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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먹을 것을 주어라 (막 6: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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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설교자 : 손상률 목사  (후암교회)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명이었더라 

예수님께서 신앙의 경륜이 높다고 하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율법사에게 여리고 노상에서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의식과 경건을 덕목으로 내세우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갔으나, 이름 없는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로 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눅 10:37). 예수님께서는 이 강도 만난 사람을 우리의 이웃이라고 하였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 사랑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교회는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혼이 구원 얻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됩니다. 동시에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과 체온을 느끼고 육신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도록 베푸는 일에도 주력하여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세다 광야에서 그에게 찾아 나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다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게 하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이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내려가 무엇을 사 먹게 해주라고 할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37절).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이웃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절실한 방법입니다. 이 일을 수행하는데는 특정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반드시 하여야 될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Ⅰ.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굶주리고 배고픈 무리들을 먹여주어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부를 받은 제자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불가능한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처음 무리에게 먹을 것을 사먹게 해야 된다고 제안한 사람이 제자들인데 막상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할 때는 난색을 표현하였습니다.

(1) 상식적인 논리로 부정했습니다.

35-36절에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다같이 그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허기져 있다는 사실과 먹게 하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인식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많은 군중을 한꺼번에 먹이기에는 때와 장소가 맞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해가 지고 곧 어둠이 깃들이는 때에 시간적으로 촉박하고 또 빈들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그 많은 식물을 구해올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음식을 구할 수 있는 마을과 촌락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 사 먹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매우 합리적이면서 저희들의 책임도 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 과학적인 논리로 부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만 예수님의 뜻을 읽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자기들의 주관적 판단으로 말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할 수 없다는 대답입니다.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타당한 논리적 근거가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거기 모인 사람들의 숫자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마 14:21).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면 적어도 이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6:7에는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은 매우 지성적인 사람답게 숫자와 계산이 밝았습니다.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수치에 따르는 산출 근거를 제시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이유 있는 거부를 하였습니다.

(3) 인본주의적인 논리로 부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도리는 신앙의 논리로 풀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강론하신 다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3:11-12). 이 말씀은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적인 논리에는 배치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신비로운 하나님 나라의 도리는 그것을 푸는 열쇠를 알게 되면 쉽게 열리는 비밀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병이어(五?二魚)의 비밀도 성령의 지혜를 통하기만 하면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적 논리 이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고 성령의 지혜를 힘입게 되면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사십 년 동안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살았습니다. 이것도 빌립의 계산 같은 인본주의적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이해되는 신비로운 도리입니다.


Ⅱ. 관망하는 사람입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으나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예수님과 몇몇 제자들, 그리고 이름 없는 한 소년뿐입니다. 절대 다수의 군중들은 큰 관심 없이 그냥 관망하는 자들입니다. 그야말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 예수님의 사역에 무관심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예수님께서 주도하시는 생명 사역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군중 심리에 따라 굉장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막상 필요한 자리에서는 침묵하거나 무관심하는 세력이 되고 맙니다. 마가복음 8:1-3에 보면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로 찾아 나온 무리들의 안위를 염려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래도록 먹지 못하고 굶주린 상태에서 기진 하거나 쓰러질까 걱정을 하시며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도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기에 동참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2:5에 보면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 중에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더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는 교회들은 언제나 우리 앞에 놓은 토양이 이렇게 무관심과 외면으로 척박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 자기 할 일에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여러 날 굶주린 무리들이 운집해 있고 또 예수님으로부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라는 명령이 떨어 졌는데도 거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군중들 속에는 유대종교 지도자들, 또는 제사장, 랍비 등 당대에 명망가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속에는 전통적인 율법을 준수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것을 자기의 덕목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도 만난 비유가운데 나오는 제사장과 레의 사람처럼 보고도 못 본 체 외면하고 자리를 뜨려고 애쓰는 자들일 것입니다. 입으로만 이웃 사랑을 외치거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행을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는 나서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자기 것이 손해 갈까 인색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나서기를 꺼려합니다. 마땅히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남을 섬겨야 되는 직책을 맡은 사람도 할 수만 있으면 그 책임을 회피하며 핑계할 구실을 찾곤 합니다.

(3) 소신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6:8-9에 보면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름 없는 한 소년이 안드레를 통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그대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아마 자기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아들에게 배고플 때 요기하라고 싸준 도시락일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 당시의 가난했던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벳세다 광야에 모인 군중들 속에 그 정도의 도시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 아이 밖에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웠어도 이 소년이 가져온 것 보다 더 나은 것, 더 많은 것을 가방 속에 넣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거나 아니면 내어놓는 것을 쑥스럽게 여겼을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많고 적고를 떠나서 자기의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결단이 중요합니다.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자기 입장만 생각하다가는 주님께서 주시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게 됩니다.


Ⅲ .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는 남녀노소나 빈부귀천과 같은 사람의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마음을 공유하고 거기에 부응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역에 주체세력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신 예수님의 의도에 따라 그 일을 수행한 사람은 수만 명 군중가운데 보리떡과 물고기를 제공한 어린 아이였습니다. 이름 없는 이 소년이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생명운동의 주체세력이 된 것입니다.

(1) 이름 없는 어린 아이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모르고 자기가 크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통해서 교훈 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2-3에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중에는 어린 아이의 겸손을 지적한 것이지만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성입니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순수한 모습 그대로가 어린이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것입니다. 이것, 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앞뒤를 따져보고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옳다 싶으면 곧 바로 실천하는 것이 어린 아이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보리떡과 물고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매우 보잘 것 없는 물질이며 음식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에게 가져오게 한 안드레 마저도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9)하고 기대할 수 없다는 눈치를 보였습니다. 보리떡은 매우 값이 싼 떡이며 맛도 없는 떡입니다. 짐승의 먹이로 주는 것이 알맞을 만 합니다. 물고기도 피라미 같은 작은 것을 소금으로 짜게 간한 것이어서 당시의 노동자들이나 먹는 것이고 귀족들이나 부자들은 음식으로 쳐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 없는 것이지만 벳세다 광야의 수많은 군중에게 배불리 먹게 하고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하였습니다.
어린 아이와 보리떡과 물고기, 이런 것이 예수님의 손에서 엄청난 이적의 실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자를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능가하게 하시며 세상에서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분입니다(고전 1:27-29).

(3)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아끼시는 존재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한 어린 아이의 헌신을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에게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무가치한 것이고 볼품 없는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있는 전부를 주님 앞에 드렸다는 것으로 귀하게 여기십니다(눅 21:4). 그 작은 것이 주님의 위대하신 생명운동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주님께서 백성들을 위하여 축사하실 때 축복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요 6:11).
예수님께서는 비록 죄인이고 이름 없는 존재이지만 자신을 주님에게 완전히 헌신하며 바쳐지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이를 받으시고 축복하십니다. 물론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이 큰복으로 충만하게 되고 맙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42-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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