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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성장하고 있는가? (행 25: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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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운걸 목사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씨앗이다.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다.
하지만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 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낸다.
공중에 새들의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일 만큼 자란다.
예수님을 믿음을 겨자씨로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눅17:6 -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작은 겨자씨가 공중에 깃들일 정도로 자라듯이 믿음도 자라야 한다.
오늘 진주문교회 창립 3년 주년을 맞이하였다.
3년 동안 교회가 자라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깃들일 수 있는 교회로 더욱 자라는 교회가 될 줄로 믿는다.
진주문교회를 통해 - 여러분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욱 더욱 믿음이 자라 놀라운 기적,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성도가 될 줄로 믿는다.
창립 3주년을 맞이하여 교회도 자라고 믿음도 자라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그리고 겨자씨처럼 더욱 믿음이 자라 성숙한 교회, 성숙한 성도가 되자.

성도라면 누구나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는데 문제는 믿음이 자라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10가지 이유를 말하였다.

1) 깊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실상 - 그리스도와의 내적 생활을 무시하고 외양에만 치중 하기 때문에

2) 독불장군 신드롬 - 교회에서 이탈해 나와 혼자 힘으로 성공하려고 하기 때문에

3) 이중인격 -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의 질서를 세우지 못하기 때문에

4) 까마귀 노는 곳 - 성장에 미치는 외부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

5) 분산작전 -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6) 사해 신드롬 - 주지는 않고 계속 받기만 하기 때문에

7) 청룡열차 신앙 - 믿음으로 아니라 감정으로 살기 때문에

8) 시련을 쓴 뿌리로 키우는 문제 - 낙심과 비극을 더 좋은 기회로 삼지 않고 쓴 뿌리로 키우기 때문에

9) 얽매이기 쉬운 죄 - 죄를 즉시 그리고 철저히 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10) 그 코끼리 내가 안 죽였소! - 한량없는 은혜와 주님의 완전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위 10 가지 중에 내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벨릭스 총독은 믿음이 자라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방인 가운데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은 로마의 백부장을 기억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한 백부장이 나와 간구하였다.

-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

-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낳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말씀하였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니라”

백부장은 칭찬받는 믿음이었다.
믿음대로 그 시로 하인이 나았다.

로마의 백부장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뭐라고 고백하였는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다.

이방인 가운데 이런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총독 벨릭스는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소송으로 바울을 재판하면서 바울의 변론을 들은 벨릭스는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겠다고 판결을 뒤로 미루었다.
판결을 연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22절 -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

이 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의미한다.
벨릭스는 바울이 전하는 도에 대하여 바울을 고소하는 유대인들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바울이 고소당한 것도 정치적인 죄나 어떤 실정법을 위반해서가 아니라, 단지 신앙의 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이 종교적적으로, 신앙적으로도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판결을 연기하였던 것이다.

‘더 자세히’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라는 뜻이다.
벨릭스 총독이 어떻게 바울이 전하는 도에 대하여 산헤드린 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을까?
이방인인 벨릭스가 어떻게 산헤드린 보다 바울이 전하는 도에 대하여 더 정확히 알 수가 있었을까 구체적으로 알려진 정보가 없다.

그러나 본문 24절을 보면 -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라는 말씀을 볼 때 유대인 아내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유대인인 드루실라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벨릭스는 아내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러므로 베릭스 총독을 바울을 불러 들었다.

25절 -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바울은 베릭스 총독 부부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을 강론하였다.
의 - 칭의

우리는 다 죄 아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분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으신 예수님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롬 3:26 -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어떻게 의인이 될 수가 있는가?
인간의 행위로 의인이 될 수가 없다. 율법으로 의인이 될 수가 없다.
오직 예수 믿는 자만 의인이 될 수가 있다.
의로우신 하나님, 의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칭의’이다.

절제 - 자기통제

사람은 누구나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은 육체의 정욕을 가지고 있다.

