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확실히 변화되고 있습니까? (롬 12:1-2)

  • 잡초 잡초
  • 252
  • 0

첨부 1


- 오주철 목사 (영신교회)

어느 글에 보니까 세대별로 여자들이 싫어하는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듯 하기도 하고, 재미가 있어서 한 번 읽어드릴까 합니다.

▷10대 소녀들이 싫어하는 여자: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아이
▷20대 여성들이 싫어하는 여자: 성형수술을 했는데도 티도 안 나고 예쁜 여자
▷30대 여성들이 싫어하는 여자: 결혼 전에 오만 짓을 다 하면서 신나게 놀았는데 시집 잘 가서 잘 사는 여자
▷40대 여성들이 싫어하는 여자: 골프 치고 놀꺼 다 놀고 쏘다니는데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척척 가는 여자
▷50대 여성들이 싫어하는 여자: 먹어도 먹어도 살 안찌고 날씬하고 예쁜 여자
▷60대 여성들이 싫어하는 여자: 건강도 타고났는데 돈복도 타고난 여자
▷70대 할머니들이 싫어하는 여자: 자식들도 효도를 잘 하는데 영감까지 멀쩡하게 살아서 호강하는 여자
▷80대 할머니들이 싫어하는 여자: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사람들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남이 잘되는 것을 보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모든 것을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IBM, 코닥 등 포천 선정 5백대 기업의 변화 컨설팅의 주역인 데이비드 바움 박사가 쓴 '바보는 변했다고 하고, 현자는 변하자고 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변화를 일궈내는 44가지 방법을 짧은 일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의 변화가 부정과 저항과 탐색, 그리고 행동이라는 4가지의 단계를 거치는데 이 흐름을 조절해가면서 진정한 변화로 이끌라고 조언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 있어서 변화나 개혁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변화나 개혁은 다 같은 말인데 이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변화와 개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 사항입니다. 변화와 개혁은 우리의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활력을 잃어버리면 금방 무너집니다. 이것은 가정 생활도 마찬가지고,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조직에는 활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직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조직원들이 변해야 합니다. 성령과 은혜로 아름답게 변해야 합니다. 앞서 소개한 '바보는 변했다고 하고, 현자는 변하자고 한다'라는 책에서 바움 박사는 목표를 향해서 앞만 보고 치닫는 달리기가 아니라 짝을 지어 흥겹게 추는 폴카 춤처럼 즐겁게 변하자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심령에, 오늘 우리가 모인 이 곳에 성령의 충만함이 철철 흘러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이 행복해 하도록 아름답게 변해가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흥겹게 성령의 춤을 출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만약에 변화의 활력이 사라지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간에 불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가 불만을 토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개인과 조직에 권태가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 그리고 한 개인에게 변화의 활력이 살아나면 불만도 없어집니다. 불평도 없어집니다. 권태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가정이 살아납니다. 교회가 살아납니다. 이 사회가 살아납니다.

인간은 사건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도 있고, 사건을 만들며 나갈 때도 있습니다. 사건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는 희생당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내가 삶의 주도권을 잡고 사건을 만들어 나갈 때는 힘이 납니다. 열정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복은 결국 변화의 결과입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운 믿음의 변화가 많은 사람들의 믿음에 변화를 줍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운 삶의 변화가 가정 속에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에서 변화를 제외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변화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변화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고 그렇게 변해 가는 사람은 그가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지위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변화는 돈을 많이 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더 좋은 지위를 준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하나님 안에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 안에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뜨거운 성령의 역사로 내 생각이 바뀌고, 생활 태도가 바뀌고, 믿음의 생활이 바뀌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창세기 3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영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첫 은혜와 첫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붙잡으십시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첫 은혜와 첫 사랑을 잃어버리면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사명을 외면하면 자신의 사생활에 더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로 갈까, 누구하고 무엇을 할까를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첫 은혜와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바 사명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 사명에 끝없이 미쳐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없이 변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변화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다 변해 갑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굳어진 생명에는 내일이 없습니다. 굳어진 것은 죽은 것만 굳어집니다. 나무도 그렇고, 돌도 그렇습니다. 모든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굳어지는 것을 막아야 됩니다. 사람이 굳어지면 큰 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굳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 같아야 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패역한 세대의 패역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 하면 굳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교회에 다니면서 왜 변화가 없습니까? 그는 믿음을 붙든 사람이 아니라 종교를 붙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변화를 만들어 가는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를 붙들지 말고 믿음을 붙드십시오. 변화된 믿음만이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태도가 변하면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변합니다. 존재 가치가 변하면 그로 인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외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 한 번 제대로 믿어봅시다" 쉽게 말해서 기왕 믿을 바에야 똑바로 믿어 보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믿어 보기 위해서 다시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다시 시작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들어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들어와야 합니까? 왜 우리가 교회의 사역에 깊이 들어와야 합니까? 그래야 천국의 잔치를 맛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신앙의 선택을 분명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왭니까? 우리가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분명한 신앙적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믿어서 천국의 백성답게 한 번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복을 받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똑바로 믿지 않으면 하늘의 축복도 없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충 대충 믿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단들 앞에서 욥을 칭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칭찬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목적은 거룩한 강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거룩한 강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강한 믿음의 용사가 되십시오. 결코 종교꾼이 되지 말고,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더 크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내려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오늘 저는 본문 말씀 앞에서 여러분에게 네 번째 시간으로 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확실히 변화되고 있습니까?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릴까요?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서 뭔가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누구에겐가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내 가정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서 뭐가 달라졌습니까?

