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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복음 21장(6) 올인(all in) 신앙의 축복 (요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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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규 목사 (분당샛별교회)

< 영안이 열린다는 것의 의미 >

성경 열왕기하 6장에는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전쟁이 나옵니다. 그때 아람 왕이 밀실에서 작전을 짜도 엘리사가 그 소리를 듣고 미리 대처하니까 아람이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은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 신하가 말합니다. “스파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왕이 침실에서 한 말씀도 다 듣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러 도단성으로 갔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보니 도단성을 아람군대가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사환은 공포에 질려 “이제 어떻게 합니까?” 하니까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걱정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하자 사환의 눈이 열려 불 말과 불 병거가 보였고, 반대로 아람 군사들의 눈은 닫혔습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승리의 요건은 바로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만 보지 말고 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우리를 돕는 천사들을 보고, 주님의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안이 열렸다는 것은 신기한 것을 본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봐야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신비로 감춰진 부분도 있어야 진짜 사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가 신비입니다. 다 벗겨버려서 신비가 사라진 사랑은 환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영안이 열린 것’의 더욱 중요한 의미는 ‘보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일본이 올림픽을 개최할 때, 일본 하네다 공항 옆에 한 시골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올림픽으로 도로를 신설하면서 그 교회 자리가 도로로 편성되어 엄청난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이냐에 대한 제직회가 열렸습니다. 대부분 이번 기회에 교회를 크고 아름답게 짓자고 했습니다.

그 때 한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교회가 헐렸으니 교회를 새로 짓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돈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니 선교와 구제에 쓰고, 이곳은 시골이니까 교회는 우리 실정에 맞게 우리가 직접 헌금해서 아담하게 지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보상받은 돈은 다 선교단체에 기부하고, 교회는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아담하게 지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그런 모습이 바로 영안이 열린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 내 가정과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본문이 주는 4가지 교훈 >

오늘 본문에는 기적을 체험한 후 제자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을 알아보고 제자들 중에는 베드로가 주님께 가까기 가려고 물로 뛰어듭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4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랑하면 영안이 열립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 제자 중에 누가 제일 먼저 알아보았습니까?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이 제일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요한이 주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흥분된 소리로 “주시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왜 7명의 제자 중에서 요한이 제일 먼저 주를 알아보았습니까? 시력이 좋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우리의 영안이 열립니까? 주님을 사랑할 때 열립니다. 사랑하면 얼굴이 빛나게 되고, 언어도 따뜻해지고, 표정이 밝아지지만, 무엇보다 영적인 시력이 좋아집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에 떨어진 휴지가 잘 보이고, 꺼진 전등이 보이고, 후미진 곳의 거미줄이 잘 보입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면 배우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평범한 곳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보입니다. 썬다씽은 꽃을 보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어디서든지 우리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가시덤불에서도 하나님의 솜씨를 느끼고,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이 없으면서 “무엇을 본다!”고 하면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는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안이 있고 대단한 성경 지식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오늘날 한국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만 수백 개입니까?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나 침례교처럼 교리가 다르다면 이해가 가지만 교리가 다른 것도 아닙니다. 교리도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게 분열된 역사를 추적해 보면 ‘사랑이 없는 지식’이 문제였습니다. 흔히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하지만 사랑이 없이 아는 것은 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르는 것이고 영안이 닫힌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있어야 영안이 열리고 비로소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좋은 꿈은 이루어집니다

요한이 주님을 발견하고 “주시다!”라고 외쳤을 때 얼마나 흥분이 되었겠습니까? 그 한 마디 말에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이 다 들어 있습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그토록 사모하고 사모하던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뵙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멀리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달려왔는데,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언뜻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베를 짜던 천상황제의 딸 직녀가 목동 견우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둘은 결혼에 성공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에 빠진 직녀가 옷감을 짜지 않자 하늘나라에 옷감이 부족해졌고, 견우가 소와 양을 돌보지 않자 짐승들이 말라갔습니다.

