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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에베소교회)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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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준 목사 (포항효자교회)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이런저런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때로는 어학종합고사라는 이름으로 영어와 독일어를 패스해야 했고, 때로는 성경종합고사라는 이름으로 성경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제가 이래 뵈도 온갖 시험을 다 통과해서 신학교를 졸업한 우수한 학생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시험들 중에 특히 성경종합고사는 성경에 나오는 온갖 지명이나 인명들을 모두 외워야 했기 때문에 참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이름이나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이름,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 등을 외우려면 그냥은 안 외워집니다. 외워도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암기방법을 동원하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이름 외우는 방법입니다. 이 일곱 개의 교회 이름을 외우기 위해 교회의 첫 글자만 묶어 외웠던 것이지요. “에서버두사빌라!”

그렇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것이 바로 일곱 교회의 이름입니다. 신학교 때는 그저 일곱 교회의 이름을 외우는 데만 급급했는데 졸업한 후 설교를 준비하면서 요한계시록 2~3장 본문을 관찰하며 이 일곱 교회에 대한 내용들을 자세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곱 교회 이름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곱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모두 독특한 특성을 가진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일곱 교회의 특성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그 평가 역시 각자 다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어떤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습니다. 에베소 버가모 두라디라교회가 그런 교회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오직 칭찬만 받습니다. 서머나 빌라델비아교회가 그런 교회입니다. 반면에 어떤 교회는 오직 책망만 받습니다. 사데 라오디게아교회가 그런 교회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오늘 이 땅 위에도 수많은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 교회들마다 모두 칼라가 다릅니다. 수만 명 이상 모이는 초대형교회가 있는가 하면 상가 지하에 세 들어 사는 작은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전도를 잘 하는 교회로 유명하고 어떤 교회는 제자훈련을 잘 하는 교회로 유명합니다. 어떤 교회는 장년보다 청년이 훨씬 많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는 어른 숫자보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대여섯 배 많은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성장해서 유명하고 또 어떤 교회는 날마다 성도끼리 싸우고 다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 효자교회는 어떤 점이 특징일까요? 사람들이 ‘효자교회’ 하면 ‘아, 이런 교회’ 하고 금방 떠오를만한 특징이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이름이 효자교회라 효자 효녀들이 많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떤 분들은 특정 회사 직원 가족이 많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최근에 포항에서 뜨고 있는 교회 중 하나라고 추켜세우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하느냐? 참 중요합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이처럼 다양한 특성을 가진 교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희 교회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하는가? 물론 이것도 중요하겠지.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너희 교회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하시느냐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생각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들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기준이 더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사람의 평가기준과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세상 사람들이 A라는 교회를 보며 건물도 으리으리하게 잘 지었고, 성도도 많이 모이고, 예산도 넉넉하니 참 좋은 교회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교회는 내가 버렸노라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모습을 보며, 또 그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칭찬과 책망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교회론입니다. 교회론이라는 말이 결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친목단체도 아니고 사회봉사단체도 아닙니다. 친목은 교회 말고 다른 곳에 가서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고 사회봉사는 교회 아니더라도 다른 단체에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은 이런 일들을 잘 하는 데 달린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잘 평가 받고 칭찬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교회론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교회론이 없는 교회는 그저 많이만 모이면 그만이고, 일단 교회 건물만 크게 지으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만 많이 모아 큰 교회만 만들면 된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을 잃고 교회답지 않은 교회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는 좋은 교회라고 칭찬을 받지만 정작 하나님께는 책망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입니다. 이 일곱 교회는 당시로서는 전 세계를 대표하는 교회들이었습니다. 며칠 전 어떤 교회의 전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 속한 자그마한 교회인데 그 전도지에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영락교회나 소망교회와 같은 교단에 속한 건전한 교회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이 교회는 작아서 잘 몰라도 영락교회나 소망교회 하면 다 안다는 말입니다. 