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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을 이루는 열정(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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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20세기의 대표적인 예언 신학자이며 유명한 설교가인 ‘헬무드 틸리케’는 그의 문제작 <허무주의 Nihilism>에서 ‘무’를 제시 했습니다.
그는 장 바울의 서정시 <하나님 없는 세계를 꿈꾸며>를 인용하면서, 오늘 날 이 역사의 삶, 모든 것의 심연에 자리 잡은 부정은 신이 존재 하지 않는 빈자리이며, 그러기에 그것은 ‘무’라 하였습니다. 누구는 하나님 없는 세계를 꿈꾸지만, 하나님 없는 세계는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텅 비었다는 겁니다.
사실 대부분의 두려움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그 원인이 해결되면 그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요. 그래서 사는 게 두렵습니다. 그 때는 돈이 생기면 그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직장이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두렵습니다. 역시 그 때도 직장이 생기면 그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높이 쌓은 지식과 지혜 뒤에 오는 불안, 그것은 이유 없는 불안이며, 그것을 허무라고 합니다.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죽을힘을 다해 부와 권력을 쟁취한 이후에 경험하는 불안, 그것 역시 ‘무’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틸리케는 이러한 무 때문에 인간은 심리적으로 모두 우울증 환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회는 ‘미친 세계’, ‘변태적인 운명’으로 바뀌고 있고, 그에 따라 인간도 미쳐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애쓰고 수고해서 뭔가 했으면 만족이 있어야 하고, 감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는 말입니다. 만족과 감격은커녕 오히려 이게 뭔가 싶은 허무감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해외유학이 쉬운 때 입니다. 그러나 저희를 가르치던 교수들이 해외에 가서 박사 학위를 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은 모두 여기에 두고 혼자 몸으로 미국에 건너가 몇 년 동안을 그 힘들게 힘들게 해서 학위를 따는 그 순간, 학위증을 받아들면 허무한 생각이 든답니다. “이거 때문에 그동안 그렇게 살아야 했었나?” 싶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전도서 2장에,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소와 양떼의 소유도 많게 하였고, 그래서 먼저 예루살렘 있던 누구보다도 더 많은 재산 더 놀라운 지혜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 10절에,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지 삼가지 않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다 자랑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수고하여 얻은 나의 몫인 셈이다.” 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것 다 얻었어요. 누리고 싶은 낙 역시 다 누려 보았어요. 하는 일마다 성공해서 다 자랑스러웠어요.
그런데 11절,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 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은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
지혜도 가졌고, 권력도 가졌고, 그래서 원하는 것 다 가졌고, 누리고 싶은 거 다 누려 보았지만 그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거였다는 겁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그렇게 전도자는 말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말 중에 하나는 “수고해 보았자다” 혹은 “애써 보았자다”라는 말 일 겁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여리고 라는 도시의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세관의 유대인 책임자 입니다. 그는 내노라고 할 만큼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정작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겁니다. 돈 많은 부자였고, 사회적 지위도 있지만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관장이라는 권세를 가지고 힘써 일했지만 그러나 일해 보았자 입니다. 아무도 그를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유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로마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동족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창녀나 죄인들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그는 부자였습니다. 가질 만큼 가졌고 뭐든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져보았자 입니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삭개오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 역시 이스라엘의 후손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이스라엘의 자손입니다.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피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들어가는 성전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으로 취급되었기에 성전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권력도 돈도 많이 가졌지만 그는 언제나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나.” 하는 허무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중년 부부의 위기. 그 가운데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인 남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직장에서 애씁니다. 결혼하고 집도 마련하고 아이도 키우고……. 그렇게 살아오는 삶이 결코 쉬운 일 아니었습니다. 마치 총알이 빗발 같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생명 걸고 싸우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40이 넘고, 50이 넘은 어느 날, 문득 돌아다보니 “이게 뭔가”싶은 겁니다. 머리는 하얗게 되어가고, 기억력도 자꾸 떨어지고, 시력도 떨어져서 돋보기를 쓰게 되고, 아내에게는 “무력한 남자”가 되고, 자식들에게는 “불쌍한 우리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죽어라 하고 뭔가 했는데 말입니다. 이때 느끼는 감정은 허무인 겁니다. “도대체 난 그동안 뭐 했나” 싶은 겁니다.
아내는 어떻습니까? 시집온 직후는 남편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또 입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돈 모아 집사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온 정열을 다 쏟아 아기를 양육합니다. 그야말로 떨어진 속옷도 버리지 않고 입고 또 입고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소위 메이커를 신기고 입혔습니다. 내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남편 위해 아이들 위해 먹을 거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예쁘고 곱던 얼굴은 주름이 생기고, 날씬하던 몸매는 군살이 붙고, 검고 윤기가 나던 머리는 하얗게 되고……. 불현듯 “난 뭐냐”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때 느끼는 감정이 “허무”라는 겁니다.

