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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기도생활 이대로 좋은가? (약 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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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봉 목사 (상도교회)

2004. 7. 4

□ 나의 기도생활 이대로 좋은가?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
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서 1장 26-27)

1. 기도는 신앙생활의 첫 걸음입니다.

아기가 탄생하여 첫 걸음마를 떼면서 <아빠>
<엄마>라고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첫 걸음은 기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례 문답할 때 기도를 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웃음으로 묵묵부답으로 대답하는 분이 있고,어떤 분은 '예'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기도합니까?' 라고 물으면,
'식사할 때 기도합니다' 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어려울 때 기도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위의 대답이 모두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식사할 때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그런 때만 기도하는 것인가?
그런 기도만 한다면 아직도 기도하는 법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병들면 기도가 없어지거나 약해집니다.
한국교회가 선교 역사상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기도에서 찾게 됩니다.
일제치하 36년의 세월과 6.25 전쟁으로 폐허된 강토에서 한국교회는 기도로 살았습니다.
기도는 영적 부흥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꺼지거나 기도가 사라지면 개인도, 교회도 시험에 들거나 세속에 물들어버리게 됩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의 위기는 성장둔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위기는 성장 둔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기도교육의 부족에서 기인된 것이 많다고 봅니다. 
기도는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가르치고 배우면서, 기도는 가르치고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반성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기도를 가르치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은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처럼 기도 많이 하는 교회도 없습니다. 한국 신자들처럼 기도 열심히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인의 말이 사회에서 먹혀들지가 않습니까?
여기에 '오늘의 우리 기도 이대로 좋은가' 라는 의문이 제기 됩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왜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가?


2. 오늘의 나의 기도생활 이대로 좋은가? 살펴야겠습니다.

분명히 오늘 한국교회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우선에 교회학교들이 줄어가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PC방, 노래방, 기타 오락기구들로 인하여 주일날 청소년들이 교회로 오지 않습니다.
모두 수영장, 스키장, 오락실로 나갑니다.
이것은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웰빙(well-being) 바람이 불어, '잘 먹고, 잘 놀자'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칩니다. 더구나 주 5일제를 실시하면서 더더욱 교회에 나아와 예배하는 사람들 보다는 여행과 자기성취를 위한 노력으로 기도생활도 멀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오늘의 현대 교회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모이면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은 기도는 하느라고 하는데,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의 올바른 지식이 없이 마구 하는데서 기인된 것이 많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기도생활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기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되 바르게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위기라고 봅니다.

기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세속주의를 이겨낼만한 힘이 없습니다.
기도 없이도 교회 직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일주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기도합니까?
기도 없이 출근하고, 기도 없이 잠자리에 들고,
기도 없이 전도하고, 기도 없이 봉사하고, 기도 없이 성경 배웁니다.
그 결과 나약한 신자들만 양산했습니다.
그러니 사회로부터 믿는 사람들이 따돌림 당하고, 무시 당합니다.

또 기도는 하느라 하는데, 기도의 능력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미신적인 기도를 많이 하는데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말은 기도를 오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자신의 인격의 고백이요, 삶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무조건 기도만 많이 하면 된다고 하여 인격적 기도가 못되고 주술적인 기도만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나는 절대로 우리 어머니처럼 저렇게 믿는 것은 안 할거야...'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들, 딸들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아들, 딸 세 넷 낳고 오랜 방황 끝에야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도가 인격적으로 하지 못하는 기도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런 기도는 신비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아니면, 기복주의적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런 기도는 결국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기도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런 기도에는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런 기도자는 아무리 많아도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모두가 개인주의적이요, 신비주의적이요, 기복주의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기도는 오랫동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오래 해도 인격적인 기도가 아닐 때는 외식하게 되는 기도요,
그런 기도자는 자신의 인격과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옛날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온종일 성전에서 기도로 하루 해를 다 보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거리 모퉁이에 서서 오랫동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 주님도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기도하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안다고 했습니다.

3. 그러면 인격적으로 하는 기도란 어떤 기도일까요?
모범적 기도의 모델을 주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올바른 기도생활을 배우게 됩니다.
그도 육신을 가진 몸이었기 때문에 우선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통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모두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기도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① 첫째, 인격적 기도는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호칭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② 둘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문제를 아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중언부언 하지말고 단순해야 합니다.
수식어는 다 빼버리고 진실 된 고백과 간구(懇求)이어야 합니다.
③ 셋째, 인격적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 없는 기도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말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 마다 주실 것이요, 찾는 이 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 마다 열릴 것이라고....이 말씀을 자기생각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해도 잘 못 구하면 주려고 해도 못 주는 경우가 있고, 찾아도 만나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두드려도 안 열릴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기도에는 상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나의 문제를 아뢰는 것이지만 그 기도가 비인격적인 주술적이거나, 미신적인 것이 되면 안됩니다.
미신 섬기는 사람들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식의 기도가 그런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의 대화라야 합니다.
대화란 상대방이 있습니다.
그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나의 말을 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십자가)을 넘어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나의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아내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눈물과 고통스러움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면서, 그 분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눈물 뒤에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십니다.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깨우쳐 주십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 문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생각이 바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대화의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자들이 될 때 어떤 세속의 바람에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 속에 역사는 바뀌어집니다.
그런 기도 속에, 생활 속에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의 문제들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라야 합니다.

영국의 존 낙스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 기도이었습니다.
결코 자기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문제들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구한 기도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은 이런 기도자들을 찾습니다.
이 나라를 구할 자들을 찾습니다.
가정을 구할 자들을 찾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가 지금 무엇입니까?
그 문제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를 본 받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 속에 놀라운 역사(役事)는 이루어 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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