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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진리를 말합니다.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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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정근두 모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우리가 믿고 예배하는 예수께서는 해야 할 바른 일을 언제나 아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를 살펴보면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과의 충돌을 피하시고, 어떤 때는 부딪히려고 작심하시며, 또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충돌하시기도 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도 충돌을 피하는 것이 평화라고 오해하기도합니다. 상처를 감추고 감정을 억누르고 진리를 억압하고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뭐든지 문제없다는 듯이 처신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같은 태도는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어성경 잠언 10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뒤에서 욕만 하면 둘 사이가 벌어질 것이나 앞에서 대놓고 서로의 잘잘못을 이야기하면 차라리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잠10:10, 현대어성경) 진리를 억누르면 문제를 일으키나 공개적으로 그 문제를 다루게 되면 해결책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이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정직이 최선의 정책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직이 정말 최선의 정책이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바로 말한다는 것이 오늘날 그다지 인기 있는 주제가 못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더 이상 자식 취급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배우자에게 털어 놓는다면 난리가 날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상사가 추진하는 일이 비윤리적이라고 지적을 하면 해고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망설이게 만듭니다.

정말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바른 말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장난꺼리가 아닙니다. 사랑은 때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때로는 강인해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 앞에 대면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에 대한 연속설교를 들었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존경합니다 등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의 차원을 살피려고 합니다. 사랑실천의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주제입니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는 아닙니다. 성숙한 성도들이 귀담아 듣고 실천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6절 뒷부분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장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보다 더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여러분이 아끼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바른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럴 필요가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보다 나은 관계를 위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해 주어야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을 필요가 있는 진리를 여러분은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가 배울 만한 두 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델과 바울의 모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후서 두 권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처신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분명했습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잔인하리만큼 정직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서신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네 가지 열쇠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바른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네 가지 방식을 배워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사랑 안에서 누군가를 대면해야 할 때 먼저 자신의 동기를 살피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동기가 무언가 하는 것입니다. 동기의 순수성을 먼저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진리를 가지고 진리로 바른 말을 하려고 합니까? 한번 말 해 줄려고 마음먹고 하는 것입니까? 하는 짓이 보기 싫어서, 아니면 화가 나서, 혹은 질투심 때문에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약점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수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엄마들은 대체로 자기 안에 있는 그 약점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나타나면 못 참습니다. 마찬가지로 게으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게으름을 잘 파악을 합니다. 자만심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자만심을 순식간에 포착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3-6)

귀담아 들을 만한 충고입니다. 동일한 잘못을 우리 자신은 범하지 않는지를 살피라고 지적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진리에 대면시키기 전에 우리에게 동일한 잘못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완벽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친구의 삶에 있는 잘못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별하지도 말고 문제를 보고도 바로 잡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친구의 잘못을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용인하라는 의미는 더 더욱 아닙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뜻은 자기도 같은 잘못을 하면서 친구의 잘못을 바로 잡겠다고 설치는 위선을 행치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신의 동기를 점검해야만 합니다.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움을 주기 위해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고 있는 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덕이 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고후12:19,표준새번역)

사랑 안에서 그들을 돕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바른 지적을 하는 것이지 자신을 위한 책망이 아님을 증거 합니다. “친구의 책망은 아파도 진심에서 나오지만, 원수의 입맞춤은 거짓에서 나온다.”(잠27:6, 표준새번역)는 말씀처럼 행동합니다.

친구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줍니까? 어쩌면 도우려는 마음 때문에 주어진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온 세상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가까운 친구들에게서 여러분이 서로 보살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바로 잡아야 하는, 바른말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 때문에 하지 않으면 충고가 의미가 없습니다. 진정한 우정은 이런 대면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좋은 소리만 하면 깊은 우정을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얻을 것인지 잃을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접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서로 피상적인 관계를 맺고 살 것인지 아니면 의미 있고 친밀한 관계를 가질 것인지를 택해야 합니다. 피상적인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야할 산이 있습니다.

진리의 깊은 터널을 통과해야만, 혼란의 소용돌이를 지나가야만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야 밝은 관계, 친밀한 관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를 계획하십시오.