이런 허무에 빠지면 우울해 집니다. 모든 것이 다 짜증납니다. “가정을 위해 직장을 위해 그렇게 애쓰고 수고 했는데 결국은 수고해 보았자구나.” “남편위해, 아이들 위해 그렇게 애쓰고 수고 했는데 결국은 애써 보았자구나.”
삭개오는 세관장 입니다. 삭개오는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겁니다. 도무지 재미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면 말합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자기는 사람들과 친해 보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들 죄인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죄인의 것이라고 거부합니다. 성전에는 들어가지도 못 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단 한 푼도 성전에 드려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세관에 앉아 열심히 일하면 일 할수록, “이렇게 수고한 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마 십중팔구 그는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런 허무를 느끼면 그 허무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그 허무 속에 숨으려 합니다. 그 허무를 은폐하려고 합니다.
삭개오 같은 경우가 되면,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허무를 느끼면서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는 겁니다. 삭개오 같은 경우가 되면, 악착 같이 세금을 거둡니다. 더 악착 같이 돈을 법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위장된 허무주의’라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거품’이 이런 겁니다.
아니면 자신의 허무를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소위 종교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한낱 꿈과 같은 것이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결국 새벽안개 같은 거구나. 아침 해가 떠오르면 모두 사라지는 것을…….” 그래 가지고 더 허무함을 느끼고 더 심한 우울증에 빠집니다.

우리 보세요. 대통령들 취임 하자마다 외쳤던 것이 개혁입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정치가 거듭나야 한다.” “경제가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거듭나나 하고 보니까 아닙니다. 그것 역시 위장입니다. 과거의 허무라고 하는 돌무더기에 또 하나의 허무라는 돌을 쌓고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이라고 하는 돌무더기 위에 또 하나의 잘못이라는 돌을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이번에는” 하고 희망을 걸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더 한 실망을 경험하게 되잖아요.

최근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주보 뒷면에 감신대 기독교 윤리학 교수인 유경동교수의 글을 옮겨 실었는데, 그 분의 말씀처럼 웰빙은 정신적 평온과 안정을 추구하는 지적인 라이프스타일 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말 하는 웰빙은 의식주의 풍성함과 여유로움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빙(Being) 곧 존재라고 하는 내 삶의 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넉넉하게 가지고 풍요롭게 사느냐 하는 내가 가진 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위장입니다. 거짓 입니다. 거기엔 평안과 안정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과 다툼만 있을 뿐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죽음을 전재하는 겁니다. 죽어야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거듭나야 한다.” 그러면 이때까지 습관처럼 관행처럼 해오던 정치가 죽어야 거듭나는 겁니다.
그런데 죽어요? 안 죽습니다. 선거 때는 “국민을 위해”라고 말하지만 막상 정치인이 되면 달라집니다. 과거에 정치인 되려고 하던 사람들의 생각이나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정한 웰빙은 ‘웰’(Well)이 죽어야 합니다. 내 만족이라는 ‘웰’이 죽어야 사람다운 삶이라는 ‘빙’(Being)이 살아나는 겁니다. 내 만족은 채우려는 웰이 강하니까 결국 너를 희생시키는 겁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환경, 좋은 음식,” 이런 것들이 진정한 웰이 아니라, 함께 사랑을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삶이 진정한 웰인 것입니다.
삭개오의 아픔은, 세관장이라는 부자라는 그것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웃과의 만남 교제 사랑이 없었다는 겁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서의 가장 중심 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그것을 곧 죽음의 사건입니다.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해 달라”는 기도는 죽지 않으려는 인간의 심리 입니다. 그러나 죽어야 거듭나며, 죽는다는 희생이 있어야 모든 사람이 살아 날 수 있기에 결국 죽음 앞에 자신을 내 던지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이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 졌으니 너희는 십자가 질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 졌다. 그러니 너희도 십자가 져라.” 그러면 “내가 살아나듯이 너희도 살아난다.” 바로 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죽음과 그리스도안에서의 부활이 없으니까 우리 모든 삶은 다 허무한 것입니다.
성서는 이 허무를 하나님께 대행하는 악의 세력으로 규정합니다. “사탄, 악마, 지옥 등”은 이 허무를 대신 하는 용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셨고,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 악마는 “넌 안돼”, “니가 뭘 하겠다고.” “돈 있어? 학벌 있어? 권력 있어?”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보시기 좋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탄, 악마는 그 보기 좋은 세상에서 보기 추한 것, 악한 것들을 보게 만듭니다.

