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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가 찔림은 (사 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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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영구 목사 (창원한길교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신 분들의 평은 대체적으로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참 잔혹하다, 끔찍하고 충격적이어서 다른 감정을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심지어는 구토를 했다..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 반응은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만 했지 실감하지는 못했는데 막상 영상으로 보니까 그 로마군인들의 채찍질, 십자가고통이라는 것이 너무 처절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저렇게 맞으시는 분이 굳이 예수님이 아니라 일반 죄수라 할찌라도 그 맞는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울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화를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저는 그런 반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주님의 고통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그저 매맞고 십자가에 피가 낭자한 채 달린 그 모습이 너무 안됐고 불쌍해서 흘리는 눈물이라면 그런 눈물은 주님의 고난과 아무 상관이 없는 눈물이겠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통받는 모습이 너무 안됐고 불쌍해서 흘리는 눈물이라면 슬픈 연속극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텔레비전 프로에서 가끔씩 보여주는 소아암환자나 불치병에 걸려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과 우리 주님의 고난의 현장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의 이유가 같다면 그것은 동정의 눈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불신자들도 그런 눈물은 흘릴 수 있고 심지어는 절에 있는 스님들도 얼마든지 흘릴 수 있는 눈물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앞에두고 흘리는 눈물은 그런 동정의 눈물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고난주간과 주님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흘려야 하는 눈물은 어떤 눈물이겠습니까?
1. 그것은 애통의 눈물입니다. 그런데 이 때의 애통은 단순히 주님이 참 불쌍하다..는 의미의 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죄를 향한 애통이고, 동시에 그런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 이르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인생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애통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주님이 왜 그런 처절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 왜 그렇게 비참하게 매맞고 온 몸이 터지고 찢어지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했습니까?
그것은 주님 자신의 죄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그 고초와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4절을 읽어봅시다.

그분이 고난받으신 것을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허물과 죄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을 현혹했기 때문에 그 죄값으로 당연히 죽어야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거짓 메시야..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을 기적이나 그럴 듯한 말로 유혹을 하고 선동을 해서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라고 몰아부쳤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매맞고 벌을 받아서 죽어야 했다고 생각을 했더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은 레위기서 말씀에 근거해서 죽어도 나무에 달려서 죽은 사람은 전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는 죽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예수님을 메시야인지 아닌지 의심했던 사람들은 진짜 메시야라면 나무에 달려 죽지는 않을 것이고,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든지 아니면 무슨 대단한 기적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나무에 달린 채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걸 보고 유대인들은 확신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메시야는 무슨 메시야...나무에 달려 죽는 거 보니 틀림없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메시야니 뭐니 거짓말 하니까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습니다. 저주는 저주로되 예수님 자신의 죄로 인한 저주가 아니라 그렇게 비웃고 욕하는 유대인 자신들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였고, 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해서 받으셨다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무리의 죄악을 대신 한 몸에 걸머진 대속의 어린 양...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은 끝내 몰랐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사제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지은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하지만 죄인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물이 대신 죽는 제사제도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양을 한 마리 성전에 끌고 와서는 그 머리에 안수하면서 자기 죄를 그 양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리고는 그 양을 하나님앞에서 잡아 죽여서 그 피를 하나님앞에 흘리고, 그 고기를 남김없이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양을 하나님이 받으시고는 그 죄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이 때 대신 죽는 양을 대속의 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유대인들은 수천년동안 이 대속의 양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를 시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어린 양의 실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자기 죄로 저주받아 죽는 것이려니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맞으신 채찍은 사실은 나를 향해 날아오던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터지고 상한 상처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맞았어야할 내 죄의 값이요,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고난을 보면서 주님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내 죄가 생각나서 울고, 내 허물과 내 죄악이 주님을 저렇게 처절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런 죄악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인됨을 인하여 통곡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은 나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자신의 죄가 아닙니다. 내 죄요, 내 허물이요, 내가 받았어야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것임을 어떤 경우에라도 믿어 의심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점에서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제 다시는 죄를 돌아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식당에서 산낙지가 나오면 절대로 먹지를 않습니다. 처음엔 이 분이 음식을 되게 가린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 분의 돌아가신 아버님이 뱃사람이었는데 배위에서 이 낙지를 산 채로 드시다가 질식해서 그대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 이 분은 절대로 산낙지를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한 그 음식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서 돌아보기도 싫은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주님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 다름 아닌 내가 지은 죄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죽게 만든 것도 내가 저지른 허물과 죄악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주님 때문에 구원받게 된 사람이 죄를 돌아보고 싶겠습니까? 죄를 짓고 싶고 죄의 유혹에 이끌리려고 할 때에 이 주님의 고난과 처절한 고통이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비참한 그 죽음이 바로 이 죄때문임을 생각할 때 몸서리 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죽음에 이르게한 이 죄를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이것이 주님 고난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할 죄에 대한 태도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제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이 왜, 누구 때문에 이르게된 고난인지를 늘 기억하면서 다시는 그런 죄에 이끌리지 않는 정결한 삶을 새롭게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십자가앞에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그래서 감격의 눈물이어야 합니다.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 분이 계십니까? 누가 내가 맞을 채찍을 대신 맞아주고, 내가 당할 죽음을 대신 죽어주며, 누가 장차 나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의 심판을 대신 막아주겠습니까?
사람은 마음이 없어서도 못하고, 능력이 안되서도 못합니다. 누가 죽음을 대신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심판을 대신 당할 수 있습니까? 자기 죄에 대한 심판도 감당하지 못하는데...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저주와 죽음을 대신 담당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은혜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사랑입니다. 대신 맞은 채찍은 나를 향한 주님의 뜨거운 마음을 담고 있고, 옆구리에 찔린 창자욱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상처 혹은 흔적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스티그마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비참하고 처절하다고 느끼는 그 주님의 고난과 상처는, 역겹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사랑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보면서 그 사랑의 스티그마 때문에 감격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향한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거기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그 사랑에 겨워 오히려 즐거운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는 자랑입니다. 세상 그 어떤 자랑보다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자랑하고 또 자랑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진정한 자랑의 제목입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이 시간에 주님의 고난을 나를 위한 고난으로 믿고 받을 수 있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내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또한 오늘 이 십자가를 기념하는 이 시간에 나를 향한 가장 큰 사랑의 증거를 가슴에 안고 감격에 겨워 영원토록 이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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