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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몬과 여인 (눅 7: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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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철희 목사  (영암교회)
 
서론:

지난 한 주간은 우리 모두가 충격 속에서 지내온 시간이었습니다. 아랍 민족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꿈을 키우던 한 젊은이가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고 김선일씨는 가나무역에 입사 동기서에 이런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을 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없는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중략) 중동지역 선교사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김선일씨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했던 그 사람들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더욱 가슴아파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죽음 앞에서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그를 중동에서 죽게 하셨는가?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온 나를 들썩이게 한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방송언론이 부추기는 고인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잠잠히 찾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고인이 미국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 희생양이 아니라, 아랍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값지게 죽어간 우리의 형제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였던 이의 죽음을, 망각의 세월 속에 묻치지 않도록 해야 할 진정하는 애도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베다니에서 주님의 죽음을 준비하며 향유 옥합을 깨뜨린 사건과는 또 다른 향유를 붓는 이야기입니다. 여인들이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이야기는, 4복음서가 모두 언급하고 있을 만큼 기독교신앙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진정한 믿음과 그 믿음이 만들어내는 신앙인의 행동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한 바리새인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주의자들이라고 할 정도로 상당히 폐쇄적이고 아무하고나 식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목수였던 주님이 바리새인식탁 초대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만큼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주님이 점점 중요한 인물이 되어 가면 어떤 변화가 생기겠습니까?

일반인들이 주님과 가까이 하는 일, 더구나 주님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식사를 나눌 때 그 집에 구경오곤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나도 예수님을 초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을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인 시몬이었는데, 주님을 영접한 사람, 곧 그 집의 주인처럼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결코 자기 집에 주님을 당당하게 초대할 수 없는, 죄인 취급받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을 당당하게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이 아니라 이 여인에게 영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주님을 모셨지만 정작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있지만 예배를 드리지는 못하지는 않습니까? 바리새인으로써 자기 신분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주님을 초대해 놓고도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시몬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나는 시몬인가, 여인인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어야 겠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식사 할 때는 식탁에서 비스듬히 발을 뻗고 반 눕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식탁에 비스듬히 앉아서 머리는 식탁을 향하고 발은 멀리 뻗고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 때 매우 난처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한 여인이 예수님 뒤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웁니다. 여인의 눈물이 주님의 발에 뚝뚝 떨어집니다. 모두들 당황합니다. 이 여인도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마땅히 주님의 발등에 떨어진 눈물을 닦아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 여인은 갑자가 자기 머리를 풀어 그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등에 떨어진 눈물자국을 닦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더 떨어지고 주체 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주님 발은 적셔집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을 가진 여인이기에 눈물로 주님의 발등을 적시며 그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리는 것일까요?

여러분! 이 여인은 지금 대단히 큰 실례를 범하고 있습니다. 식사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여인이 잔치자리에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것은 큰 실례입니다. 여인이 머리를 풀어 헤칠 때 바리새인들은 부정 타지 않으려고 그 여인에게서 멀어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잠잠히 지켜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그런 행동을 더욱 못 마땅히 생각하며,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것이라”고 주님까지 비난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여인의 무례한 행동을 참으시며 오히려 인정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누구일까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 여인의 이름과 그 죄가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여인이 창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요12:1-11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눅8장 2절에 귀신들렸다 고침 받은 막달라 마리아를 모두 창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여인도 창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고 폐쇄적인 바리새인의 식탁에 창기가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을까요?

또 어떤 사람은 본문에서 이 여인이 머리를 풀어 주님의 발을 씻었다는 이 구절 때문에 다른 남자와 몸을 더럽힌 죄가 있는 여인이 아닌가 추측 합니다. 민5:18 남편 외에 몸을 더럽힌 여인의 죄를 확인할 때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 머리를 풀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이 여인에 대해 말씀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 한 가지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주님에게는 그 한 가지가 이 여인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은 주님을 영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이 여인의 과거와 죄만 보였고 이 여인이 눈물의 가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머리를 풀어 헤칠 때 뒤로 물러났습니다.

주님은 시몬을 부르십니다. 시몬아! 이 여인을 다시 한번 보라고 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도 감격과 감동도 없이 살아가는 시몬에게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을 봅니까? 주님 앞에서 감격과 감동의 삶을 원하신다면 이 여인의 참 모습을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44절 - 여자를 돌아보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손님들은 맨발로 방에 들어오기 때문에 귀한 손님이 오면 주인은 그들에게 발을 씻도록 수건과 대야에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인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했고 특별한 경우에만 주인이 직접 존경의 표시로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 주인의 역할을 한 사람은 바리새인 시몬이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는 동네 어느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초대할 만한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주님을 영접할 수도 없고 주님을 대접할 수도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 되었을 때 주님 머리에 향유를 부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왔습니다.

향유는 머리에 붓는 것이지 발에 붓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133:2, 23:5)

그러나 주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 머뭇 뒤편에 섭니다. 주님의 발이 보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 받으셨는데 그 발에 먼지가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도 주님께 발 씻을 물도 가져다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 볼 때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여인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주님 발등을 적시고 머리카락을 수건삼아 닦아 드립니다.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원래 이럴려고 한 것이 아닌데 주님 발을 보는 순간 그만 눈물이 나와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원래 그럴려고 한 것이 아니데 그렇게 되는 일이 많지요?

