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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대하 7:1~3, 마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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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밀러(Miller)라는 분은 성경을 수평적으로 이해하여 다섯 개의 C로 설명하였습니다. 창조(Creation), 언약(Covenant), 그리스도(Christ), 교회(Church), 완성(Consummation)이 그 분이 말하는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란 하나님 당신이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영광을 위하여 너희를 창조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광 때문에 창조하시고 지금도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6월은 호국의 달입니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6월에는 6.25 한국전쟁 기념일도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달입니다. 교회는 애국기관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광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의 원래 뜻은 ‘인정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은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인정하여 달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 인정하여 그 분에게 맡기십시오.

  어떤 권사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손자가 할머니인 권사님께 오기만 하면 “할머니 나 과자 사줘”, “할머니 나 신발 사줘” 그런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 말씀이 참 재미있고 옳아요. “손자가 내게 사달라고 하는 것이 할머니 대접인 줄 알아요”. 그렇습니다. 손자가 할머니 대접하려면 자꾸 사달라고 하는 겁니다. 할머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로 자꾸 달라고 졸라대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법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다섯 가지를 개혁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이전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너무 많이 가로챘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있지만 ‘교황무오설’이란 교회의 절대 교리가 있습니다. 교황은 잘못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황이 무슨 말을 하던 어떤 일을 하던 교황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황에게 ‘거룩하신 아버지’(The Holy Father)이란 칭호를 씁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북한 평양에는 지하철이 있습니다. 아주 지하철이 깊어요. 150미터나 된답니다. 그런데 역 이름이 영광이란 역이 있습니다. 영광역을 왜 만들었겠습니까? 누구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온 지하철 역사가 모자이크로 되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역입니다. 그 모자이크는 온통 김일성을 찬양하는 그림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영광을 받을 가치도 이유도 없는 존재입니다.

  토마스 브룩스는 “은혜와 영광은 별로 차이가 없다. 은혜가 씨앗이라면 영광은 꽃이고, 은혜가 전쟁 중에 있는 영광이라면 영광은 승리를 누리고 있는 은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가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영광으로 넘칩니다.
  영광의 내용과 하나님 영광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방편을 보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오늘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우리교회, 우리 개인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첫째, 영광은 아버지의 빛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빛입니다. 천지를 창조하기 전의 상태를 보세요. 흑암과 혼돈 밖에 없습니다. 그 혼돈과 흑암 가운데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십니까? 빛은 모든 창조의 가장 우선되고 가장 소중한 피조물입니다. 동물을 만드시는데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 많은 동물을 하루에 다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빛을 만드시는데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러니 빛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빛이 없으면 다른 것도 보이지 않고,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더불어 엿새의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빛으로 모든 피조물을 생존하게 하십니다.