포도원 비유가 있습니다. 마감 직전 한 시간 전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품삯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탄, 악마는 일찍 와서 일한 사람이 불평하게 합니다. “난 뭐냐? 내가 일 더 했는데 왜 똑 같이 주느냐?” 아니면, “가도 늦었다. 이제 한 시간 일 할 건데, 그 한 시간 일해 얼마나 준다고” 그런 생각을 들게 해서 아예 시작도 못하게 만듭니다.
“안돼. 할 수 없어. 해 보았자야. 남들은 안 그러는데 왜 너만 별나게 그러냐?” 등등 다 사탄, 마귀의 소리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세상 모든 권세를 가져봐. 넌 할 수 있잖아. 그렇게 해서 세상을 구원하면 되지” 그것은 마귀의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요구, 주님의 요구는 “죽어라” “죽어야 산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키 작은 그는 도저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서”
그것은 곧 삭개오 자신을 죽이는 순간입니다. 그의 체면도 죽었습니다. 세리장, 부자, 어른 등등의 모든 체면을 죽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삭개오를 죄인 취급하던 사람들입니다. 저만치 삭개오가 오면 고개 돌리거나 땅에 침을 뱉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사람들을 뚫을 수가 없는 겁니다. 키는 작아 예수님의 얼굴도 보이지 않고. 아마도 사탄은 “그깟 예수 얼굴 보면 뭘 해? 예수님도 유대인인데 널 죄인 취급할 텐데” 그렇게 속삭였을 겁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 상황이면 여러분도 뽕나무 올라갈 것 같으지요?
아마 대부분은 “안 보고 말지. 그래 뽕나무까지 올라갈 것 뭐 있나?”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죽지 않으려니까요.
저녁예배 참석하려다가 “오늘은 몸이 피곤해서 쉬자.” 그래서 집에서 쉽니다. 이때 몸이 피곤하다고 할 때, 누구의 몸입니까? 내 몸입니다. 그 내 몸이 살아있으니까 예수님께 못나가는 겁니다.

이사야 40장 29-31절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피곤해서 집에서 쉰다니요? 피곤한 몸, 그래서 쉬자는 그 생각을 죽이고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 주시는 새 힘이어야 뭐든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바울의 지식이나, 바울의 건강이나, 바울의 부지런함, 바울의 능력에 있었던 것 아니라, 그에게 능력 주시는 주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곤하다고 하나님 앞에 안 나와요? 마치 배가 고파서 밥 먹을 힘이 없어 밥 안 먹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는 비결은 세상의 권세에 있는 것 아닙니다. 재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 다 가져 봐야 허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을 죽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멸시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래도 안 되자, 어른이 사회적 직위와 체면 다 치우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5절)
삭개오의 집은 죄인의 집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하는 판국에 그 집에 들어갈 리가 만무합니다. 7절에 보면 사람들이 “저가 죄인의 집에 들아 가도다.”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묵어야 하겠다.” 그리곤 예수님은 삭개오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내 놓았습니다.
“재산을 내 놓았다.” 그 말은, 그의 삶이 변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돈, 그의 재산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재산은 있었지만 허무했습니다.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재산은 재산으로서 가치를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재산이 남에게 나누어 줌으로 인해서 삭개오의 마음에 기쁨과 삶의 의미를 제공해 주게 된 것입니다.

장롱 속에 있는 금, 사실 있지만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꺼내서 사용하게 되니까 비로소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재산, 권세, 지혜,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대로 사용되어 질 때 그것은 비로소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고 다 헛되다고 말합니다. 지혜, 권세, 재물, 삶의 수고 등등 다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할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 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라고 말합니다(전 12:13).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면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자손 혈통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믿음의 자손이요, 구원 받은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면 복을 받습니다. 신명기 28장엔, “내 말을 듣고 순종하여 이 모든 복이 너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헛된 것 같은 세상.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재산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재산을 헛된 것이었습니다. 허무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 재산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삭개오나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지한 삶을 파괴하는 허무와 무 앞에 우울증에 걸려있는 현대인들을 봅니다.
그 허무와 무의 극복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내드리는 신앙적 결단에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그것을 믿으신다면 앞으로 달려가십시다. 그리고 올라가십시다. 체면, 감정, 수치, 부끄러움……. 그런 것 다 버리십시오.
누가 계급장 떼고 뭐 이야기 해보자고 했답니다. 그것은 대통령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하자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정말 계급장 다 떼고 서야 합니다. 지식, 직위, 자존심 등등 다 죽이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능력 주실 겁니다.
우린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열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뜻을 이루는 열정이 되십시오.
그것은 수고해 보았자 헛것이라는 허무가 아니라, 감격과,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결과를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

04.07.2004 주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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