원래 싸울려고 한 것이 아닌데 말 다툼이 커져서 싸우기도 하고, 원래 내가 밥 사려고 한 것이 아닌데 분위기 때문에 돈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래 5천원 헌금하려고 했는데 5만원 헌금 하는때도 있습니다. 원래 1부 예배만 드릴려고 했는데 오후예배까지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괞찮습니다. 감격하고 감동받아서 주님께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해 드리는 것이야 얼마든지 괞찮습니다. 오늘 하나님도 원래 주려고하던 복이 아닌데 더 많은 복을 주실줄 믿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격하고 감동해야 눈물로 발을 적시고 여인이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춘단 말입니까?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 표현입니다. 발에 입을 맞춰보신 적 있습니까? 주님의 발에 입은 못 맞추어도 주님의 말씀에라도 입을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숨을 거둔 아빠의 발에 입을 맞추며 우는 딸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아빠를 붙들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마지막 떠나시는 아빠를 향한 그 마음을 더 이상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발에 입을 맞추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는 것이지요.

이 여인은 감히 주님의 몸에 손을 못대고, 가장 더러운 곳 가장 천대 받는 그 발에 자신의 최고의 가치인 머리카락과 눈물과 향유를 쏟아 붙습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에 주님은 그동안 죄인이라고 천대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여인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행동에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내가 네 집에 들어왔으나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만 이 여인은 내 발을 눈물로 적셔 그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부었으니 네가 그 믿음을 보느냐? 네가 이 여인을 죄인이라고 하느냐, 내가 오늘 이 여인의 죄를 사하노라

여인아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과거의 모든 죄와 멸시 천대의 짐을 벗고 평안히 가라.

손가락질은 병들지 않은 사람도 죽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손가락질 당하는 이 여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오늘 주님께 그 모든 고통을 치료하셨습니다. 너를 얽매던 모든 죄에서 자유하라.

여인은 여인은 과거의 모든 고통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비웃고 조롱해도 주님이 나를 인정해 주셨다”는 감격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이 여인은 바리새인집에 와서 주인처럼 주님을 영접해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은혜위에 은혜를 받고 갑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모습으로 나와서 어떤 상태로 돌아갈까요?

주님은 시몬에게 “내가 네 집에 왔으나 발 씻을 물도 내 놓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죄인 취급 받는 여인은 향유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는데 정작 주님을 초대한 시몬은 발 씻을 물도 내오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시몬처럼 발 씻을 물도 내오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요? 주님은 발 씻을 물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으라는 말씀입니다.그래야 주님께 감격하고 감사하고 은혜위에 은혜를 받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 사람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나도 저 여인처럼 갖다 바치라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시몬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때 주님은 시몬을 불렀습니다. 눅7:41 시몬아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자와 오십데나리온 빚진자가 갚을 능력이 없을 때 모두 탕감해 주었다면 둘 중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묻습니다. 이 여인의 깊은 경의와 감사의 표현은 이미 이 여인이 지난 과거의 죄와 어둠에서 용서받고 새로워졌다는 증거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죄 용서를 거절했습니다. 눅7장29-30 세례요한의 절박한 회개의 부르짖음에 관심이 없었고 세례요한의 세례를 무시했습니다.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회개를 거절한 바리새인 시몬은 주님을 초대했지만,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지만 주님에게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인의 역할을 최인취급 받는 여인에게 빼앗깁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께 나올 준비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고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향유 옥합을 들고 눈물로 주님께 나옵니다.

오늘 주님께 예배하는 나는 어떻습니까? 주님께 구원과 평강을 선물로 받지 못하고 여전히 판단하고 자기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으로 남을 것입니까? 아니면 회개하며 주님께 나와 정성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평강와 구원을 받아 감동있는 삶을 살 것입니까?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죄에 빠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를 많이 지을수록 죄사함도 커지고 죄사함이 커질수록 감사함도 커집니다. 큰 죄인일수록 변화도 크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 자라기 내가 나올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주님께 나옵니다. 주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 되었지만 주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죄용서함 받고 감사와 감격으로 정성으로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인 줄 믿습니다.

신앙은 정성입니다. 한국교회는 정성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본당 1층에 오래된 가구하나가 있습니다.

성미함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습니다. 권사님들은 밥을 짓기 전에 한 수저 성미를 뜨던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성미를 뜨는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성미를 뜨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성미함을 다시 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미함을 옛 신앙인의 정성을 말해주는 역사의 산물로만 남겨서는 않됩니다. 마음의 성미함을 다시 열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마다 성미를 뜨는 수저를 다시 놓아야 합니다. 마음의 성미 항아리를 다시 놓아야 그 가정이 삽니다. 신앙은 정성입니다.

창22장: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아 온갖 정성을 그 아들 이삭에게 쏟았습니다. 하나님께 쏟았던 정성을 이제 그 아들에게 쏟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네 정성이 하나님과 아들 중 누구에게 있는지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로써 100세에 낳은 아들에게 정성을 쏟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그 것이 이삭과 그 후손들을 살리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어디에 정성을 쏟고 있습니까? 정성을 잃어버린 믿음으로 힘없는 신앙인이 되어서 세상이 주는 힘을 의지하여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찾지 않습니까? 신앙이 내 삶의 중심에서 힘이 되지 못하고 선택이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결론: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단지 어떤 고백이 아닙니다. 그분에 대한 헌신과 충성심도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안에서 죄사함과 자유케 함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여기서 양으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비로소 주님의 한없으신 사랑과 자유와 평안을 체험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믿음과 행동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죄 용서함을 받아들이고 그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여인을 이해 할 수 없었고 충격이었습니다.

믿음은 죄인들의 친구이신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의로운체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

주님께서 여인의 죄를 용서할 때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죄를 용서하느냐고 주님께서 하시는 죄 용서를 거절하던 바리새인처럼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그 신앙이 어떻게 정성이 담길 수 있겠습니까?

그 믿음이 어떻게 평안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믿음이 은혜위에 은혜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주님을 바라만 봐도 눈물이 흐르고 주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저며오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 감격과 눈물은 다 어디로 가고 바리새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여인의 자리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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