말할 것을 미리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신중하게 하고, 하는 말에 설득력이 있다.”(잠16:23, 표준새번역) 깊이 생각하고 진지하게 말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설득력 있게 말하고 싶다면 말하기 전에 미리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말하기 힘든 진리를 친구들에게 말하기 위해 바울은 고심합니다. “나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 주려고 한 것입니다.”(고후2:4, 표준새번역)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자 할 때에 대상이 남편이든 아내든, 자녀든 부모든, 친구든 친척이든 미리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 언제 말을 할 것인가?
* 무엇을 말할 것인가?
*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 그 말을 할 것인지를 계획하십시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은, 들을 줄 아는 사람의 귀에는, 금귀고리요, 순금 목걸이다.”(잠25:12, 표준새번역) 적당한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는 특히 시간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하루 중에서 가장 잘 다투는 시간은 저녁 먹기 전이라는 연구가 있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배고픈 시간에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지 마십시오. 중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피해야 할 시간은 저녁 식사 바로 전입니다. 시간을 잘 선택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고민하십시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25:11). 경우에 합당한 말, 어떻게 준비할까요? 어떻게 처음 말을 시작할 것인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어떤 예를 들것인지 여러분이 미리 생각을 하시란 말씀입니다.

비난이나 빈정거리는 말은 관계 개선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와 말하는지에 따라서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을 어떻게 하는지도 중요합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잠12:18, 표준새번역) 생각 없이 말하면 상처를 주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적절한 말은 상처를 치유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1) 재치 있게 말해야 합니다. 잠언 16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을 명철하다 한다. 부드러운 말은 더 많은 사람을 설득시킨다.”(잠16:21,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말의 설득력을 갖고 싶습니까? 그러면 공격적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공격적으로 말하면 방어적인 응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무례하게, 거만하게, 화가 나게, 성가시게, 실망스럽게 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호감을 주는 말을 하십시오. 호감을 주는 말은 설득력을 불러일으킵니다. 호감을 주는 말을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 더 설득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재치 있게 말하십시오. 긍정적이고 유쾌하고 재치 있게 말하십시오.

2) 사랑스럽게 말하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냉혹한 진리를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때 사랑하는 자녀에게 말 하듯이 접근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방망이를 가지고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말은 맞는데 그 말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게 되면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전달되어야만 합니다.

익명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차별하게 오는 전화나 문자, 편지나 서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점에서 사 먹는 음식은 집에서 먹는 음식과 비교하면 무언가 빠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랑 양념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숨어서 자기를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익명으로는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가시게 만들고 짜증나게 할 뿐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십시오.

3). 부드럽게 받아들이도록 말하십시오. 부드러운 대답은 화를 진정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6장 1절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져 있거든 성령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도와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혹시 여러분 자신도 악한 길에 빠져 들지 않을까 늘 주의하십시오.”(갈6:1)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만 . . .” “근거는 없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 . .” 상대방으로 하여금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완전히 코너로 몰아 부치지 말고 조금 여유를 갖고 반응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지혜일지 모릅니다.

부드럽고 겸손하게 접근하면 온유한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재치 있게 적절한 시간에 온유한 태도로 전하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진리만 아니라 재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른 시간도 중요합니다. 부드럽게 온유하게 태도를 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3.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시오.

내가 하는 바른 말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는 두 다리로 세워집니다. 진리를 대면시키는 것과 사랑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진리를 대면시켜주는 동시에 사랑을 보장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듣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 자유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한점, 약점을 누군가가 말해주면 듣는 순간 자유하게 하는 기분이 아니라 죽을 맛입니다. 그렇죠? “너는 뭘 잘하는데 나한테 그렇게 말하느냐?” 당장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처음 진리 앞에 서면 우리는 화가 납니다. 역겨울 수도 있고 거부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비참한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대면하면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암을 잘라내기 위한 외과수술을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치유 받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으로 그 진리를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긍정과 확인의 말로써 다가가야 합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12:25)

