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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롬 8: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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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맥추 감사절에 대한 명칭이 여러 가지 나옵니다. 우선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즉 1년 농사 중에서 먼저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절기란 뜻입니다. 또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유월절이 끝나는 날로부터 7주 후에 지키는 절기란 뜻입니다. 그리고 맥추 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 거두는 곡물이 주로 보리이기에 맥추 감사절입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아니고, 또 농사짓는 농부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추 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한 해의 절반을 돌이켜 보면서 그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한 해의 남은 절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세 가지 감사를 드립니다. 첫째는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둘째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그리고 셋째는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감사합니다.

첫째, 우리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봉독한 말씀 26절에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십니다.

과거 내가 연약할 때, 내가 부족할 때, 내가 쓰러지고 넘어질 때, 성령께서 나를 대신해서 간구해 주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있다는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요, 이 감사가 우리의 감사입니다.

성경은 우리 몸을 나약한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질그릇은 얼마나 깨어지기 쉽습니까? 우리 몸은 얼마나 상하기 쉽습니까? 그리고 언젠가 한번은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질그릇 같은 우리 인생이 아닙니까?

게다가 우리는 너무 지나쳐도 안 되고 너무 못 미쳐도 안 되는 약한 존재입니다. 예를 들면 돈이 너무 많아도 부자유하고, 돈이 너무 없어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을 지나치게 너무 많이 받아도 성숙하지 못하고, 흡족하게 받지 못해도 문제가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분수에 맞게 받아야지,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잘못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도 마음 놓고 받을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영과 육은 모두 약합니다.

이와 같은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천사로 바꾸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 돕는 자, 즉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되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되 특별히 기도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되 특별히 기도를 도와주실까요?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해지면, 기도하는 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 열이 조금 나도 기도를 못하고 드러누워 버립니다. 기분이 조금 상한 일이 있어도 마음이 무거워서 기도가 잘 안됩니다. 신앙생활의 긴장이 풀려서 세상 재미에 맛이 들면 우리 영혼이 캄캄해지고, 기도가 막힙니다. 성령은 이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특별히 우리 기도를 도우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 힘쓰지 못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 와서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만 도우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한 생명 줄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온갖 질병이 감기라는 문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적신호는 기도의 감기에 걸리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기도 생활에 고장이 나면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특별히 우리 기도생활을 돕고 계십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 환자가 여러분 계셨습니다. 그 중 어떤 분을 위해서는 그 구역식구들이 매일 시간을 정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환자 교우보고 “우리가 매일 합심해서 기도드리니, 이 사실을 기억하고 당신도 기도하기 바랍니다”하고 전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겠습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생각하니, 내 기도가 더 간절해집디다. 나 홀로 외롭게 투병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니, 저절로 힘이 납니다” 하십니다. 그리고는 얼마 가지 않아 그 분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러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와 기도의 힘이 저절로 솟아났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기도로 도와도 그렇거든, 하물며 성령께서 우리 곁에 계셔서 친히 기도해 주십니다. 내 부족을 아시는 성령께서, 내 필요를 아시고, 내 기도의 제목을 아셔서 친히 기도해 주신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탄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날 대신해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시는 성령의 탄식은 사랑의 슬픔이요, 사랑의 아픔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몸이 아픈 것은 알아도 마음이 아픈 것은 모릅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알아도 영혼이 아픈 것은 모릅니다.

탕자는 배고픔은 알았지만, 아버지의 아픔 마음은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보이는 사업의 실패는 알아도 나를 위해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의 탄식은 들을 줄 몰랐습니다. 그것이 탕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내 안에 계셔서 탄식하고 있는 성령의 탄식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가 흔들릴 때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여러 어려움을 만났을 때, 흔히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고 변명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하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는 기도하지 아니한 죄가 있습니다. 기도를 중단한 죄가 있습니다. 기도가 막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나를 대신해 간구해 주시는 성령의 탄식이 있습니다.

이 말할 수 없는 성령의 탄식 속에서 오늘 내가 이 모습으로, 많은 문제와 갈등 속에서도 이 정도라도 살아가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진정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성령께서 날 대신 간구하는 은총 속에 살아온 것임을 깨달으며 감사하며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오늘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선히 인도해 주심을 믿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합니다.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참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느 때에 들어도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어느 때에 읽어도 우리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자,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선하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폭군이나 독재자로 보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입니까? 아니면 괴롭히고 간섭하는 분입니까? 하나님을 부를 때 내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까? 아니면 마음이 불안해 지고 죄책감에 사로잡힙니까? 적어도 하나님은 나에게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은 선하실 뿐 아니라,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기다리는 선이 아니라, 찾아 이루시는 선이요, 행동하는 선입니다. 내 생활 속에서 선한 것을 만드시고, 이루어 나가는 선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은 창조적입니다. 사랑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선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는 선입니다. 팔짱을 끼고 앉아 기다리는 선이 아니라, 선한 자로 만드시는 선입니다.

사실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만큼 아름다운 것도,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나는 악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베푸시나 나는 그 복을 받아들일 그릇이 못됩니다. 이런 부족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나는 선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떠났으나,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부인했으나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내 자신을 믿을 수 없어도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내 삶에서 선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다쳐서 입원했습니다. 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바로 이 때 하나님을 만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퇴원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워낙 교만해서, 이렇게 다리를 꺾어 놓아야 교회에 나갈 생각을 합니다. 이 정도 상황이나 되어야 비로소 제가 하나님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이런 고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통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이 말을 뜻을 압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강하게 붙드시는가? 다리를 꺾어서라도 회개시킬 사람은 회개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께 나오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통 중에서 깨닫게 하시고, 고통도 감사로 이겨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깨닫든 못 깨닫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선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늦게야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왜 내가 어려움을 당해야 했는지, 왜 나에게 실패가 있고 질병에 시달리며 고독과 멸시 속에서 고통해야 하는지 지금 당장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그저 미리 믿는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 수는 있습니다.

우리 부산의 자랑은 바다와 더불어 살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아마 격랑이 이는 바다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바다는 평안해야 좋은데, 항해하는 배를 파선시키고, 바다 밑까지 전부다 뒤집어 놓을 듯한 극심한 풍랑이 일 때, 도대체 이것이 왜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쉽지않은 수수께끼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런 큰 풍랑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바다 속에는 많은 생물들이 있습니다. 많은 산소가 이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가끔 바닷물이 뒤엎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참 오묘한 신비가 아닙니까? 다시 말하자면, 고요하기만 한 바다는 죽은 바다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 안에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일이 일어야 하고, 태풍이 불어야 하고, 거센 격랑이 휘몰아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편안하기만을 바라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기도가 대부분 그렇습니다. 하나님, 무사하게 해 주십시오,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 시험에 좋은 성적 나게  해 주십시오,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매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을 믿는 이에게는, 참으로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일 뿐입니다. 분명히 모든 것입니다. 선과 악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의인과 악인이, 순풍과 역경이, 성공과 실패가 그 모든 것이 함께 역사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일마다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 모든 역사를 통해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에, 우리 믿는 이들은 그 미래를 바라보면서 미리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5절에 보면 “저희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요약하면 ‘내가 너를 환란 중에 영화롭게 하리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은 환란 중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환란 속에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 앞에, 이 2004년도 후반기에 과연 무슨 일이 놓여 있을지, 우리가 어떤 길을 열어 나가야 할 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형통하고 축복된 일들만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고, 그 속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감사하면서 오늘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진정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감사, 오늘을 살아가면서 감사, 내일을 소망하면서 감사하며 사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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