우리에게 바른 믿음만 있으면 구부러진 생활이 바로 됩니다. 절망적인 환경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뭔가 좀 변하십시오. 지금까지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왔다면 이제는 뭔가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는 비록 부끄러운 믿음, 나약한 믿음으로 살아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바른 믿음을 붙잡으십시오. 저는 우리 모두가 변화된 바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축복의 증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잘 알거니와 로마서는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에 관한 말씀이고, 12장에서 16장까지는 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리에 관한 말씀이 끝나고 생활에 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 곧 바로 "너희는 변화를 받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신학적인 이론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이 변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리만 가지고서는 변화가 될 수 없습니다. 알고 있는 것이 생활로 연결될 때에만 변화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2절은 2개의 명령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개의 명령어는 모두 변화와 관계되는 말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받지 말라'는 말은 '비슷하게 꾸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니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행동이나, 살아가는 양식이나 방법, 혹은 유행에 따라서 자신을 꾸미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세상과 비슷하게 자신을 꾸미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요란하게 자신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귀에도 몇 개의 구멍을 뚫어서 귀거리를 요란하게 달고 다닙니다. 코를 뚫어서 코걸이를 하고 다니고, 혀를 뚫어 혀고리를 하고 다닙니다. 심지어는 배꼽이나 다른 부위에까지 구멍을 뚫어서 장신구를 달고 다닙니다. 어떤 기자가 이렇게 하는 청소년들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남들이 다 하잖아요" "호기심에서 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세대의 변화의 특징입니다.

