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큰 구원 (창 45:1-8)

  • 잡초 잡초
  • 279
  • 0

첨부 1


-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서울영천교회)

  영화와 드라마는 비극과 희극으로 구분이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입니다. 그들의 만남은 매우 아름답고 그들의 사랑의 스토리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렇지만 그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가서 다 죽게 됩니다. 그래서 비극이라고 합니다. 춘향전에는 춘향이의 감옥생활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이몽룡이 거지행세를 하는 그런 비굴함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만남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에 희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묻지 않습니다. 끝맺음이 해피엔딩이냐 비극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남의 의미를 알자

  우리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 공부를 얼마냐 했느냐, 젊을 때 얼마나 돈을 벌었느냐, 젊을 때 얼마나 성공을 했느냐, 젊어서 얼마나 출세를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에 끝맺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행복하냐 불행하냐, 성공자냐 실패자냐 라고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온 길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때를 잘 살아야 됩니다. 인생의 마무리를 바로 해야 됩니다.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그 장면을 뉴스로 봅니다. 50년, 60년 만에 만나는 그들의 혈육의 만남, 온갖 회한을 안고 그들은 눈물을 뿌립니다. 작품 속에서도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스토리가 엮어져 갑니다. 춘향이가 변학도를 만난 것은 악연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나집니다. 만나서 좋은 사람,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있는가 하면 만나서 힘든 사람도 있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지만 그들을 만나야 되는 게 인생살이입니다.

  네덜란드 출신 코리텐붐은 독일나치 하에서 라벤스부룩이라는 수용소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그는 매일매일 목숨을 건 고문을 당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출감하여 그는 세계를 다니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제목의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독일 뮌헨에서 집회를 마쳤는데 한 남자가 자기 앞에 다가와서 “오늘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고개를 들고 자세히 보니 자기를 고문하던 그 악명높은 수용소의 간수였습니다. 코리텐붐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오른손이 뻣뻣해지고 얼굴에 화살이 꽂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온 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간증집회를 했지만 막상 자기 앞에 원수가 나타나니까 화해의 악수를 하지 못하고 손이 뻣뻣해져버린 자기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하나님, 내 마음 속에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하나님께 거듭거듭 기도하니까 마음이 열리고 그 굳었던 몸이 풀리고 그래서 오른손을 내밀어 그 원수와 화해의 악수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은 요셉과 형들이 만나는 극적인 대목입니다. 요셉은 그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일로 인하여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구박을 받았습니다. 들판에 나온 동생 요셉을 죽으라고 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애굽으로 장사하러 가는 상고들이 지나가기에 형들은 그 동생을 끄집어내어 상고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와서는 짐승에게 물려죽었다고 거짓보고를 했습니다. 그 형들은 이제 요셉은 다시 안 만나게 될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 만날 리가 없습니다.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살아올 리가 없고 우리가 애굽에 갈 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먹을 양식이 떨어진 요셉의 형은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가게 됩니다. 그래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동생 요셉을 불가피하게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을 한 눈에 알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형들 앞에 드디어 내가 바로 당신들의 동생 요셉이라고 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형들 앞에 나가기 전에 요셉은 방성대곡 했다, 혼자서 방에서 큰 소리로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 형들을 만나는 그 순간, 반갑기도 하겠지만 자기를 팔아버린 그 형들을 생각할 때 분노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갖 감정을 쏟아 붓는 통곡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 앞에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내가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나를 이곳에 오게 하셨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구원을 위하여 우리 가족과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리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요셉이라는 말 앞에 그 형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제는 죽었다, 우리가 저지른 죄 값에 비하면 죽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런 모습으로 그들은 경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원수 형들 앞에서 왜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먼저 여기 보냈습니다.” 그렇게 답을 합니다. 형들을 요셉을 팔았습니다. 사실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관광을 온 게 아닙니다. 팔려 왔습니다. 노예로 왔습니다. 억울함을 안고 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원한에 찬 팔린 사실을 “하나님이 보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요셉의 그 모습이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 앞에 과거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형님들, 이제 따져봅시다. 누가 날 구덩이에 밀어 넣었습니까? 나를 애굽에 팔자고 한 주동자가 누구요? 나를 팔았던 그 돈 어떻게 썼소?’ 하고 얼마든지 따질 수 있습니다. 내가 팔려 와서 노예생활을 하며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투옥된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칼을 빼어들고 자기를 구덩이에 밀어 넣었던지, 자기를 팔자고 주장했던 그 형들을 골라내어 목을 쳐도 할 말이 없는 상황입니다. 원수를 갚아서 피비린내 나는 그 비참한 장면이 연출되어도 할 말이 없는 장소입니다. 그런 장소에서 요셉이 말한 두 마디가 아주 위대합니다. "그건 하나님이 당신들 앞서 나를 보냈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큰 구원을 위해서 이 일을 행하셨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나 개인을 보면 억울합니다. 내가 당한 사실을 생각하면 도무지 형들을 용서할 수가 없지만 자기가 겪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큰 구원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셉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붙잡았기 때문에 요셉은 형들 앞에서 팔려온 사실을 하나님이 보낸 것으로 신앙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의 태도