화가 난 천상황제는 그들을 갈라놓고 일년에 한번, 칠월 칠석에만 만나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날이 왔지만 그들은 은하수 때문에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정을 딱하게 여긴 까마귀와 까치들이 몸을 이어 오작교(烏鵲橋)를 만들어주었고, 오작교에서 만난 두 부부가 흘린 감격의 눈물이 바로 칠월 칠석에 내리는 비라고 합니다.

우리가 비록 죄가 많지만 그런 우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만남을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오작교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항상 주님 안에서 좋은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좋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삶이 힘들수록 더욱 꿈을 붙들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꿈을 붙들고 사명의 자리를 지키면 꿈이 이루어지는 환상적인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꾼 꿈 이상 크지 않는다고 합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망할 인생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동행자를 얻기 어렵습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고통이 커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꿈이 있다면 어떤 고난도 작게 보이고, 충분히 견딜 만 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할 시간이 없습니다. 환경에 연연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면 “아! 꿈이 희미해졌구나!”하고 각성하고 다시 꿈을 새롭게 꾸어야 합니다. 꿈이 있어야 살맛도 생깁니다. 꿈이 크면 지칠 것 같지만 사실상 인생을 지키게 하는 것은 꿈이 없어서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운전할 때 계속 1단 기어로 가면 답답합니다. 조금 후에 2단으로 올라가야 하고, 또 조금 후에 3단으로 올라하고, 다시 4단으로 올라가야 답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왜 권태가 생깁니까? 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재력이 그냥 죽어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잠재력을 깨워야 합니다. 도전하고 성취할 때 만족이 있게 됩니다. 권태에 빠지는 것은 도전도 없고, 성취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꿈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고, 주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나가다 보면 때가 되어 반드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결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주님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요한이었는데, 주님을 향해 먼저 행동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결단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요한처럼 말만 하지 말고 베드로처럼 주님의 품으로 뛰어들고, 주님의 뜻을 향해 뛰어들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과감히 주님을 향해 뛰어드는 것입니다. 고민만 하고, 계산만 하고, 재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축복 받으려면 개척 정신,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은혜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가 체험합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쓰십니까? 어렵고 힘든 일에 과감히 뛰어드는 사람이 은혜를 체험합니다.

역사상 위인 중에 우유부단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을 바에야 다부지게 믿어야 합니다. 다부지게 일해야 하고, 다부지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생각은 적고 행동은 많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살아야 삶의 능력도 나옵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 성 정문 옆에 거대한 실타래가 묶여 있고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실타래를 풀면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실타래를 풀려고 애를 썼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알렉산더도 그 글을 보고 한 번 씩 웃더니 칼을 들어 단칼에 실타래를 끊어버렸습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좋은 삶의 모델을 선택했으면 그 모델에 올인(all in) 해야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했으면 주님에게 올인 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주님께 올인 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보고 싶어 뽕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고 말했습니다.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겠다.”

삭개오는 주님이 자기의 이름을 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 이름을 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나의 번뇌와 고통, 나의 갈증과 꿈과 기도제목도 안다!”는 말입니다. 삭개오는 감격했습니다. 곧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 올인(all in)을 했습니다. “예수님! 제 소유의 절반을 구제에 사용하겠습니다.”

삭개오는 키는 작았지만 영적인 키는 컸습니다. 배도 컸지만 배포는 더욱 컸습니다. 머리통도 컸지만 마음통은 더욱 컸습니다. 그가 주님께 올인 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는 천국 미소가 생겼고, 그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에서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착취의 손이 봉사와 섬김의 손으로 바뀌고, 그 뒤 많은 친구를 얻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화끈하게 결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에게 올인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그것을 붙잡고 죽는 순간까지 은행 잔고를 지나치게 남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내가 번 것은 내가 보람 있게 잘 쓰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고, 장학사업에도 보태고, 좋은 일에 쓰면 얼마나 삶이 풍성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한 가족이 바닷가로 해물을 사러 갔다가 우측으로 도는 길을 못 보고 핸들을 돌리지 못해 자동차가 바다로 빠졌습니다. 그때 아내와 어린 딸, 장모님은 죽고, 운전하던 남편만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 남편이 실어증에 걸려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한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방향을 돌려야 할 때 돌리지 못하고, 서야 할 때 서지 못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브레이크 타임이 필요합니다. 예배 시간은 영적인 브레이크 타임입니다. 이때 우리는 지금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나를 향한 기대와 사명대로 살고 있는지 깊이 살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새롭게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답고 좋은 것을 위해서는 결단이 빠를수록 좋습니다.