지난 2월에 어느 새벽기도회 시간에 신명기를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복장에 대해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미국에서 입다가 내다버린 다 찢어진 청바지를 수입해서 비싼 값으로 사 입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냐는 내용의 말씀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오후에 석은미 권찰님이 교회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따뜻한 봄날이 되면 찢어진 청바지를 한 장 장만할려고 맘먹고 있었는데, 포기해야겠다고 말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로 입는데 어떨까 싶어서 몇 년 전부터 봄철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녔었는데 부끄러웠다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최은주 성도님이 댓 글에다가 이렇게 올렸습니다. "이슬이 아빠랑 커플룩으로 찢어진 청바지 있는데 염, 이걸 입어야할까요? 말아야할까요?" 석은미 권찰님이 그 댓 글에 이렇게 답했더라구요. "최은주 선생님, 사실 저도 쬐끔 아쉽네요" 그래서 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입기만 해봐라. 손가락 넣어서 다 찢어버릴테니까." 이경숙 권사님은 댓 글에다가 이렇게 올려놓았습니다. "찢어진 청바지는 할머니들께 갖다드리세요. 잘 기워드릴 겁니다. 저도 잘 기워 드릴께요." 이 글에 최은주 성도님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 할머니도 기워준다고 그러시던데…" 그런데 예랑이가 이 글을 보고 이렇게 댓 글을 올렸습니다. "아빠 정말 심했어요" 여러분, 제가 너무 심했는가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하는 것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3절에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단정히'라는 말은 '품위 있는 태도로 고상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변해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세상 사람들의 유행이나 어떤 흐름을 따라서 변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찬송가에도 그런 노래가 있잖아요.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세상 풍조가 날마다 바뀌어도 나는 내 믿음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사실 세상 풍조는 날이 갈수록 더 이기적이고, 더 타락해져 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교회 밖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그들은 우리를 따를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두 번째 명령은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너희의 속 깊은 본성으로부터 변화되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 말은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소위 변화산에서 변화되었던 모습을 묘사할 때에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변화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변화하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본받지 말라'고 할 때에 '본 받다'는 말의 뜻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 양식이나 행동하는 모양, 유행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으라'고 할 때의 '변화'는 속의 변화, 내면의 변화를 말합니다. 본받지 말라는 것은 이 세상의 겉으로 드러나기만 하고 속은 비어 있는 모양이나 유행이나 양식이나 외형을 따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하라는 것은 성도들이 내적으로 변하라는 것입니다.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변화가 늘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스스로 변화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변화를 받으라"고 했다는데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변화할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변해야 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몸부림을 치지만 내 안에 있는 육신의 법이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죄성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죄를 짓도록 유혹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이 계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마치 알이 스스로 변화하려고 하면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기 위하여서는 어미 닭이 알을 품어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변화하라고 하지 않고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 받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잘못된 성품도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된 생각도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거친 언어도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사고도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위선적인 행위도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 혹은 거듭남이라고도 하고 구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은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주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자라게 되고 변화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정말 예수의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범하는 잘못 가운데 하나는 종교적 관습은 많은데 종교적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게 될 때에 변화는 없고 종교 행위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하십시오. 행함이 없는 이중적인 믿음을 거부하십시오. 야고보는 이러한 이중적인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믿음은 역사함이 없습니다. 오직 살아있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요청하시는 것은 우리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변화시켜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 시대의 아들들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 길은 눈으로 보기에는 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모두가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마지막은 사망이요,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 이끌려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해 가십시오. 이 변화를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구체적인 도전을 시작하십시오. 이 길은 좁다고 했습니다. 이 길은 너무 험해서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이요, 영원한 축복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좁은 길을 나 혼자서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주와 함께 생명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오늘 본문은 우리를 향해서 변화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일으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고, 우리가 무관심하고, 우리가 세상의 유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성령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변화에 관심이 없을 때에는 성령께서도 어쩌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구체적인 노력과 의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고자 구체적으로 노력하고자 할 때에 성령께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네 번째 질문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확실히 변화되고 있습니까? 이제는 뭔가 변하고 싶습니까? 아니 그보다 변화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성령에 귀를 기울이고 복종하십시오. 제발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십시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양태들의 물줄기를 막고 주님 앞에 서는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으로 방향을 정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더 강한 용사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교인이 되지 말고 변화를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우습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으십시오. 사도 바울과 같이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신앙의 자리에 들어가십시오. 평생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연연하여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종노릇하면서 사는 삶을 이제는 청산하십시오. 저는 우리 모두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는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참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평생을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분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평생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믿는 참 맛을 알지 못해서 쓴 약 먹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주와 같이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깨닫고 경험했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십시오. 영적 체험을 간구하십시오. 성령 충만함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를 받으십시오. 적극적으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인내하십시오. 주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감격과 감동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에게 하늘의 넘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서울 충무교회 원로목사님이시고, 우리 교단에서 총회장을 하셨던 박종렬 목사님은 '변화'라는 시조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배운 자 답게 살면, 지식이 빛이 나도
앎 따로 삶 따로면 배운 게 욕이라나,
행함없는 이론신앙도 그런 건가 하노라.
기독자 개개인이 성전화 되기 전엔
동네마다 교회당이 총총히 들어서도
세상이 그런 것으로는 변화될 리 없을러라.
주일에서 평일로 경건이 연결되고
교리에서 생활로 신앙이 고백될 때,
변화가 여기저기서 소리 없이 일러라.
세상이 바로 되길 남에게 기대 말고
나부터, 지금부터, 가능한 데서부터
하나하나 고쳐 가는 게
가장 좋은 첩경이리.}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하면서도 변화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천만명이 넘는다고 말하지만, 이 나라는 별로 변화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변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종렬 목사님의 시조는 변화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변화되기 위해서는 앎과 삶이 따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따로 떨어지면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이론 신앙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손발이 따로 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운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배운 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둘째,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성전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동네마다 총총히 교회당이 들어선다고 해도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변화되기 위해서는 교리에서 생활로 신앙이 고백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일에서 평일로 경건이 연결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일 교인 따로 있고, 평일 교인 따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것으로는 안되고 생활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남이 변화되기를 먼저 바라지 말고 나 자신부터 변화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사람의 변화만을 요구하고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야지드라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혁명가였다. 그 때 하나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소서'였다. 그러나 내가 인생의 절반이 덧없이 흘렀음을 느낀 중년 시절엔, 나는 '주여, 저에게 저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의 누구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보았고 이제 내가 늙어 여생을 헤아리게 되면서 나는 나의 우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내 기도는, '주여, 저에게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이다. 내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했더라면 내 인생을 허송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야지드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창한 계획보다는 진정으로 변화 받은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변화가 없으면 신앙에 승리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대신 먹어 줄 수가 없습니다. 대신 아파 줄 수가 없습니다. 대신 죽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믿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지옥에 가주고, 대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대신 변화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주 앞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래서 나와 내 가정이 행복을 누리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이 황폐해진 이 땅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