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경계선을 넘어 (요 4:1-9)

  • 잡초 잡초
  • 275
  • 0

첨부 1


- 장영일 목사 (범어교회)

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 6.25 한국 전쟁 54돌 기념일을 보내면서

지난 금요일이 한국 전쟁 개전 54돌이 된 날이었습니다. 금년에는 이라크에서의 김 선일 납치 피살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 전쟁에 관한 역사 뉴스들이 크게 부각되지를 못했습니다.

김 선일씨 사건은 정말 가슴아픈 일입니다. 부산 달동네에서 성장하면서 환경에 누릴지 않고 복음을 영접한 뒤 선교사의 꿈을 키워가던 참신한 젊은 믿음의 형제였습니다. 그가 친구에게 보낸 전자 편지에 의하면 이라크에 간 것도 스스로 선교사 훈련이라 여기고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안타깝고 표현하기 어려운 의분이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지금은 이 일로 이라크 추가 파병 논의가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추가 파병을 철회하라고 외치는가 하면, 오히려 우리 군인들의 안전을 위하여 전투병의 수를 더 늘여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두 의견이 모두 나라와 국민을 위한 애정에서 나오고 있는 애국자들의 목소리들로 생각됩니다.

이러는 중에 중국 베이징에서는 북한의 핵 문제를 풀기 위한 6개국 회담이 진행되었습니다. 금번에도 썩 유쾌한 답이 나오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 생각에 ‘왜 북한이 저렇게도 핵을 담보로 하여 자기들의 생존을 보장받으려 할까? 핵을 포기하면 오히려 안전 보장을 해주고 국제 사회로 나아오면서 개혁 개방을 통하여 국가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 텐데 . . . ’ 하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렇듯 6월은 우리들의 역사 경험에 ‘피의 달’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6월만 되면 전쟁의 기억 속에서 이 땅의 안보를 걱정하며, 남북이 상호 불신을 버리지 못하고 전쟁의 상처 속에서 원수시 해야 하는가?

일부 국민들은 금강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서로 왕래하고 있고, 심지어 이미 개성 공단을 착공하고 있고 그 곳에 수많은 기업들이 입주를 신청하고 있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의 정서는 아직도 부정적입니다. 일전에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서 설문한 ‘김정일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호칭을 어떻게 부르는 게 좋겠는가?’에서 어떤 분은 그 질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노를 표현하기도하고, 어떤 분은 왜 김 정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가? 고 되묻기도 하고, 심지어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란 강한 의견까지 내신 분이 있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의견이었습니다만 남북 관계에 대한 기독교인의 현주소를 일부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6.25의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잊어서도 안됩니다. 민족 광복의 기쁨을 한순간에 빼앗아 가버린 죄악의 날입니다. 수많은 양민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가족들이 이산의 아픔 속에서 오늘까지 그 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다시는 그런 전쟁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다시 일어난다면 우리 자손들은 다시 3류 국가의 가난과 질병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일을 우리 자손들에게 넘겨주지 않도록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2. 경계선을 넘으신 예수님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들이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예수님은 경계선을 넘으시는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니 아예 경계선이 없으신 삶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유대와 사마리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는 처음 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솔로몬 사후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남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유대라 일컬어졌고, 북은 여러 번의 천도가 있었지만 오므리 왕가가 사마리아에 천도하면서 북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북은 유대의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고 자기들의 성전을 세워 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유대와 사마리아는 원수처럼 된 것입니다. 더욱이 북이 앗수르에 의하여 패망하면서 앗수르가 이방인들을 그 곳 사마리아성에 입주시키면서 혼혈족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욱 업신여겼고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 후 유대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70년 후에 바사 제국이 일어나면서 유대인들이 환국 하게 되었는데,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무너짐 성을 수축하고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을 때 가장 앞장서서 방해한 사람들이 또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오랜 원수지간이 되어 살아왔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북편 갈릴리로 가려면 중간 지역인 사마리아 성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동편으로 우회하여 먼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가시지 않으시고 사마리아 성으로 통과하려고 그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다가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는데 그 여인과의 대화에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안 인들의 관계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7-9절)

