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하는 아들 (딤후 1:1~8)

  • 잡초 잡초
  • 314
  • 0

첨부 1


- 설교 : 강구원 목사 (갈보리교회)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디모데를 향하여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의 제자 디모데를 향한 그의 진실입니다. 그는 지금 로마에 있는 한 감옥에서 자신의 파란 만장했던 복음전파의 격전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측되는 자신의 생을 정돈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영감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남은 일을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속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한 장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무에게나 붙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때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디모데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사도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진실은 디모데 속에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바울의 육적 의미의 아들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영의 아들이었습니다.

육이 생존하는 세계에서만 가능한 육의 아들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영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생을 정리하는 을씨년스러운 감옥에서 디모데 속에 있는 그 믿음이 그리웠습니다.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 속에서 속으로 통하는 그 믿음이 결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 믿음과 믿음이 영적 부자 관계를 가능케 한 것입니다.

Ⅰ. 속으로 통하는 믿음의 아들입니다.

본문 1장 5절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 속에 믿음이 있다는 말은 디모데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곧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2절에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 속에 믿음이 있고 디모데 속에 예수가 있다는 말은 디모데는 성도로서의 본질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는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1장 1절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속에 있는 예수는 곧 디모데 속에 있는 예수입니다. 디모데 속에 있는 예수는 곧 바울 속에 있는 예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본질상 동질입니다. 본질상 동질이면 모든 것이 동질입니다. 본질상 이질이면 모든 것이 이질입니다. 동일 본질이 같은 본질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육정의 부모자식이 만나고 싶은 것과는 좀 다른 그리움입니다. 육정의 그리움보다는 차원이 다른 그리움입니다. 육의 그리움은 하나이지만 영의 그리움은 영과 육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본질이 디모데의 본질을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Ⅱ. 거짓없는 믿음의 아들입니다.

본문 1장 4-5절에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거짓이 없는』( )이라는 말은 위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짓이란 말은 사실이 아닌것을 말합니다. 거짓이란 말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의미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을 디모데의 눈물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눈물은 진실입니다. 눈물은 웅변이상의 것입니다. 거짓은 진리의 사람 디모데의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에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1절에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거짓은 마귀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생각함이라』( )는 말은 생각나게 하는 것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바울로 하여금 디모데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바로 거짓이 없는 그의 믿음입니다. 그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습니다.

자연인 디모데는 거짓된 인간입니다. 그는 본래부터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불쌍한 자였습니다. 시편 116편 11절에 『내가 경겁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자연인 디모데는 하나도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소극적이고 육신적으로 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디모데 속에 있기 때문에 그의 진실이 가능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디모데 속에 역사하여 눈물을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디모데 속에서 그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거짓의 종이 될 수 없었습니다.

Ⅲ. 신앙의 뿌리가 있는 믿음의 아들입 니다.

본문 1장 5절에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로이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유니게를 그에게 선물로 주어 믿음으로 양육하게 했습니다. 로이스와 유니게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유대교적 신앙인이라는 염려는 필요 없습니다. 이들이 헬라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서(행 16:1)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방인들과 결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유니게를 믿는 여자라고 했습니다(행 16:1). 바울은 디모데의 신앙을 확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완전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유니게를 통하여 그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 믿음을 계승시켰습니다. 따라서 로이스와 유니게와 디모데의 믿음은 동질입니다.
이 믿음은 입에서부터 입으로 전달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에서부터 눈으로 전달되는 믿음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육에서부터 육으로 전달되는 믿음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믿음은 속에서부터 속으로 전달되는 믿음입니다. 이 속에 있는 믿음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맥이 있는 전통적인 믿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의 외조모 루이스의 하나님, 어머니 유니게의 하나님, 그리고 디모데의 하나님입니다.
이 믿음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떠한 요동에도 오염되거나 그 색깔이 변하거나 그 방향감각을 잃거나 빼앗길 수 없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속에서 속으로 계승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속에 있는 믿음, 곧 십자가의 믿음입니다 바로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는 믿음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는 믿음입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외조모 로이스 속에 들어가서 이 믿음을 유니게 속으로, 유니게 속에 들어간 예수님은 디모데 속에 들어가서 이 믿음을 계승시켰습니다. 이들은 속과 속을 주고받으면서 신앙의 물줄기를 도도히 이어 갔습니다.

Ⅳ. 뜨거운 믿음의 아들입니다.

본문 1장 6절에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불일 듯 하여』( )라는 말은 그가 처음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그 뜨거운 열정을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바울 개인이 디모데를 안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디모데가 바울 자신의 계승자인 것과 안수를 통해서 바울 자신의 권위를 위임받았다는 뜻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받은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쏟은 사랑의 피입니다. 그 피는 생명의 피입니다. 그 피는 불같이 뜨겁고 화산처럼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뜨거운 종교입니다. 모든 것이 녹아서 재생되는 종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자식이라는 말, 아들이라는 말, 딸이라는 말을 한 마디로 시원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하면 무엇인가 잘못된 정의입니다. 그래서 국어 큰사전에는 아들을 사내자식, 딸을 여자자식, 자식을 아들과 딸의 통칭, 이렇게 정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국어사전의 정직성이자 한계성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자식은 한마디로 정의 할 수 없는 성분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식간에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을 설명할 수 있는 우리 가운데 탁월한 단어가 있다면 속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속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명사로서 "뼛속까지 스미는 깊숙한 안"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속을 주고 받는 것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준다는 말이나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는다는 말은 피상적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를테면 반드시 사랑과 속사랑, 마음과 속마음의 이원화 된 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바울의 속마음에서 쉬지 않고 생각나게 하고 생각할 때마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보고 싶은 사람, 그래서 늘 기억되는 사람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속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속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서로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통하지 않는 속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를 모시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과 마음은 동질입니다.
어떤 성도가 저의 설교집을 보고 전화를 했습니다. 저의 설교 가운데 "생각나는 사람"이라는 설교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 되어가고 그 일이 끝날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헤어지는 이별 앞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원이나 그가 남긴 업적 앞에 흉상을 만들어 세우는가 하면 기념비를 세워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복음전도의 격전지에서 생각나는 사람
교회운동의 축복의 행군대열에서 생각나는 사람
자신의 생을 정돈할 때 생각나는 사람
보고 싶은 사람, 만나보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앞에 속과 속을 주고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품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그 품 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진한 것입니다. 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여러분의 속을 내어 놓으십시오. 그 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행동화될 때 따라오는 결과를 가지고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속은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속은 하나님의 속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속과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속은 바로 교회 부흥입니다.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