영락교회나 소망교회가 우리 교단을 대표할만한 교회라고 인정한 것이지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교회들은 오늘날의 영락교회나 소망교회, 순복음교회처럼 사람들이 다 알만한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표적인 일곱 교회들이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서머나교회나 빌라델비아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만 받았지만 일곱 교회가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옛 소아시아 땅이었던 터키에 가보면 이 일곱 교회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그토록 목숨 바쳐 열정적으로 전도한 소아시아 지방, 오늘날의 터키는 이슬람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의 둥근 지붕만 즐비한 이슬람의 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일곱 교회를 비롯해 사도 바울이 피땀 흘려 세운 모든 교회는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 말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저는 앞으로 일곱 주에 걸쳐서 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주제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 일곱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칭찬과 책망을 살펴보며 오늘 우리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거울과 같다고 했습니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줍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 한 번쯤은 거울을 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가끔 거울을 보며 저 자신의 모습을 다듬습니다. 지금도 설교하러 올라오기 직전에 거울을 보았습니다. 머리 모양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가운은 바로 입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거울은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며 잘못 된 부분을 고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요한계시록이라는 거울을 보면서 우리 교회의 모습을 비추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바로 잡고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로 하여금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할 것인가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에베소와 에베소교회

그 첫 번째로 오늘 살펴볼 교회는 바로 에베소교회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입니다. 이 에베소는 수리아의 안디옥,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3대 국제무역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도시의 규모도 소아시아에서 제일 클 뿐 아니라 매우 부유하고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더구나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여신(대지의 신, 다산의 여신으로 그리스어로는 아르테미스, 라틴어로는 유명한 ‘다이아나’입니다.)의 신전이 있는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에베소에 방문했을 때 이 아데미 신전을 본 적이 있는데 신전의 규모는 길이 104미터, 폭 30미터이고 높이 16미터가 넘는 100개의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어 사람들은 이 에베소를 일컬어 ‘신전의 도시’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또 이 에베소에는 이 아데미 신전 외에도 황제 숭배를 목적으로 한 만은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 소요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이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은 직업이 “은장색”으로서 은감실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은감실이란 은으로 작은 신전 모형을 만들어 그 속에 신을 모셔두고 사람들이 이것을 차고 다니며 호신부로 삼았던 것입니다. 데메드리오도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은감실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고 이 데메드리오 외에도 수많은 은장색이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한 마디로 이 에베소는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지만 아데미 여신과 온갖 신들이 지배하고 있던 신전의 도시, 우상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때 이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 잠깐 들러서 복음을 전했고 3차 전도여행 때는 2년이나 머물며 교회를 세웁니다. 신약성서의 10번째 책인 에베소서도 바로 이 바울이 세운 에베소교회에 바울이 쓴 서신입니다. 이뿐 아니라 아볼로라는 성경신학자도 에베소에서 말씀을 가르쳤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이곳에서 사역하였으며 사도 요한도 상당 기간 에베소에 머물며 목회하고 말씀을 가르친 곳입니다. 이런 모든 점을 살펴볼 때 에베소교회는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 에베소에 세워져 당시 소아시아를 대표하는 교회였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소아시아 교회 중 가장 오래 된 전통을 가진 뿌리 깊은 교회입니다. 여러 유명한 지도자들에게 성경을 배우고 유명한 목회자들이 목회한 교회입니다. 한국에도 이런 교회가 몇 개 있습니다. 서울에 세워져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 이름만 들으면 대한민국 성도 누구나 다 알만한 유명한 교회들입니다. 모두가 볼 때 괜찮은 교회요, 목회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목회해보고 싶은 그런 선망 받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칭찬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계시록 본문을 보니 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하나님이 칭찬과 책망을 함께 주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칭찬의 내용은 2절과 3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보지요.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 내용을 볼 때 우리는 당시 에베소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악한 자, 자칭 사도라고 묘사하는데 이들은 에베소교회에 슬그머니 들어온 이단들을 뜻합니다. 6절에 보면 니골라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이단집단은 스스로 자신들이 사도라고 칭하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단사상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단은 누구를 더 좋아하던가요? 불신자를 더 좋아하던가요? 이미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을 더 좋아하던가요? 신자들을 더 좋아합니다. 보통 우리가 다른 집에 가서 전도할 때 그 집 주인이 ‘저 교회 다니는데요.’ 하면 ‘아, 그러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다른 집으로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집에 찾아온 이단들은 ‘교회 다니는데요.’ 하면 더 좋아하며 적극적으로 접근합니다. 이단들은 이렇게 이미 예수를 믿는 성도들 속에 슬그머니 들어가 그들에게 이단사설을 퍼뜨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에베소교회에도 이런 이단집단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이들을 그냥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그 이단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들의 거짓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단을 적발하여 단호하게 몰아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3절에 보면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고 칭찬을 받습니다. 당시 에베소교회는 내부적으로는 이 이단의 공격에 시달리고 외부적으로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에베소교회는 내부적으로는 이단을 단호하게 몰아내고 외부적으로는 모든 핍박과 박해를 잘 참고 견뎌냈던 것입니다. 게다가 2절 첫머리에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이 에베소교회는 본디 아주 열심이 있고 충성스러운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이런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내부적 외부적 위기를 모두 이겨내고 신앙의 순수함을 지켜나간 열정적인 에베소교회와 성도들은 정말 하나님께 칭찬 받을만한 귀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

