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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비하시는 은혜 (창 46: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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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최근 병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동시에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요. 병 낫는 거, 그래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거, 그것도 욕심인가 싶은 겁니다.
김익배씨의 <오후>라는 시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신령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무슨 일인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이야긴대?
“저는 대재벌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큰 권세를 잡겠다는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루 세끼 제 분수대로만 살려고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것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네가 분수대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데?”
“먹을 것은 남보다 더 잘 먹지도 더 못 먹지는 않고 그 날 만큼이나 먹을 정도면 되고, 집은 남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맞은 집에, 옷은 남보다 잘 입지도 못 입지도 않고 그저 남 만큼이나 입고, 그리고 이 세상의 온갖 질병이나 걸리지 않게 해 주시고, 이 세상의 온갖 사고나 없게 해 주시고, 그리고 끔찍한 불명예나 닥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니 나처럼 이렇게 조그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데서야 말이 됩니까? 말이 됩니까?”
“예잇기놈 그런 것이 있으면 내가 하겠다.”
사실 뭐 우리 모두 그 정도야 바라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그건 사람 사는데 기본이 아닙니까?
“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나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잠언 30:7-9, 아굴의 기도)

보세요. 얼마나 순진한 간구입니까?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없이 그리고 내 집에서 사고 없이 건강하게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바람 아닌가요?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필요한 양식을 먹으며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어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신앙생활도 잘 할 것 같지요? 교회 생활도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할 것 같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평안함에 머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15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주셨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단 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이 엘림입니다. 엘림. 거기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습니다. 시원한 물과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모처럼 사람 사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거친 광야에서 그 정도면 마치 낙원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거기에 머물게 아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신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한 자리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고향은 친척이 있고, 아버지가 있는 곳이기에 평안한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고난의 여행을 하였습니다.

야곱. 그는 아버지 이삭이 60세에 난 아들입니다. 늘 장막에서 지냈습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의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요셉. 그는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에 야곱이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였고, 화려한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야곱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때부터 요셉의 고난은 계속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흉년이 들어 그랬지 사실 지낼 만 했습니다. 돈 있으니 양식 사오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9장에 예수님과 함께 변화 산에 오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산에서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막 셋을 짓고 그 곳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광채가 나는 흰 옷으로 변형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말씀하시는 엘리야와 모세 바로 그곳이 천국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셨고,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향해 가셨습니다.
왜 그리했을까? 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가라”고 하셨을까? 왜 그들을 그 평안의 자리에서 쉼을 얻게 하지 않으셨을까?

오늘 읽은 본문,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은 “반드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 땅은 너와 너희 후손의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돌아왔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머문 애굽의 고센땅. 그곳은 그들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내려 보내셨을까? 그냥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머무르면 안 될까? 왜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시는 걸까? 왜?

그 까닭은 진정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그는 비로소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 아비의 집 동네에서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 땅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하나님만이 세상을 만드시고 섭리 하시는 하나님, 애굽의 모든 신보다 뛰어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좁은 땅, 좁은 지역에서만 계시는 줄 알았던 하나님께서 큰 땅, 큰 나라인 애굽에도 계셔서 역사하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났지만 그는 가는 곳곳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가는 곳곳마다 먼저 가 계셨고, 아브라함을 위해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경험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에도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곳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야곱은 어디서나 함께 하시며 예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 하였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집을 떠나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계시며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그 고난의 땅에서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도 계셨고 요셉을 위하여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부인 하는 것입니다. 즉 “이게 내 거구나”하는 것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야곱은 “이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 땅, 이 땅에서 내가 죽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라. 거기서 죽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 그 애굽에서 야곱은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야곱이 미리 유다를 보내어 자기를 고센 땅으로 인도하게 하고”(창 45:10). 요셉이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그래서 머물게 된 고센 땅. 그곳은 목축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또 애굽인들은 목축을 가증히 여겼기 때문에 야곱과 그 식솔들이 고센에 머물면 애굽인들과 섞일 염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인과 동화되지 않고 고유한 민족성과 종교적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 고센 땅은 국경지대이기 때문에 후대에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옮겨지기에 매우 편리한 곳입니다. 어떻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구별된 삶을 살도록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야곱은 늙은 나이에 원치 않은 이동을 하였지만 그 너머에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가깝게는 고센 땅이고, 멀게는 출애굽의 대역사입니다.
“비아돌로로사”
라틴 말로서 “슬픔의 길”, “비탄의 길”이란 뜻입니다. 빌라도의 법정 자리를 제 1지점으로 시작하여 골고다언덕 정상 까지 제14지점으로 나누는 그 길. 예수께서 십자가 지고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 길은 육체적인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았고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 길은 정신적인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은혜, 그래서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찬양했던 사람들. 그런데 지금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고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한 듯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결국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아돌로로사 그 길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길을 보셨습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여러분에게 무엇이 보입니까? 고난과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생명의 길 부활의 길이 보입니까? 보셔야 합니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비 하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이미 결정도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미래적으로 운명되어진 존재도 아닙니다. 마치 야곱과 같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같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바라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달려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3)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은 그냥 바라보는 것 아닙니다.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인간의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에,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고 예수님은 성경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책을 덮으신 뒤 회당에 모인 그들을 주목하여 보시고,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잃은 것을 되찾는 고침의 사역이었습니다. 그 분은 눈먼 자에게 볼 수 있는 것을 찾아 주셨고, 포로 된 자, 눌린 자에게 자유를 찾아 주셨습니다. 병 고침을 단순한 치료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회복시키려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보세요!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를 더 지어서 쌓아 놓은 만큼 수확하였지만 그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자 청년은, 부자요 관원이요 경건한 사람이란 칭찬은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면에, 소경 바디메오는 겉옷을 벗어 던졌지만 예수를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 그는 땅을 잃었지만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이 땅이 곧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 아닙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땅을 잃었지만 어디에서 살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찾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잃어버려도 될 것을 끌어안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속이 터집니다. 찾아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도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어디냐가 중요한 것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주님의 사랑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에,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 13장에,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아가고 칼에 죽을 자는 칼로 죽였습니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죽든지 간에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러자 성령께서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안에서 영원한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 곳이 어디냐가 아닙니다. 그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느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그들은 늘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있었습니다.
신명기 32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서 한 노래 가운데, 하나님은 택하신 야곱을 지키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10절). 주님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만 들려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환경은 열악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고 만나 감싸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는 겁니다.