선한 말이란 무엇입니까? 깊이 사랑하고 돌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도와주려고 하는 책임을 지고서 접근하는 태도여야만 합니다.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면서 말해야만 합니다. 격려의 말은 기적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말을 시작할 때 그리고 끝을 맺을 때 꼭 긍정적인 분위기를 잃지 마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전 후서를 기록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감사로서 시작과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시작하는 말도 끝내는 말도 긍정적이고 격려의 내용을 담아야 합니다. 모처럼 시간을 잡고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면서 좋은 말로 시작을 합니다. 첫 센텐스는 괜찮게 시작했는데 두 번째 센텐스에서 우리는 망칠 때가 많습니다. 좋은 말을 해놓고 반전시키지 마십시오. “당신은 잘했습니다마는” “우리는 오랜 친구였지만 . . .” “우리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지만 . . .” 이러면서 사람 속을 긁어놓을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긍정적인 분위기를 살려 가십시오. “당신은 그동안 잘했고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결혼생활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은 수준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귀하게 사용해 오셨고 앞으로도 더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그 다음 말을 더 받아 들일만한 여유가 생기는데 그냥 한마디 좋은 말로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그다음 독침을 쏘게 되면 사람이 받아들이기가 힘들게 되어집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7:4)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서 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나는 온갖 어려움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칩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현실 가운데서 좋은 점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은 하나님께서 더 좋게 변화 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현실적으로 보는 동시에 낙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계산으로서는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서 새로운 내일을 꿈 꿀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문제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서로의 말을 듣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서는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서 바른 말을 해 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먼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시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4. 거부당할 부담을 안고 시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 후서에서 취한 방법입니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을 슬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내가 곧 후회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바울은 일 중심적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바른 말을 주저하지 않고 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쓸 때도 아주 할말을 분명하게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편지를 읽는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이 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진리는 일차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그 진리는 우리에게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거기에 담겨있는 진리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 그래서 우리의 삶을 바꾸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저래서는 안되는데’ 하고 우리가 보면서도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침묵한다고 하면 우리는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제 설교는 신앙 가운데, 성숙한 마음 가운데 담아야 할 설교입니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부담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짓누르고 진리를 말하지 않고 문제를 피해 가려고 합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결과에 직면하기 두려워서 문제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말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우리의 동기를 의심받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벌컥 화를 내고 관계를 끊으려고 달려들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역공을 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거부당할 부담을 안고 대면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바른 말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런 일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싶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침묵하는 것은 사실은 문제를 더 곪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는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마는 문제는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입니다. “뭐라고 말해 주어야 할지 모릅니다.”라고 말하지만 여러분이 해야될 것은 정답을 들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느낌에 대해서 여러분이 해야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 중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일수도 있습니다. 온 세상이 멸망되어도 나는 모르겠다는 입장과 같습니다. 사랑은 때때로 진리 앞에 상대방을 세워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잘못을 보고 못 본 척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성숙한 성도를 위한 행동처방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형제자매를 바로 세우길 원하신다는 확신이 들 때만 행동하십시오.  잠언서는 말합니다. “바른 말을 해주는 것이, 참된 우정이다.”(잠24:26, 표준새번역)

진정한 친구는 바른 말을 해줍니다.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꼭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말을 합니다. 때로 사랑은 강인해야 합니다. 사랑은 터프해야 된다고 그렇게 말하죠? 사랑하기에 상처를 주는 것도 불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생명을 내어놓기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릴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놓았습니다.

잠언서는 말합니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잠28:23) 나중에 더욱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꾸짖게 되면 처음부터 꾸짖는 사람을 사랑할 사람은 별반 없습니다. 그 정도 될 것 같으면 꾸짖을만한 흠을 여러분이 찾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 정도 원숙하면. 바른말 하면 듣는 사람이 기분 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두고 소화를 시킨 다음에는 바른말을 해 줄 수 있던 친구의 용기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가 아니라, 마침내 사랑을 받는 행동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보다는 바르게 꾸짖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고맙다는 말을 듣습니다.

마지막 좋은 결과를 위해 우리는 때로 위험을 감수합니다. 서로 어렵게 되는 부담을 안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기에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에 진리를 말하는 부담을 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바른말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의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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