4.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의 “주님이다!” 하는 말을 듣고 바다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면 베드로의 순수성이 느껴집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가장 연장자였습니다. 언뜻 보면 연장자가 주책 부리는 것 같지만 주님은 그런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다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들어갈 수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높은 마음, 율법적인 태도, 권위적인 자세가 생기는 순간, 주님의 은혜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높은 자처럼 행동하지 말고 신앙 귀족인 양 행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국민일보 광고를 보면 “성역 30주년 기념 예배!”라는 문구를 봅니다. 목사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야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런 행사는 교회의 독소가 될 수 있습니다. 집사님 중에서도 30년 충성한 집사님들이 많습니다. 섬김은 좋은 것이지만 귀족주의는 철폐되어야 합니다.

부흥사마다 특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자동차 전문 부흥사’가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소나타가 뭐냐? 체어맨은 타야지. 고급차 타는 집사님 손들어 보세요. 마음이 편합니까?” 그러면서 좋은 차 빼드리게 하는 부흥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지순례 전문 부흥사’가 있습니다. “아니, 교회에서 담임목사 성지순례도 안 보내줘. 무식한 놈의 교회, 목사님 성지순례 보내드릴 사람 손들어 봐!”하고 성지 순례 보내드리게 합니다. 심령 부흥회가 아니라 귀족주의 부흥회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 건축 전문 부흥사’가 있습니다. 교회만 건축하고 시설을 잘 해놓으면 사람이 몰리니까 자연히 교회 건축에 관심이 많게 되고 ‘교회 건축 전문 부흥사’는 최고 인기 강사입니다. 그러면 눈을 팔아 교회를 건축하려고 했던 얘기를 하며 건축헌금을 작정시킵니다. 그래서 작정을 많이 시키면 1급 부흥사이고, 그런 분들은 오라는 곳이 많아서 1년 내내 집회 일정이 빽빽합니다. 심령 부흥회가 아니라 장사꾼 부흥회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요새 부흥회에는 사람이 잘 모이지 않고, 더욱 큰 문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향기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악취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모습을 생깁니까? 순수성이 사라지고 권위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교회 크기에서 찾고, 성도 숫자에서 찾고, 고급 자동차에서 찾고, 외적인 모습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진정한 권위는 화려한 외모와 높은 신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삶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서울의 모 교회 목사님이 김선일 씨의 죽음을 하찮은 장사꾼의 죽음이라고 비판했다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인터넷을 몇 년간 보면서 이렇게 댓글이 많이 달리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반나절 사이에 6천 개 가량의 댓글이 그 기사에 달렸습니다. 거의 대부분 무섭게 비판하는 글입니다. 그분은 만 명 정도 나오는 교회의 담임목사인데 너무 높은 곳에 계셔서인지 일반 사람들의 정서를 아우르지 못하고 지나친 말씀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 크기로 ‘1급 목사 여부’를 판별하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1급 목사’는 똑같은 충성을 하고 똑같은 헌신을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지 못하는 목사님들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이 세상에서 많이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적게 받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적게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많이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큰 교회 목사님만 우러러보지 말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선교사님들과 시골교사 목사님도 우러러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들도 누구 못지않게 존경받아야 할 분들이고, 우리는 그분들의 사역을 돕고 그분들의 생활을 후원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우리의 호주머니를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모양으로 성공을 재지 말고 “하나님께 얼마나 우리 자신을 잘 맡기는가?”로 우리의 성공을 재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순수하게 하나님께 맡긴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멋진 작품 인생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사람의 명성으로 사람은 움직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면 산은 여전히 산으로 남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도록 맡기면 산은 평지가 되고 우리에게 축복의 대로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과감하게 주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올인 하고 끝까지 순수한 신앙을 잃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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