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를 찾아 삼만 리 (엡 4:22-24)

  • 잡초 잡초
  • 215
  • 0

첨부 1


- 김학현 목사 (예은교회)

불황으로 먹고 살기조차 힘들던 19세기 이탈리아의 상황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어린 소년 마르코의 아버지는 실직을 하고 어머니는 부자 나라 아르헨티나로 가정부 일을 떠납니다. 배를 타고 무작정 엄마가 일한다는 집을 찾아 나서는데 가는 곳 마다 이사 갔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좌절하면 안 된다. 꼭 엄마를 찾고야 만다.”는 신념으로 결국 물어물어 엄마와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의 아미치스의 동화 “엄마 찾아 삼만 리”의 줄거리입니다. 엄마 찾아 나선 소년의 길고 험한 여정이 감동 있게 펼쳐집니다. 일본 만화로도 나와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자신을 찾아 길고, 험한 여정을 떠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그게 삶입니다. 자신을 똑 바로 찾은 자만이 삶의 목적을 알고 살 수 있습니다. 위대한 선현 철학자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더 어렵게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창조자가 만든 본래적 자아가 있습니다. 본래적 자아를 다른 말로 ‘이마고 데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래 이 형상을 상실했고 낙원도 상실했습니다. 삶이란 바로 이 본래적 형상을 찾아 나선 여정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나를 어떻게 찾을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벗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 때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우리는 지금 입지 말아야 할 옷을 입고 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 그것입니다. 육신이 요구하는 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악한 욕심과 속임수로 가득하여 결국은 낡고 썩게 만들 것들입니다. 이런 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옷입니다. 사탄은 항상 힘든 길이 아니라 편안한 길을 택하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인류를 꼬드길 때도 더 나아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선악을 완전히 분별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사탄은 주께서 금하신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꼬드깁니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어 속습니다.

주님은 마귀와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좁고 힘든 길입니다. 마르코가 쉽고 편안한 길만을 생각했다면 결코 엄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돌을 가지고 떡덩이를 만들어 풍요롭게 하라고 합니다. 영웅심리와 명예심을 자극하여 더 높아지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갑부가 되게 해줄 테니 눈 한 번 찔끔하고 물신(物神)과 어울려 보자고 합니다. 사탄은 육신을 자극하여 평안과 행복을 준다고 유혹합니다. 결코 마귀가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와가 그랬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넘어가 넝마들을 걸치고 살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게 편안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목적은 편안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을 닮는 것임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누더기를 과감히 벗어서 쓰레기통에 처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누더기 속으로 하얀 속살이 있습니다. 하얀 속살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육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몸이 죽어 썩어도 영은 영원합니다. 육을 위하여 입었던 누더기는 벗고 영을 위하여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을 위해 입었던 누더기를 벗어야만 합니다.

바꿔야 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정신과 생각과 태도를 바꾸라는 말입니다. 흔히들 ‘내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개성을 주셨습니다. 나름대로의 성격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질을 죽이라고 하시는 게 아니고 더 근본적인 것을 요구하십니다. 생각과 사상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가치관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인본주의도, 이성주의도, 민주주의도, 왕권주의도, 보수주의도, 진보주의도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성경중심주의입니다.

[잠23:7]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합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생각에 따라 행동합니다. 태도는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근데 바로 그 생각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사상을 바꾸는 데는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 게 의(義)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음 바꿔먹으니까 됐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방망이를 맞고 난 후에 바뀌었습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변화’라는 말은 나비가 되기 위하여 애벌레가 고치에서 나와 허물을 벗고 날개가 돋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나비를 보며 나비의 유충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변화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생각 조금 고쳐먹는 정도로 변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견해를 바꾸라는 말이 아니라 사상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공산주의자가 하나님 중심주의자로 전향하라는 말입니다. 자본주의자가 말씀중심주의자로 개종하라는 말입니다.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입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의 모본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육욕의 옷을 입고 살다보니 이젠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인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고후4: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으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성품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성품은 습관을 모아 놓은 저장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습관을 들이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 성장에 관이 이야기이며, 성화(聖化)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그러나 성화는 사람이 노력하면 됩니다. 성령께서도 도우시기 원하십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거룩하게 될 수 없다는 패배의식을 빨리 버리십시오.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꼭 됩니다.

소년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나서는 길에서 어려움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엄마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익숙하고 편안했던 삶의 옷을 벗고 바꾸고 다시 불편한 옷을 입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살려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뭉뚱그려 요약하라면 그것은 ‘순종’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자에게 침대를 들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신 주님의 의도는 순종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을 향하여 순종을 테스트 하십니다. 결정은 여러분 스스로 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자신을 찾는 일은 소년이 엄마를 찾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있습니다. 찾아야만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셨고,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풍성히 한다는 말은 완전한 건강, 편안한 삶, 완벽한 행복, 보이는 물질세계에서의 득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종으로 그런 것을 줌으로 세상에서 편안히 살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게 아닙니다. 영혼의 풍성함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삶의 목적도 영혼의 풍성함을 준비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꾸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해 성령 안에서 노력하는 것 자체를 행복으로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