그런데 에베소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큰 칭찬을 받은 반면 4절부터 보면 큰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책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하나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리고 처음 행위를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사랑이란 말 그대로 첫사랑을 뜻합니다. 첫사랑 해보셨습니까? 김종원이라는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첫사랑,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곳에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는 사랑이여, 그처럼 높은 곳에서 내 옆, 가장 가까이로 내려와 깃털 하나의 무게로도 내 가슴을 쿵쿵 뛰게하는 사랑이여 사랑이여...” 멋지지 않습니까? 첫사랑의 그 가슴 뛰는 느낌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는 저는 첫사랑 해봤냐고요? 물론 해봤으니까 이런 말을 하겠지요. 하지만 너무 자세히 묻지는 마십시오. 가정생활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첫사랑이 왜 이리도 가슴 뛰고 귀한 것일까요? 첫사랑이 다른 사랑과 뭐가 그리 다른가요? 말 그대로 처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아닌 첫 사랑이기 때문에 더욱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귀한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가슴 두근거림과 감격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첫 사랑의 마음,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평생 간직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에베소교회가 처음 신앙을 받아들일 때 가졌던 열정과 그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욕망, 갈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사람들은 처음에는 우상에 대한 욕망과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욕망과 갈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예수님에 대한 욕망과 갈망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욕망, 갈망이란 무슨 뜻입니까? 뜨거움입니다. 열정입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오직 내가 바라고 갈망하는 그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우상에 대한 갈망을 예수님에 대한 갈망으로 바꾸어 예수님을 뜨겁게 믿은 성도들이었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믿고 나니 우상은 다 사라지고, 이제 전에 보이던 그 무엇도 다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입니다. 이것이 첫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에 대한 뜨거움, 예수님에 대한 욕망과 갈망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잃어버렸을까요? 오래 믿고 교회 오래 다니다보니 신앙이 형식화 되고 뜨거움이 다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떤 시험에 들어 첫 사랑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간에 주님은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강력하게 책망하고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회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처음 사랑

우리는 언제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사랑하게 되어 순수하고 열정적인 첫사랑의 경험을 해보았습니까? 이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의 경험이 없는 분은 참 불행합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불행한 것이 첫사랑의 뜨거움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첫사랑을 중간에 잃어버린 사람은 아예 첫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보다 더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아예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 경험할 가능성이라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습관화되고 형식화되어 열정과 순수함을 잃어버렸습니까? 기도하며 눈물 흘리고 말씀 들으며 내 마음이 뜨거워진 적이 까마득한 옛날입니까? 속히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겉모습은 그럴듯한 신앙인이요, 교회는 오래 다녀서 노련한 기독교인일지는 몰라도 하나님께 책망 받고 우리 이름은 일곱 교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첫사랑은 언제입니까? 교회가 뜨거운 은혜가 불타오르고 은혜가 충만하고 처음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심어준 때가 언제입니까? 58년 전 우리 교회가 처음 창립될 때일 수도 있고, 우리 교회가 막 부흥하고 성장하던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의 첫사랑은 많이 식어졌습니다. 그 뜨거움과 순수함은 많이 퇴색하고 우리 안에는 노련미와 남에 대한 판단과 구설수와 인간적인 사고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새신자가 찾아와도 냉랭하게 오는지 마는지 무관심해졌습니다. 언제부턴가 무덤덤하고 습관화된 신앙이 우리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예배는 열심히 참여하고 십일조와 각종 헌금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잘 합니다. 하지만 뜨거움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도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현재 모범적인 종교생활에는 만족하지만 거기에 복음의 감격과 생명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안에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교회 분위기도 많이 좋아지고 뜨거움도 많이 회복되고 새신자들도 따뜻하게 맞아준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안 됩니다. 온전하게 회복되고 되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내가 이렇게 냉랭하고 무덤덤해졌는가? 왜 우리 교회가 이렇게 형식화되고 습관화 되었는가?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노력이 없으면 우리도 하나께 책망 받은 에베소교회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5절에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촛대’란 세상을 밝히는 교회의 사명을 뜻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면 교회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처음 사랑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 교회의 이름도 어느새 세상에서 사그라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늘 우리 교회에 이런 질문을 던지며 첫사랑의 신앙을 잃지 않는 교회와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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