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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초청과 우리의 반응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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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인 목사 (목양교회)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천국의 진리를 말씀하실 적에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탕자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달란트 비유 등등 무려 50여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특히,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약 삼분지 일이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진리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도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잃은 양의 비유”는 이와 같습니다.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녔습니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목자는 하나님을, 그리고 길 잃고 헤매는 양은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잔치 비유”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까요? 예,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초청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이 비유에서, 큰 잔치를 배설한 주인은 하나님을, 그리고 큰 잔치는 구원의 잔치 또는 천국 잔치를 상징합니다. 정중하게 초청 받았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그리고 가난한 자들, 지체 부자유자들, 소경들은 그 당시 천대받던 세리들과 하층민들을, 길과 산울가에서 데려온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상징한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이 비유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초청과 우리의 반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잔치에 관해서 알아봅시다.

히브리인들은 가장 즐거운 상태를 말할 때 잔치에 비유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장차 도래할 황금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큰 잔치를 배설하실 것이며, 그 잔칫상에는 바다의 괴물인 ‘리워야단’으로 만든 요리도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매일같이 큰 잔치를 열고 거기 참석해서 즐길 수 있다면 그 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4장에는 단지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했다’고 하였으나, 마태복음 22장에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잔치 중에서도 가장 즐겁고 흥겨운 잔치는 혼인 잔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9장 9절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에, 교회를 신부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잔치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우선, 이 잔치는 수많은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있으리만치 규모가 큰 잔치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잔치에 초청받았습니다. 구원의 잔치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잔치는 너무나 크고 풍성해서 온 인류를 다 초청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차 임할 메시야의 왕국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들만 들어가고 이방인들은 제외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는 그 같은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3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들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방인으로 태어난 것이 구원 받지 못할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하셨습니다. 구원 받는 조건은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계시록 22장 17절에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의 잔치에 초청하신 사실을 통해서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딤전 2:4). 만일 하나님께서 부자들, 지혜로운 자들, 선한 자들만 구원하신다면 가난한 자들, 지혜롭지 못한 자들은, 죄인들은 애당초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구원의 잔치에 초청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라고 하면, “저는 지은 죄가 많아서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가끔 만납니다. 또는 “지금 나는 생활이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다음에 바른 생활을 할 때 가서 예수 믿을께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분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기를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6-7)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불신 가족이나 이웃을 대하면서 ‘저 사람은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할거야’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구원 받을지 받지 못할지 여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사람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농부가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떨기가 자라는 밭에도, 좋은 밭에도 차별 없이 씨를 뿌렸듯이, 완고한 사람에게도, 선량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이나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큰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의 반응에 관하여 알아봅시다.

이 비유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주인으로부터 정중하게 초대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메시야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는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9절 이하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특히, 유대교의 지도자들, 곧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는 이단의 괴수로 알고 배척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종교재판에 회부하였고,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주인이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어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잔치에 참석하라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같이 사양했습니다.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밭을 보러 가는 일은 오늘 말고 내일해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잔치에 참석해야 할 오늘 하필 밭을 보러 나갈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초대보다 세상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너무나 할 일이 많고 바빠서 한가하게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할 일이란 밭을 보러 가는 것과 같이 내일 해도 무방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 잔치는 이미 예약되어 있었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오늘이 잔치에 참석할 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소를 시험해 보는 것은 내일로 미루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일이 잔치에 불참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소를 시험해야겠다면서 초대에 응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악회에 가입해서 매주일 산행을 가느라 신앙생활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지난주에는 지리산, 이번 주에는 가야산, 다음 주에는 오대산 하면서 이미 일정이 빽빽하게 잡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삼분지 이가 산으로 되어 있으므로 일 년 열두 달 산행을 할지라도 얼마든지 갈 곳이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산행 다니느라 구원의 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승용차가 없었을 적에는 주일마다 교회에 참석했는데, 승용차가 생기고 나니까 구경 다니느라 신앙생활을 등한히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주 5일 근무가 본격화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레저를 즐기는데 관심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예배를 빼먹고 놀러가려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가정을 꾸민 것은 축하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예약되어 있었던 잔치에 불참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만일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잔치에 참석했다면 잔치집 주인에게 큰 환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정을 핑계로 구원의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편이 싫어해서, 또는 아내가 싫어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외에도 구원의 초청을 거절하는 이유를 들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모든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하찮게 여긴 것이 그 이유입니다.

잔치집 주인은 미리 초청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오기를 사양하였다는 종의 보고를 듣고는 노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잔치를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이미 많은 사람들을 대접할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은 정해진 대로 잔치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집주인이 종에게 이르기를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사회의 하층민들로서 앞서 정중하게 초청받은 사람들처럼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들로서는 그처럼 훌륭한 잔치에 초대받을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 잔치에 참석한 이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기들을 말합니다. 세리들은 로마 당국을 위해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으므로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방인들과 거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창기와 마찬가지로 유대 사회에서 부정한 자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들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기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을 내세울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자 환호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이라고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대화하시며 그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너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랍비라고 불렀는데 랍비들은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세리나 죄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사무 보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곧 세관에 사표를 내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마태는 자기 집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때에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하니,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두개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에게 구세주가 필요치 않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기들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했으므로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오늘날도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며, 자기의 부족함과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이번에는 세 번째로 초대받은 사람들에 관해서 알아봅시다. 종이 주인의 지시대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왔으나 그래도 빈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종이 이 사실을 주인에게 고하였더니 주인이 말하기를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잔치에 참석한 자들은 먼저 번 사람들보다 더 형편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구원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이방인 백부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기를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시자, 백부장이 대답하기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백부장에게 이르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이 사건은 천국 잔치에 이방인들도 정식으로 초청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차별 없이 천국의 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자만이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선민이라는 사실이 구원 받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없듯이, 이방인이라는 사실 역시 특권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에 대한 우리 각 자의 반응입니다. 유대인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영접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일은 내일로 미루어도 그 때문에 치명적인 결과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초대를 거절하면 영영 다시는 기회를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노인이라고 빨리 믿어야 하고, 젊은이라고 나중에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나이 순이지만, 세상을 떠나는 것은 반드시 나이대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고 나중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 예수님 믿고 천국 갈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초대를 받은 사람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의 잔치에 참석하신 성도님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잔칫집 종의 태도를 살펴봅시다.

주인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이 종은 복음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목회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구역장님들과 집사님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다 종으로서 천국 잔치를 알리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종이 할 일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 사람은 믿지 않는 가족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구원의 초대장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명하고 있습니다.

잔치가 시작될 때가 가까웠으므로 주인은 종에게 ‘빨리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전할 기회를 놓치지 말고 빨리 전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감동이 일어날 때 억누르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만일 의사가 환자의 위급함을 알고서도 시간을 지체해서 그 환자를 죽게 만들었다면 그 책임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먼저 믿은 우리에게는 불신 이웃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이란 해도 되고 하지 말아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책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고 했습니다.

혹 보면, 부끄러워서 전도하지 못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마는,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불치의 암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에게 치료의 비법을 말해 준다고 할 때 부끄러워할 사람이 있을까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해주면서 부끄러워 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 종의 태도를 본받아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함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한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앞으로 도래할 천국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며, 주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까지 신앙의 경주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겨서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가까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마귀는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기 위해 발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으로서 받은바 구원의 도리 위에 굳게 서서 서로 믿음을 격려하며 주님의 강림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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