벧전 2:11 -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에 빠져 살게 된다.(골3:5)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

심판 - 형벌
절제하지 못한 삶을 산 결과가 무엇인가? - 하나님의 심판이다.
심판은 무서운 지옥의 형벌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져서 영원히 고통과 저주를 받는다.
장차 오는 심판 때에 의인과 악인이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의인은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고, 악인은 영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바울의 설교를 들었다면 예수님을 구주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를 믿고 의롭다함을 얻고 절제의 삶을 살다가 심판 때에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는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벨릭스 부부가 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도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왜 믿음이 생기지 않았는가?
- 그것은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가?
-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이 왜 자라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는가?
-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갖고,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방해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25절하 -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던 벨릭스 총독 부부는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다.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불의한 자인지 -
자신의 얼마나 무절제한 삶을 살고 있는지 -
장차 임할 심판을 받게 될 자신을 생각할 때 두려웠다.

두려움 - 엠프호보스 - 무서워하는`, 즉 `깜짝 놀란`, 두려워하는, 떨리는
두려움은 놀라며 무서워하고 두려워 떠는 것을 의미한다.
두려움을 믿음을 방해한다.
몇 일전의 일이다.

우리 교회 성도 - 전도 대상자를 위해서 기도 - 교회 나오려고 함

점쟁이 - 점을 침 - 교회 다니면 해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 마음에 두려움이 - 믿음을 갖는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요일 4:18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는 사랑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사랑으로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무엇인가?
심판, 지옥, 저주, 불행, 재난, 불치의 병 ---
하나님의 사랑으로 두려움을 내어 쫓는 성도가 되자.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돈에 대한 욕심이다.

26절 - “동시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다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벨릭스 총독 부부가 바울을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왜 자주 불러서 이야기를 하였는가?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말씀을 더 상세히 알기 위해서 불렀는가?
자신의 불의와 무절제한 생활을 뉘우치고 회개하기 위해서 불렀는가?
바울의 말씀이 너무 좋아 은혜받기 위해서 불렀는가?
벨릭스 총독은 바울의 말씀을 듣고 잠시 두려움에 빠졌을 뿐 곧 그이 응큼한 탐욕이 발동을 하였다.
벨릭스 총독을 예수의 도를 좇기 위해서 바울을 자주 부른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가진 돈에 탐욕이 생겨 부른 것이다.
왜 베릭스 총독이 동시에 돈을 받을까 바라게 되었는가?
총독은 바울이 변론하면서 -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바울을 자주 만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총독을 분명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돈에 대한 욕심이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 재물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지 않고 돈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자라지 못한다.

딤전 6:10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바라보는 사람, 돈을 사모하는 사람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난다.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믿음이 자랄 수도 없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하게 여기자.(히13:5)
돈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돈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자.
믿음을 방해하는 돈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므로 믿음이 날로 자라는 성도가 되자.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행동이다.

27절 -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 불러 복음을 듣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바울이 죄가 없다고 무죄를 선언해야 하지 않겠는가?
죄가 없는 바울을 당장 석방해야 하지 않겠는가?
베릭스 총독이 자신의 후임을 베스도가 올 때까지 2년 동안이나 바울을 구류시켜 놓은 이유가 무엇인가?

-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이것이 바로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다.
베릭스 총독은 유대인들의 폭동이 두려웠다.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는 것이 싫었다.
만약에 바울을 무죄 석방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민란이나 폭동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였다.
벨릭스 총독을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2년 동안 구류시켜 놓았던 것이다.
만약에 벨릭스 총독이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행동을 버렸다면 바울을 석방하고 당당히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믿었을 것이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행동은 믿음의 자라는 것을 방해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할 때 공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이 무엇인가?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사람의 말을 들으면 믿음이 자랄 수가 없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성도가 되자.
사람의 마음을 얻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성도가 되자.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나의 믿음 상태를 점검해 보자.
-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 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행동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것들은 나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 모두 나의 믿음에 방해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성도가 되자.
겨자씨처럼 믿음이 자라고 번성하여 많은 열매를 맺고, 믿음의 기적과 역사를 일으키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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