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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이여! (전 11:9 - 전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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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강국 목사 (신시내티교회)

젊은이에게는 질문이 많습니다. 이른바 사춘기라고 불리워지는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결론에 다다를 때까지 줄곧 물음의 시기입니다. 이러한 젊은이의 질문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부터가 나 스스로에게, 나의 가정과 내가 속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우리 민족과 교회에게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매사에 질문이 많은 것처럼, 정신적으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의 시기 또한 매사에 질문이 많습니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한 특징입니다.

젊은이들은 불의하고 비겁한 것은 미워하는 대신, 정직하고 용기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들은 성실하고 진지한 것을 좋아하지만, 위선과 허세와 가식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순수하고 진실한 멋을 추구하지만, 껍데기만 아름다운 멋은 사양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실 속에서 방황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순수하고자 하지만, 세상 속에서 퇴락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정의를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살고자 하였지만 그 정의를 외면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살수도 있고, 이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진리를 찾으려고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라는 우상을 버리지 못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진리를 사모하여 추구하지만 아직도 그 마음과 의식 속엔 '나'라는 또 하나의 존재가 틀혀 박혀 있어 이렇게 진리를 사모하고 추구하는 나를 훼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실망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자 하지만, 이렇게 자기 자신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적인 자신의 눈을 통해서 볼 때, 모든 것이 흉하고 무섭고 어두워 보이기만 합니다. 이런 자기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실은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자신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자기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는 혼자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젊은이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할만한 그릇을 젊은이들에게서 찾았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불같고 기분에 움직이는 베드로를 예수님은 손수 부르셨습니다. 성격이 우뢰와 같아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고, 이 세상에서 권력을 쥐고 싶어했던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은 찾았습니다. 매사에 의심이 많던 도마와 부정축재자였던 세리 마태를 보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민족을 구하는 혁명가로 보았던 가룟 유다도 청했습니다. 이들은 어디를 보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젊은이들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고 계셨습니다.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변화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름은 부었지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것과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임한 성령을 통해 변화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믿었지만 이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뿔뿔이 흩어지고 만 연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을 하였지만 같이 있었다는 이 사실이 이들로 하여금 삶의 결단을 하게 하는 경험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죽어도 예수를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베드로도 어느 계집종의 물음에 3번씩이나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장 신뢰하여 금전출납을 맡겼던 그리고 이스라엘의 해방과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절실히 요구했던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를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십자가 밑에는 진리를 경험했고 따르고 사랑까지 고백했던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던 그 힘이 넘치던 젊은 제자들 대신에 연약한 여인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 지칠 줄 모르던 젊음은 어디 갔습니까?  그러나 성령께서 친히 이들 각 개인에게 임했을 때 바른 그리스도관과 확신을 경험하게 되어 그들의 모든 인격과 성품이 변화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예수를 전파하지 못하게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행 4:19-20).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모든 변화는 인간의 발견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노력으로 찾아 올라간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어진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당시 사람들의 사건이지 오늘날 우리의 사건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그와 함께 살아본 경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1. 객관적 접근

객관적인 접근 가능성으로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신앙을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믿고야 말겠다는 신념이 아닙니다. 또 믿을 만 하다거나 믿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나 감정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신앙의 근거는 모든 사건의 기록인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청년회에서는 다른 프로그램보다도 성경 연구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청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자기의 행실을 깨끗이 할 수 있다"는 시편 기자의 음성(시 119:9)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간직하고 있는 순수함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릇에 간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만이 우리의 순수함이 그대로 우리에게 보존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변화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거울로 하여 우리 자신을 비쳐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박혀있는 들보를 빼내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을 살피면서 그들의 고민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무슨 질문을 했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어떻게 들어주셨으며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였으며 그러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잘 살핌으로 이 사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는 감히 이 세상과 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해 달라고 간청도 해 보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 속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입니다. 모여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는 청년이고자 하며 거기서 우리의 모습을 찾을뿐더러 우리의 교회와 사회와 나아가서는 민족의 모습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2. 주관적 접근

주관적 접근 가능성으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해도 내 것이 되지 않을 때,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난 얼마 후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요 21:3)고 했을 때처럼 예수님의 모든 사건이 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죄를 깨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모든 행위가 나의 노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무릎을 꿇고 그 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내어놓는 헌신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간구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를 가지고도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천지를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함으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여러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를 미워하시고 공의를 사랑하시는 그 의로우신 하나님을 모른다면, 또 천국의 초청장을 보내고 회답이 오기를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이 세상과 또 부르신 인간들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오라고 부른 그 어부 베드로는 사도 베드로가 되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만세 전부터 예정하셨던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시키신 하나님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고후 5:17).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누구나 다 새로 태어난 젊은이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고후 4:16). 즉, 우리 크리스천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매일매일 완전해지는 새로워지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젊은이들의 모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향한 열정인들의 모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기의 모습을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곳은 불의를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곳은 오만한 것들은 저절로 물러갈 수 있는 겸손히 섬기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곳은 타락해 가는 이 세상의 모습을 보며 눈물로 밤을 지새는 곳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곳은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곳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곳에서 민족을 위한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은 진정 민족을 사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민족을 위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온 인류의 평화를 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곳은 역사적 삶에 동참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곳이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을 부르신 이유는 그리스도가 남기고 간 그 일을 마저 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수많은 인간을 대하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눈여겨보며,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빗발치는 질문의 화살을 받은 전도자는 조용히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특히 오늘은 젊은이에게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렴.
그러면 네게 뒤따르는 것은 근심으로 하여금 네 마음에 남게 하는 것이며,
악한 것이 네 몸 속에서 도사려 너를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구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너의 인생이 만족하는 것이 아니란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네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너의 인생은 너를 만드신 그분에게 달려 있단다.
왜냐하면 그분은 너의 모든 것 -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알고,
너의 지금의 마음의 생각을 알며,
너의 앞날의 모습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란다.
너는 너의 마음의 창문을 열어라.
어서 열어라.
그러면 그분의 빛이 네 안에 환하게 비출 것이란다.
그분은 오래 전부터 자물쇠로 굳게 잠겨진 네 문 앞에 서 계셨다.
비올 때나 눈올 때나 바람이 불고 햇빛이 내리 쬘 때도 네 앞에서 떠나지 않고 서 계셨단다.
자! 열어라.
그 분이 네 앞에 서 계시단다.
그분은 너를 기다리며 네가 그 분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고 계신단다.
그러면 너는 그분이 한 모든 일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너와 같은 모습도 끼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너와 같은 처지와 너와 같은 조건 속에 있는 사람에게 그분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벽과 같이 빨리 지나가는 때 곧 청년의 때에 너는 그 분을 발견해야 한단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분과 오래오래 사귀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 전도자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의 간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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