맹모삼천.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거지요. 물론 환경이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절대적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맹자가 서당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면, 공동묘지 근체에 살던 아이는 결국 시체나 만지고 살다 죽었다는 말인가요?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이냐가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부라우닝 웨이 목사님은 “우리의 최악의 환경이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기회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의 삶이지만 바로 거기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가장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데이브 드레배키는 샌디에고 파드래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야구팀의 투수로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그의 던지는 팔에 이상한 통증이 왔습니다. 의학검사 결과 암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수술한 후 몇 달간의 재활기간을 가졌습니다. 그 후 마이어리크에서 잠시 투수 생활하던 데이브는 다시 큰 박수갈채를 받으며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몬트리얼에서 공을 던지다가 팔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암이 다 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팔과 어깨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야구선수 그것도 투수에게 팔을 잘라내는 것은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데이브는 실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자신이 불쌍하다는 그런 느낌으로 인한 갈등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가 아니라, ‘나를 위한 당신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 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이 일을 많은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로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늘 그 곳에서 예비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은혜와 당신의 능력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가 당신의 백성에게 주십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조건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온통 조건부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면”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복이 있고, 영원한 구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이냐 고센이냐가 중요한 것 아닙니다. 열악한 환경이냐 아니면 먹을 것 입을 것 사는 것 걱정 없는 평안한 환경이냐 이런 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아버지 다윗이 한 것과 같이 네가 나의 길을 걸으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네가 오래 살도록 해주겠다.”
이 말씀은 솔로몬이 재산과 명예와 오래 사는 것 보다는 지혜로운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겨 그것을 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20세에 왕이 된 솔로몬은 40년을 치리하고 60세에 죽었습니다(11:42). 그렇다면 오래 살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래요. “네가 나의 길을 걸으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이 있었던 것을 기억 하십시오. 솔로몬은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무산된 것은,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처럼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상을 섬겼고 그의 외국인 아내들이 하자는 대로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며 제사를 지냈습니다(왕상11:4-8). 결국 그의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 상관없어요.
가나안 땅이면 어떻고 애굽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 예비하신 하나님의 복, 예비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32에,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도 있어야 할 줄 아시고 다 예비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바울은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 23-24절에서는 호세아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니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시라.”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지만, 이미 오래전에 이미 오래전에 예비하신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몇 년 전에 죽었습니다. 상속자가 없어 그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경매에 붙이게 하였습니다. 조건은 자기 아들의 초상화를 제일 먼저 경매로 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초상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부자가 가졌던 재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초상화는 가격은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값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그 주인과 그 아들을 사랑했던 그 집 하인이 아주 헐값이 된 그 초상화를 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부자의 유언은 “누구든지 이 초상화를 사는 사람에게 전 재산을 상속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곳에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와 구원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보호와 인도하심과 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지금의 열악한 환경, 마음에 안 드는 삶의 조건들 그 너머에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 곳을 향하여 “가라”하신 주님의 말씀 따라 달려가십시오.
언제나 함께 하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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