 장독대 귀신, 종이에 써 놓은 符籍까지 다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신앙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택하고 필요 없으면 버릴 수도 있는 선택과목과 같은 종교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신체계, 사고방식, 가치관, 생활 방식이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려면 배척당할 소지가 항상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6:14-16)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죄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다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죄란 중대한 문제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가로막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벌과 고통을 초래하는 불행의 원인입니다.  따라서 죄란 성도에게 있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지르지 말아야 될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죄란 별 것이 아닙니다.  그저 상대적인 것이요, 작은 실수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익이나 혜택만 주어진다면 어떤 죄도 지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죄를 짓습니다.  경제적 이익, 돈을 위해서 죄를 짓습니다.  명성이나 특전을 위해서 죄를 짓습니다.  살인이나 도둑질, 간음, 거짓말, 탐욕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금하신 계명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란 없습니다.  죄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세요.  돈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면 당연히 배척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핍박을 예상하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핍박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당할 수 있습니다. “핍박”이란 단어는 diwvkw(디오코)입니다.  일차적인 뜻은 “뒤쫓다”(run after)는 뜻인데, 거기서부터“추구하다”(pursue)“박해하다” (persecute)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핍박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11절을 몇몇 譯本에 보면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11절,공동번역)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말로 온갖 악담을 할 때에 너희는 행복하다.”(현대인의성경)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악의적으로 모함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헛소문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매를 맞든지, 감옥에 갇히든지, 고문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일들을 이렇게 열거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과거 카타콤 시대의 성도들은 신앙 때문에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부터 콘스탄틴 황제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 동안은 엄청난 박해의 시대였습니다.  로마 시내의 카타콤베 유적을 보면 수 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지하 동굴에서 200만 명에서 700만 명에 이르는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중에는 묘비명이 확인 된 것만 해도 4000 개가 넘습니다.  그들은 무려 300여년을 대대로 지하 동굴에 살면서 박해를 견디었습니다.  각 황제 별로 기독교인을 박해한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NERO 황제는(AD64) 광적인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로마를 다시 건축하려는 목적으로 로마시내에 불을 질렀습니다.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원성이 높아지자 그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동물 가죽 씌워 개에게 물려 죽게 하고, 들짐승에게 내줬습니다.  네로의 정원에는 火刑틀을 세우고 성도들이 타 죽는 불빛으로 정원을 밝혔습니다.  그는 한 밤중에 벗은 몸으로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DOMITIAN 황제(AD95)는 로마와 이탈리아 전지역에서 수 천 명 처형했습니다. 

황제의 사촌인 FLAVIUS CLEMENSE와 그의 아내 FLVIA DOMITILLA를 처형했고,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켰습니다.  TRAJAN 황제(AD98-117)는 기독교를 불법 종교나, 은밀한 비밀 결사로 간주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색출하지는 않았어도 고발하면 처벌했습니다.  예수님의 아우인 시므온(예루살렘 감독)이 그에게 처형당했습니다.

(AD107)  HADRIAN 황제(AD117-138)는 박해를 다소 늦췄지만 그래도 그에 의해서 로마의 목회자 TELEPHORUS와 다수 신자들이 순교 당했습니다. 

MARCUS AURELIUS 황제(AD161-180)는 賢君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박해자였습니다.  수 천 명을 참수했고, 야수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JUSTIN MARTYR가 그에 의해 순교 당했습니다.

SEPTIMIUS SEVERUS 황제(AD193-211) 시대에는 주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매일 화형, 십자가형, 참수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 때에 ORIGEN의 부인 LEONIDAS가 순교하고, 카르타고에서는 귀족 PERPETUA와 그녀의 노예 FLICITAS가 짐승에게 갈갈이 찢겨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지막 박해자는 DIOCLETIAN 황제(AD284-305)였습니다.  그는 가장 혹독한 박해자로써 그리스도인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10년 동안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동굴과 숲에서 사냥을 당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불에 태워지고, 짐승 밥이 되고, 갖가지 고통 받았습니다. 

  핍박 당한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모든 모욕과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두 사도 모두가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참수형이나 각종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로마 시대에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죽음을 담보로 한 것이었습니다.  ]

  오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마음껏 믿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공개적으로 예수 믿지 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박해란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의 박해는 훨씬 은밀하고 내면적이고 지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될 대상은 총과 칼이 아닙니다.  세상 문화 전체가 다 反基督敎的입니다.  무신론 철학이 반기독교적입니다.  다원주의 사상과 학문이 반기독교적입니다.  현대 과학이 반기독교적입니다.  특히 돈이 지배하는 경제 체제가 반기독교적입니다.  소설, 음악, 미술, 영화, 각종 예술이 반기독교적입니다.  상업주의 광고주들이 지배하는 언론 방송 매체가 반기독교적입니다.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이 전파하는 모든 메시지와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 있다는 뜻입니다.  불륜이 미화됩니다.  살인 강도, 폭력이 미화됩니다.  돈을 버는 것이라면 어떤 수단도 괜찮다는 목적 지상주의가 宣揚됩니다.  회사에서 성경을 얘기하면 자칫 왕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세워 놓았던 십계명 돌판들이 제거되고 있습니다.  남녀 평등주의자들 때문에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모든 言語들이 퇴출되고 있습니다.  옛날의 박해는 신체적인 박해였지만, 오늘의 박해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입니다.  이런 세상 분위기에서 성경을 얘기하고, 하나님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세상의 저항을 받습니다.  이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신앙 때문에 왕따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승진의 불이익, 영업의 불이익, 사회 활동의 불이익, 인간 관계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대적인 박해를 견디는 일입니다. 


박해를 견딘 자의 복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에게는 두 가지가 보장됩니다.  첫째는 천국의 보장입니다.  심령의 가난에서 시작된 천국은 의를 위해 박해 받는 것으로 보장됩니다.  둘째는 하늘의 상급, 곧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비록 지상에서 큰 박해를 당했다 해도, 인생을 결산하게 될 때에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박해를 받기 십상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온갖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 위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위축되지는 마십시오.  참 신앙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억지로 웃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믿는 것 때문에 기꺼이 고난 받을 각오를 한다면 그 영혼은 이미 즐거움과 기쁨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아무쪼록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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