그리고 뒤 부분에는 나오지만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예배드리는 처소가 달라서 서로 정통 이단 시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부분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완전히 남남이 되게끔 했던 가장 중요한 분열의 요인이었습니다. 신앙의 차이 이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이데올로기의 차이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겐 성전은 이데올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2) 경계선을 넘으시는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물론 당시엔 휴전선이나 군사 경계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없더라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경계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리낌없이 넘어가셨습니다.

선만 넘어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그곳의 여인과 대화까지 하셨습니다. 더구나 그 여인은 남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도 상종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우물가로 잘 나오지 않는 그 시간(‘제 육시’는 정오이다)에 물을 길으려고 나온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말만 나눈 것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까지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깊은 신뢰 속에서 나누는 교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경계선은 넘기 전에는 멀어 보이고 무서워 보이지만, 넘으면 넘을 수 있는 선이란 것입니다. 아니 넘으면 아예 그 선이란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장년 2부 홈페이지에 윤 충식 집사님이 쓰신 참 좋은 글이 하나 나옵니다.

“어렸을 적 소나기가 오면 비가 오는 그 끝자락과 양지의 경계선에서 몸의 한쪽은 비를 맞고 다른 한쪽은 햇빛을 받고 싶었던 것과, 파란 하늘에 구름이 둥실 떠 있으면 구름의 그늘과 태양의 양지경계선을 왔다갔다 해보고픈 생각에 멀리 산 끝자락까지 뛰어갔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비가 오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과 음지와 양지도 명확히 갈라지지 않음을 보고 매우 서운했었습니다.”(나눔 게시판 No. 684, 06.16)

아주 아름다운 추억에서 찾은 경계선의 교훈입니다. 멀리서 보면 경계선이 분명히 있을 것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넘어보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선은 분명히 있습니다. 비오는 곳과 오지 않는 곳은 분명히 실존합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다보면 그 차이를 모르는 체 넘어 가버린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둘은 전혀 대화가 안될 것 같은 사이인데도 지금 대화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분명히 실존하고 있는 둘의 차이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녀를 구원하셨고 그녀는 예수님을 동네에 알리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경계선을 넘어오신 예수님을 만난 그녀도 경계선을 넘어간 것입니다. 평소 자기를 숨기고 살던 그녀, 남들이 우물가에 오는 시간은 피하여 몰래 나와야만 했던 은둔의 삶을 청산하고 과감하게 다른 여인들 앞에서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도 주실 은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게 됩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살도록 요구받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2-18)

어느 집사님께서 근래에 북 유럽을 여행하시고 오셔서 ‘세계를 나가보니까 더욱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란 주님의 산상 보훈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시며 보태시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됨”보다 더 큰복이 어디 있겠습니까?’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였습니다. 그 화평을 위하여 경계선을 넘어가셨습니다. 그래서 경계선이 없는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이고 에덴의 동편 놋 땅으로 갔던 가인은 가장 먼저 성을 쌓았습니다.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성을 쌓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경계선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현실적 힘이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평안을 잃고 불안 속에 살게 됩니다. 오직 우리의 경계선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그래서 그는 하나님만 나의 산성이 되시면 세상의 모든 담을 뛰어 넘어가리라고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29-30)

3. 마무리하며

여러분! 담을 넘어보십시오. 그러면 생각보다 쉬울 것입니다.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부의 담, 부자간의 담, 성도들과의 담, 이웃과의 담, 사회적 선입견의 담, 빈부의 담, 남녀의 담 등 많은 경계선이 우리를 나누어 놓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넘어가 봅시다.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믿음으로 사랑으로 경계선을 넘어가면 우리가 밟는 모든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패배자로 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로 화평케 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