  오늘 우리들에게 이 점은 매우 교훈적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현실적으로 무거운 짐도 있고 극단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는 행복한 자리에 있습니다. 어떤 병원에 가보면 가망이 없는 백혈병을 안고 가족과 함께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도 살아오면서 쓰라린 실패도 겪었고 고통도 당하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 가슴속에 아무개를 향한 원망과 적개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억울한 현실, 내가 겪고 있는 억울한 이 고통스러운 현실, 그것만 보시면 원망할 수밖에 없고, 그것만 보시면 불평할 수밖에 없고, 그것만 보시면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향하여 저질렀던 행위를 보면 분노에 차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형들을 보는 순간, 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그렇게 여유있는 승자의 모습으로 형들을 용납합니까? 그게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팔린 것도 하나님의 손길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팔린 것은 사람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러나 배후에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인도해 주시고 함께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 속에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통당하는 성도들의 상담을 더러 했습니다. 부부갈등의 상담도 있었고, 사업의 어려움도 있었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성도의 모습도 봅니다. 여러분, 그 현실을 보면 아주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 마음, 요셉의 이 믿음, 요셉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과 요셉이 자기 현실을 보는 그 믿음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 세우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하게 하셨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큰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 그림을 붙잡지 못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그 믿음을 붙잡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캄보디아 선교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캄보디아는 이 지구촌의 못 사는 나라 그룹에 속합니다. 공산화되어 있던 땅, 킬링필드의 현장, 인구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땅입니다. 아직도 그 흔적이 있고 아직도 해골이 완전히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땅입니다. 그 넓은 땅이 있지만 곳곳에 지뢰가 많이 묻혀 있기 때문에 개발도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태국과 국경지경에는 수많은 거지들이 구걸을 합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자 거지들이 몰려와서 한 푼 달라고 합니다. 가이드가 절대로 돈을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만약 한 아이에게 돈을 주면 수 십명, 수 백명이 몰려와서 우리가 가는 길을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비자 받고 입국 수속하는 것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상처가 너무 크고 지뢰에 팔 다리가 짤려 나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캄보디아에 들어서서 비포장도로를 달려가는데 임산부들은 도무지 견디지 못할 만큼 그 땅이 울퉁불퉁합니다. 그런 비포장도로를 네 시간을 달리는 그런 힘든 여행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은 대체로 맨발로 살고 있습니다. 발가락에 끼는 슬리퍼를 신을 정도면 아주 부잣집 아이고 걸친 옷은 누더기 중에도 누더기를 걸치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무원들은 특권층입니다. 그들은 고급승용차를 굴리고 핸드폰을 쓰면서 살고 있지만 일반 주민들은 그림의 떡입니다. 외국자본이 들어와서 관광지에 호텔은 지었지만 그것은 일반주민들과는 거리가 먼 별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또 선교사가 세운 고아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14명의 캄보디아 고아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완전히 특권층의 아이들입니다. 그 애들은 옷을 제대로 입었습니다. 한국서 보내준 중고품 옷입니다. 그 애들 방에 가니 운동화가 즐비하게 있는데 한국서 보내준 중고품 운동화들입니다. 아파트에서 버린 운동화들은 거기에서 최고의 신발이 됩니다. 운동화를 신는 애를 본 적이 없는데 고아원에 있는 애들은 운동화를 신고 삽니다. 특권층의 아이들입니다. 이번에 제가 캄보디아에서 유심히 관찰한 것은 비만에 걸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안경 쓴 사람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옛날 우리가 못살 때 안경을 썼습니까? 눈이 다 좋아서가 아닙니다. 안경을 써야 될 사람도 못썼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안경 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태국에 사는 현지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1940년대 우리나라와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를 보면서 어느 목사님은 “한국의 원망, 불평하는 사람, 여기 데리고 와서 한 3일만 살도록 해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축복은 원망하고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저 원망하고 불평하고 절망하는데 따지고 보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그 풍성한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 원망하지, 절망할 이유도 없고 원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 한반도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주일을 밖에 나가서 지내본 게 오랜만인데 본 교회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인도하는 이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밖에 나가서 예배드리면 좋을 것 같아도 한번 해보니까 만족이 없습니다. 주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리들과 베드로의 허상

