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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은? / 행 16:6~10 (욘 3: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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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강석공 목사 (광야교회)

- 2004년07월04일 설교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모든 것을 서로 통용하고 또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줬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성령이 볼 때에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복음으로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결코 주도권을 놓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방식대로 일을 추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먼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이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그 또한 예수의 영, 즉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그가 왜 아시아나 비두니아에 가려고 했습니까? 당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거기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막으셨습니다. 그는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는 길을 성령이 막으신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뜻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성령은 그를 유럽으로 보내려고 하셨습니다. 찬란한 교회 부흥의 씨앗을 그로 하여금 유럽에 뿌리도록... 때문에 밤에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자신들을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본 후 사도 바울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먼저, 그가 복음 전파 계획을 성령의 말씀을 듣고 세웠던 것처럼 우리도 어떤 계획을 세울 때 가장 먼저 성령의 말씀과 들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신실한 동역자들의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와 같은 동역자들과 함께 전도 계획을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동기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의 동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뜻을 이루시도록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는 다만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도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가는 길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그는 성령의 뜻을 알지 못하고 나아갔지만 결과적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을 돕게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가 하려던 계획도 함께 이룬 셈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앞에서 행하시는 성령을 무리하게 밀거나 끌어당기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결코 포기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니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로서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빌립보에서는 로마 황제 숭배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 같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 성문 밖에는 인가되지 않은 종교를 가지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는 포고문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빌립보에서는 로마인이 받아들일 수 없고 또 실천할 수 없는 풍속은 선전을 금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들 일행은 기도할 곳을 찾기 위해서 성문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기서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여인들은 어디서나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공동 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여인들을 노예나 미성년자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여인들에게 경전을 읽어 주는 것보다 차라리 그 경전을 태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여인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인들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은 결혼에 있어서도 거의 아무 권리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여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나라를 여인들도 똑같이 바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공공연히 대화를 나누심으로 제자들을 놀라게도 하셨습니다. 또 이혼을 금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여인들에게도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때문에 일단의 여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그 순간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무덤을 찾은 마리아는 누구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여인들에 대한 그와 같은 예수님의 태도는 제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몸에 밴 전통을 선뜻 버리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도 고생 끝에 도착한 빌립보에서 여인들밖에 만나지 못하게 되자 꽤나 실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여인들 가운데서 겨우 한 사람, 루디아만 그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을 보일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바로 그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참으로 억울하게 붙잡혀서 옥에 갇혔습니다. 참으로 실망스러운 상황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오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밤 중에 옥중에서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찬미하게 했습니다. 그 믿음이 거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게 했습니다. 바로 그들의 그 믿음의 결과로 간수와 그 온 가족이 믿음을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으로 그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 전도의 중심, 아니 유럽과 세계로 복음이 뻗어가는 베이스캠프가 되었습니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열매입니다. 마침내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얻은 의외의 열매였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은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성령은 때때로 우리를 실망시키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바로 그 실망스러운 상황은 결국에는 지극히 만족한 상황으로 전환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로 언제 실망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가장 실망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기대와 다른 현실에 대한 실망 때문에 이런 질문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런 모든 상황이 사실은 우리의 최선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옛날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었던 여성들의 상황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러 방면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남자 아이들에게는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반면에 여자 아이들에게는 얌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취업에 있어서도 남성의 경우는 능력을 우선적으로 보지만, 여성의 경우는 능력보다는 외모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하여간 그 어느 때보다 미용 성형 수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그 피해도 또한 잇따르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차별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나가 회개를 외친 니느웨는 다른 형태의 차별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별 극복이 성령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 차별 극복을 위해서 성령은 구체적으로 일하십니다. 사도 바울을 차별의 현장에 보내셨습니다. 그 현장에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또 니느웨가 얼마나 큰 성읍입니까?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겨우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쳤습니다. 지독하게도 무성의한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가장 높은 왕을 비롯하여 높고 낮은 사람 모두가 회개했습니다. 심지어 말을 하지 못하는 짐승들까지 금식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는 생명까지 포함한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 성령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 성령은 우리가 모든 담을 헐기를 바라십니다! 그 성령은 우리가 모든 골을 메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제 더 이상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있을 수 없고, 가진 자와 가진 것이 없는 자의 차별도 있을 수 없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차별도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잊혀진 차별의 현장, 땅 끝까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평강이 항상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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