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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를 기회로(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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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리차드 바크 박사는 “날개의 선물”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승리를 수영장 다이빙대에 비유했습니다.
첫째는 도전의 단계로, 다이빙대를 걸어 나가 끝에 서는 겁니다.
밑에 파란 물과 관중들이 있습니다. 물에 대한 두려움,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올라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결단의 단계 뛰어 내려야 합니다.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 물론 ‘하겠다.’는 결단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시작이 반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이빙대에 올라갈 때는 뛰어 내리려고 올라갔지 그냥 내려오려고 올라갔겠느냐? 당연히 뛰어 내리거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냥 내려온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뛰어 내려야 합니다. 모든 것 다 맡기고 뛰어 내려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정복의 단계입니다.
풍덩, 물에 던져지는 순간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순간이 모든 것을 정복하는 순간이 됩니다. 이 때는 공포도,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네 번째는 물속에서 고개를 들고 다시 물이로 나오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곧 승리요,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아! 해냈구나!” 하는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감격과 기쁨은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다이빙대를 오르게 하고 또한 뛰어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다이빙대는 올라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두려워합니다. “잘 될까?” “내가 할 수 있을까?”
핑계 댑니다. “하긴 해야겠는데 다른 일이 더 바빠서”
남들과 비교합니다. 멋지게 뛰어내리는 사람보고,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난 안될 거야” 그리고 그만둡니다. 엉망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보고, “나도 망신당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올라가기를 포기합니다.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오는 사람보고 “그러니 저럴 바에는 올라가지도 말자”

어떤 사람들 가까스로 올라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뛰어내리지 못합니다. 역시 두려움 때문입니다. “배치기 해서 배가 갈라져서 죽었다는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실패할거라는 생각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맡기려고 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힘듭니다. 그래서 못합니다. 성공이고 실패고 아예 시도조차 못합니다. 뛰어 들기만 하면 물은 그을 받아 줄 것이고, 물속에 들어간 그를 밀어서 밖으로 내 보내줄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셨다.” 우선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서 곳곳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는 예수께서 계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쩔쩔매는 상황 그런데 바로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배에는 예수께서 계셨습니다. 어떻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곳에는 언제나 예수 즉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후 성령의 임재 하셨습니다. 이때도 제자들이 가는 곳에서 역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바로 거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성령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미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복 받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 두 척의 배가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없지만 그들은 기운이 없었습니다. 5절의 내용을 보면 그들은 밤 세도록 그물질을 하였지만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전문적인 어부였습니다. 고기잡이는 그들의 생업입니다. 어쩌다 한번 고기잡이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는 그 방면에서 10년 이상 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베드로와 그 일행은 전문가 중에 전문가입니다. 평생 그 호수에서 자랐고, 고기잡이가 그들의 직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노력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래요. 우리의 삶이 그래요. 잘 되다가도 안 되는 경우 있습니다. 어떤 때는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하는데도 생각만큼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더 절망하게 됩니다. 수고하고 노력했는데도 안 될 때, 때로는 “아직 내 노력이 부족한가 보다” 때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한계구나” 그리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을 찾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탕자비유에서 둘째아들은 평소에는 아버지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주는 사람이 없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그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 굶어 죽는구나.’”(눅 15:17) 그리고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의 순간,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되는 순간, 세상을 만드시고 섭리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복된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생각 하십시오

오늘 본문. 베드로의 절망적 순간.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예수님의 말씀은 곧 살리는 말씀입니다. 은혜의 말씀입니다.
바로 뒤(12절-14절)에 나병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시니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갔습니다.

17절 이하의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이 너 죄가 용서함 받았다.” 24절에,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침대를 거두어 들고 너희 집으로 가거라.”하고 말씀하시자 중풍병자는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자기가 누었던 침대를 거두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앉은뱅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눈 먼 자 눈을 떴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머거리 귀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풍병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어디서 들을 것인가? 지금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들려주시나?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나병환에게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때 그 나병환자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병든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그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어느 시대, 어느 병든 자든 다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서 우리의 병이 나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약함 때문에 상처를 받았으며, 우리에게 평화 주시려고 징계를 받았고, 우리의 병이 낫도록 하시려고 매를 맞으셨습니다. 이미 그분은 하실 일 다 하시고, 말씀하실 것 다 하셨습니다.

만약 또 하셔야 할 일이 남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하셔야 할 말씀이 남았다면 성경 역시 부족한 것이 되거나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어디선가 드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지 않아, 설교를 듣지 않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병자 고치는 이야기를 읽거나 듣지 못했다면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일어나 걸어라”하는 음성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그 말씀대로 하라는 순종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셔서, 그게 무슨 뜻이 몰라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니 못 들은 거나 마찬가지고, 듣기는 들어도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으니 못 들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 집으로 가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았다면 못 들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아예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성경을 읽기는 잃어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설교하고, 그래서 성경공부도 하는데,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순종이 없습니다. 실천이 없습니다. 가까스로 다이빙대에 올라가기는 했는데 뛰어 내리지 못합니다. 예수 믿겠다고 교회 나오긴 했는데, 그 말씀에 자신을 내 맡기는 순종이 없습니다.
베드로. 예수님의 말씀이 있자 그대로 했습니다.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6절.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때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대로 하니” 말씀이 있고, “그대로 하니”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의 어머니께서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하십니다.
변화산의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겁니다.(막 9:2-8)
하나님은,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이 있음에도 그 말씀을 들은 우리들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하신들 듣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태복음 5, 6, 7장을 산상수훈이라 합니다. 그 말씀이 끝부분인 7장 21절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4-27절엔, 말씀대로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을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교하여. 말씀대로 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신구약 전체의 강조입니다.
구약은 “순종하면 복을 주고, 안하면 저주가 임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이 있다 해도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고,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지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지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들어라.” 그러면 들은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공부해라.” 그 말을 들었으면, 공부해야 하는 겁니다. “예배하라” 그 말을 들었으면 예배해야 하는 겁니다.

말씀에 순종하니,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아 허탈한 기분이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였을 겁니다.
우리들도 열심히 뭔가 하노라고 했는데 그 결과가 신통치 않거나, 오히려 아무 열매 없을 때 더 안타깝고, 더 답답하고, 더 화가 납니다. “그럴 수도 있지”하고 스스로 달래지만,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 생각하고, 그 순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화가 변하여 복이 되는 것입니다.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경험을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더니 곧 주님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그 엄청난 기적을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 속 물고기까지도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곧 주님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화를 복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분만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 말씀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으로 세상 창조했고, 그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곧 말씀 전체이신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이 계시는 곳에 하나님은 역사가 일어났고, 그분의 말씀이 있는 곳에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능력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질 지경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앉은뱅이, 중풍병자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 사는데 좋은 일만 있나요? 오히려 답답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더 많은 것 같지 않아요?
그러나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 하십시오.
그러면 화가 변하여 복이 되는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면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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