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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히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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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종 목사 (울산소망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채희가 우리 곁은 떠났습니다.
뒤따라서 요셉이도 하나님의 품안에 안겼습니다. 어제 그 유공을 그가 형제들과 함께 즐겁게 뛰놀던 곳에 뿌리고 왔습니다.
정말 졸지에 장대 같은 두 젊은이를 우리 곁에서 떠나 보내고 나니 감정으로만 형성된 것이 사람이라면 우리도 아마 숨쉬기조차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셔서 어서 속히 슬픔을 딛고 다시 만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용기 내시기를 바랍니다.

왜?
왜! 죽는 걸까요?
첫째>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주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히 9:27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죽음이 사람에게 정해진 역사적인 현실이라면 싸움과 원망과 미움 속에 빠져 있지 말고 살아있는 우리들도 준비하면서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롬 6:23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없이 살려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왕따 시키는 것이 바로 죄라면 이제라도 하나님과 가까이 하시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냐구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억하세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며 예배의 제단 위에 성령의 불로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3년만의 가뭄을 해결하는 단계적 방안으로 제일먼저 제단을 가까이 하라고 왕상 18장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질병 때문에 죽음이 오기도 하고 사고를 만나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며 사십니까?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죽음을 "아달투"라고 불렀는데 이 뜻은 "먼지를 먹는 어두운 지하세계에 내던져 지는 것" "모든 기쁨이 다 사라진 그림자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며 죽음을 무섭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한 사람이 일생동안 행한 도덕적 행위가 심판 받는 날이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42명의 재판관들이 앞에 앉아 있답니다.
저울이 등장하는데 두 개의 그릇이 담겨져 있는 천칭저울이 나오고 한군데는 내가 일생동안 해온 일들이 담겨져 있고 또 다른 그릇에는 진리의 깃털이 올려져서 평형이 이루어질 때 영생이 주어진다 하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의 사람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쪽 그릇에 담긴 진리가 금이나 진리의 돌 판이 아니라 뭐라 했어요 진리의 깃털이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진리의 깃털 그것은 평가의 기준을 가볍게 해서 죽음을 두려운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죽음이라면 일생동안 내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 날이라고 해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윤리적으로 잘 살아 가도룩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우리도 살아 있을 때 잘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 날 잘했다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인사하시죠.
우리 잘 사십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요?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 동양과 서양이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1) 죽음을 맞이할 때 서양에서는 차디찬 병원의 침대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죽기 전에 사람들을 불러 모우죠.
친척들이 모여오고 친구들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다 둘러앉은 상태에서 자녀들에게나 며느리에게 유언까지 남기면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동양에서는 죽음도 가족이라는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서양에서는 죽음이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아주 강력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지 않고 교회나 거주지 가까운 곳에 시신을 안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죽으면 끝이다 내세는 무슨 내세하며 죽음을 마지막으로 보았고 하나 있다면 윤회해서 진짜 잘해야 사람으로 탄생하고 잘못하면 당나귀가 될 수도 있고 벼룩이도 될 수 있다.
또 살아생전에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물고기의 입을 괴롭히면 사람도 입술이 갈라져서 나온다고 그 정도로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죽음 이후에 다시는 눈물이나 곡함이나 애통이 없다는 소망으로 가득찬 죽음과 죽으면 끝이다 라는 죽음이 얼마나 차이가 크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왜 두려운 것일까요?
첫째> 죽음이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 보았습니다. 죽으면서도 아내의 손을 붙들고 난 죽고 싶지 않다고 날 살리라고 나 죽으면 어떤 사람과 결혼할거지! 소리지르며 눈을 못 감는 모습을 보며 죽음이 괴로울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그 누구도 죽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라 했고
넷째> 걱정마라 행복하게 살면 행복하게 죽는다고 했고
다섯째> 죽음 그 자체는 우리 인생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걱정 말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주장을 가지고 사십니까?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그 누구도 예외가 없는 법칙입니다.
그래서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죽어야만 하고 여기에 서 있는 주의 종도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면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것일까요?
1. 가족들에게 둘러 쌓여서 유언하며 죽어야 호상 입니까?
2. 소백개의 조화가 흩날리면서 장례식을 해야 멋있는 걸까요?
3. 요즘처럼 캐딜락 리무진을 타고 장지로 가야 우아한 것일까요?
4, 아니면 상여가 나아갑니다. 소리꾼의 구슬픈 곡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많은 자녀들이 소복을 하고 상여를 뒤따르는 것일까요?
5. 국화 송이로 자동차를 장식하고 서로 길가에서 노제를 지내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만 잘 죽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잘 죽으려면 첫 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죽어야 잘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들을 다시 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 하셨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아멘 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 3:16을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믿습니까?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잘 믿어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복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허물과 죄에서 다 용서받음으로 하나님 보좌 곁에 설 수 있는 천국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죽으면 허무합니다.
한 줌의 재가되어 산 속이나 물위에 뿌려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게 하관을 하지만 몇 년이 지나서 이장이라도 하게 되면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아예 안보는게 더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정말!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까? 아닙니다!
칼 라너는 "사람이 죽어도 사람의 영혼은 불사 불멸성을 지녔다고 하였습니다.
Wesley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속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에이! 살기도 어려운데 뭐 죽고난 이야기하나"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세에도 나의 영혼이 불사불멸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현실도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집트 사람들처럼 우리의 행위가 저울 위에 올려진다면 여러분의 저울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습니까?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달아 봐도 달아 봐도 분량이 부족하진 않습니까?"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어떤 심판입니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심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은 그저 단순히 현실을 배부르게 살려하는 짐승이 아닙니다.
내세를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면 바로 이 두 가지 현실적으로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고 내세적으로는 심판을 대비하며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이 두 가지의 사건을 동시에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세가 없다면 현실도 없는 것입니다.
내세를 강력하게 소망하면서! 현실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 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잘 사는 것이요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딤후 3장처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다 함이 없는 성실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갈라서지 마세요!
아! 세상이 다 그런데요 뭘! 세상은 그래도 우린 그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임마누엘로 계셔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Wesley 목사님은 어려움을 보았으면 절대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일생동안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초기 감리교회에는 애찬회(love feast)가 있었어요.
신앙인들이 모여 정말 애찬을 나누는 거죠.
그러나 그 애찬 상에는 호밀 빵과 물밖엔 없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회의를 한다면서 엄청난 조찬 비를 내고 나누어주기는 어떻게 합니까?
감사한 것은 2004년도 감리교 삼남연회 자료에 보니까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에는 약 6백 개의 감리교회가 있는데 우리 교회가 나누어주는 일에 1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잘 살고 있다는 외적인 증거 중 하나입니다.
눅 6장에서도 "주라! 그리하면 후이 되어 누르고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였습니다.
누구에게 주어야 합니까?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우고 목말라 하거든 마시우라"
왜? 그래야 합니까?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 날 용서받을 수 있던가요?
우리에게 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했을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은 용서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문의 내용 중에서 핵심적인 사항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태어난 날은 정해 있어도 언제 떠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첫째> 반드시 죽는다. 누가? 내가!
둘째> 죽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나 우리의 허물을 다 사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확신
넷째>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며 잘 살겠노라는 결단이 있어야겠다.
마지막으로> 부모의 아름다운 신앙이 자녀들에게 축복이 되게 하자!
잘 살다가 우리 모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같이! 잘 믿다가! 잘 살다가! 잘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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