  그 빛을 다 만들었더니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시편 19:1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합니다. 시편 72:19에는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역대상 29:11에는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라고 찬양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오실 때에 영광이 가득하게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는 영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초라한 마구간도 영광으로 가득했습니다. 아기인 예수님께도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호렙산에 올라갔을 때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여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찬란합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은 빛과 소리로 나타나십니다. 빛은 소리보다 강력합니다. 바울은 소리를 듣고 놀랍니다. 그리고 빛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4:8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라고 합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님께 보이며 절하라고 꼬드기는데 이게 예수님께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영광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그 영광을 보이면서 시험하는 마귀는 머리가 조금 모자라요.
  예수님께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시는 중에 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은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를 의미합니다. 그 옷이 얼마나 찬란했던지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 군주가 랍비 여호수아 벤 하나니에게 주문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시오.” “그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오. 저 태양을 쳐다보시오.” “태양은 볼 수 없소.” 그 때 랍비는 말했습니다. “태양을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의 빛도 보기 힘들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찬란하고 우리가 보기엔 너무나 빛난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개혁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라고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지요? 영광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영광은 한 번도 사탄의 것이거나, 사람의 것이 된 적이 없습니다.
  성화에 보면 후광이란게 있지요? 후광을 광배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글로리’ 즉 성성(聖性)의 표징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나 신적 인격이나 성인의 머리 부분에 원륜형(圓輪形) 혹은 원반형(圓盤形)의 빛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 후광은 2세기부터 나타나고 3세기에 와서는 그리스도에게, 5세기에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에게, 6세기에는 천사와 성인들에게, 8∼9세기에는 생존하는 고승들과 특히 제왕들의 초상에 사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갈수록 인간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이러다가 종교개혁을 만난 것입니다. 당시의 교회의 타락과 왜곡된 신관은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대상입니다. “홀로 그에게만 영광”입니다. 로마서 11:36에는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이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빛이시며 영원히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는 찬송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영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므로 그 영광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빛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찬양대가 주일 예배 때에 “아버지께 영광”(Gloria patri)를 부릅니다. 전통적인 예배에는 모든 예배에 “아버지께 영광”이란 영광송을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찬송과 영광 돌리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 영광.” 아마 이 찬송은 2세기경부터 사용된 듯합니다. 교회의 예배에 반드시 불려지는 영광송으로 이 때부터 자리 잡았습니다. 메츠거 교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이 기도는 드려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이교도가 랍비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왜 떨기나무 속에서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시라면 적어도 영산의 정상에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셔야 한다는 것이 이교도의 생각이었습니다.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 보잘 것 없는 가시덤불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 데가 없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존재하는 영원성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영광이라는 단어가 411번 나옵니다. 그 외에도 성경은 영광을 상징하는 말씀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처음 세상에 오실 때에 영광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천사가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영광입니다. 누가복음 19:38에는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찬송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이 찬송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찬미라고 스탠리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지막을 정리한 요한계시록에만 영광이란 단어가 17번 나옵니다. 성경은 영광의 책입니다.

  현재는 작은 고통도 있고, 시련도 있고,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18에는 영광의 승전가를 부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영원한 영광은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셋째, 영광은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빛입니다.

  출애굽기 40:35에는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라고 합니다. 모든 백성들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성막 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역대하 7:2에는 솔로몬의 성전봉헌예식이 나옵니다. 성전봉헌 기도를 마쳤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성전에 불이 내리는 것과 영광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가득한 불이 보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까? 우리 교회에 가득 찬 하나님의 불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온 장안의 사람들이, 온 국민이, 세계 만민이 연동교회 위의 있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로버트 몰간은 ‘홍해의 법칙’이란 그의 책에서 “다음번에 당신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든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까’ 질문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라고 질문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난은 성도들의 영광에 추가점을 가산해 줍니다. 다이아몬드는 깎을수록 더욱 빛납니다. 성도들의 십자가가 보다 무거울수록 그만큼 그들의 면류관도 보다 무거워집니다. 어느 교회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영광을 설명합니다. “하늘의 상급이란 영광의 면류관이란다. 누가 가장 큰 면류관을 받을까요?” 그 때 어떤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머리 큰 사람이요.” 영원한 영광은 영원한 면류관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회 앞의 게시판에 이렇게 적혀 있답니다. “당신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악인이 아니죠? 그리고 당신은 밖에 있어도 될 정도로 선한 사람도 아니죠?” 우리 교회도 정문에 하나 써놓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아름다운 말입니다. 교회의 영광이란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비취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태복음 5:16에는 5.16혁명 같은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우리 교회가 빛으로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영광이란 첫째는 본체적 영광이 있습니다. 이 영광은 본질적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보통 영광입니다. 만물이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입니다. 해나 달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지음 받았습니다. 둘째는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사람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고등 영광입니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영광이 진짜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영광을 받으십니까? 교회와 성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잘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찬송 326장 4절을 보세요. “이 성회 하나 되어서 영광 길 행하세, 한없는 은혜 받아서 영원히 누리세.” 우리 교회가, 우리 거룩한 모임이 하나 되어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괴테는 “비록 진흙이라도 햇볕을 받으면 빛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이 비록 흙으로 만들어서, 약하고, 천하지만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진흙 같은 이 몸도 빛이 납니다. 작은 영광은 될 수 있습니다. 진흙도 빛이 나는 영광 덩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그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민족, 우리 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귀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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