  여러분, 우리는 역사의 실상을 붙잡고 살아야 됩니다. 실상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허상입니다. 이 현실 속에는 허상과 실상이 있습니다. 캄보디아가 그렇게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아주 다행한 것은 그 나라에는 전도를 허용합니다. 교회설립을 허용합니다. 예배당 건축을 허용합니다. 그래서 킬링필드의 땅에 작년보다 한 해 동안에 교인수가 배가 늘었답니다. 그 땅에 소망이 있다는 것도 느끼고 왔습니다. 또 월남난민들 위주로 사는 수상가옥을 방문했는데 한 500가구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TV에서 무슨 흥밋거리로, 관광지라고 찾아갑니다만 현장에 가보니까 아주 처참합니다. 어떻게 이런데서 인간이 살 수 있는가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죽은 하나님을 붙잡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믿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실상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할 때 예루살렘 시민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며 환호를 했습니다. 종려가지를 꺾어서 환호를 했습니다. 겉옷을 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대접했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것처럼 환호를 했던 예루살렘 시민들은 5일 후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실상을 모르고 예수님의 허상만 좇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의 신앙고백이 위대하도다. 내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그리고 주님은 “내가 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자, 조금 전에 그렇게 예수님 앞에 신앙고백을 뜨겁게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간하여 가로되 “그리 마옵소서. 이런 일이 주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님 죽다니요?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입니다. 주님은 왕이 되셔야 되고 그래야 우리의 미래가 보장됩니다. 우리가 성공자가 됩니다.’ 그 환상을 좇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리라는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예수님 앞에 말렸습니다. 그 때 주님의 말씀은 분노에 찬 단호한 말씀입니다.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러분, 혹시 예수님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이 베드로가 오늘 네 신앙생활이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까지 예수님의 허상을 좇았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이다, 그 분이 왕이 되는 날 우리도 한 몫을 하리라는 허상을 좇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실상은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화목제물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의 실상입니다. 그 실상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자 전부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내게 희망이 있을 때는 주님이고, 예수님 앞에서 희망이 안 보일 때는 그만 주님을 등져버리는 제자들의 이 믿음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강력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허상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실 때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꾼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채찍을 가지고 그 장사꾼들을 다 몰아냈습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그들은 성전의 허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전은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집이요 경배하는 집인데 그들은 성전이라는 그 거룩한 집에서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유대인의 허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상을 버리라고 합니다.

  신앙의 허상과 실상

  상식과 문학적 세계에서는 허상도 실상으로 인정이 됩니다. ‘낙엽이 떨어진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낙엽이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엽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합니다. 거기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사실은 낙엽이 떨어지는게 아니고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뭇잎은 스스로 날 수도 없고 스스로 자랄 수도 없고 스스로 떨어질 수도 없습니다. 나무가 잎을 나게 하고 잎을 자라게 하고 이제 그 잎이 시들어서 쓸모가 없을 때는 나무가 그 잎을 버림으로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엽이 떨어진다는 것은 문학적 표현입니다. 그 사실과 안 맞지만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해가 뜬다’ 거기에 아무도 우리는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해가 뜬다고 할 때 “이봐요, 당신 틀렸어. 해가 뜨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돌아가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해가 뜬다는 게 말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 속에서, 상식 속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허상이 실상으로 인정되는 법이 없습니다. 진리만은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을 놓치면 신앙의 허상을 붙잡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 앞에서 “당신들은 팔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먼저 보냈다, 당신들은 뜻 없이 한 일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큰 구원을 이루려고 나를 먼저 이곳에 보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요셉은 하나님의 실상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리는 게 요셉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감옥에 투옥되는 것이 요셉인생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팔리고 투옥되고 고난당하는 것은 다 보이는 일입니다. 사람 손에 의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실상을 가지고 요셉의 생애에 복을 주시고 그를 높여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습니다. 그 일을 통하여 요셉은 가족을 구원합니다. 그 일을 통하여 애굽을 구원합니다. 흉년 가운데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그 국난을 이 요셉을 통해서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실상을 붙잡는 자는 이런 위대한 일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껍데기를 붙잡고 있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실상을 붙잡을 때 나를 통해,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전건축은 허상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집을 원치 않습니다. 보이는 집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복음의 도구입니다. 복음자체가 아닙니다. 보이는 집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큰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실상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상을 붙잡은 믿음은 얼마든지 성전건축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껍질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실상을 믿으십시오. 그 분의 구원계획을 믿으십시오. 성전건축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믿으십시오. 그 계획을 믿는다면 요셉이 고난을 감당하는 것도 감당할 수 있고, 요셉이 그렇게 위대하게 애굽에서 제2인자로 높임을 받는 그 영광도 우리의 생애 속에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맺는 말

  지금 우리들에게 한 가지 신앙생활에 옐로우 카드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허상이 너무 많습니다. 장식이 너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알맹이인데 우리는 화려한 장식 가지고 실상인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호산나를 부르며 종려를 흔들던 예루살렘 시민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보는 예수 그 속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역사를 바꾸고 인간을 바꾸고 인간을 멸망에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구원에 이릅니다. 그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역사합니다. 그 예수의 실상을 오늘도 우리가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요셉의 승자의 당당함, 그게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결과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