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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시초에 참예한 교회 (빌 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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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독일의 명장 롬멜을 아실 것입니다. 이차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작전과 용병술로 영국군을 단숨에 수에즈 운하까지 밀어 붙였던 장군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적국인 영국의 수상 처칠까지도 그를 두고서 “우리의 상대에게는 무척이나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 있습니다. …내가 개인적인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극찬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아 보였던 롬멜도 결국에는 자기가 점령했던 땅들을 하나하나 도로 빼앗기고 결국 북아프리카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보급의 차질 때문이었습니다. 영국군에 미군이 가세하면서 상대편으로부터는 끝없는 물량 공세가 시작될 무렵,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가장 기본적인 보급품인 탱크 연료와 식량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빠른 진격 때문에 그 보급로가 너무 길어진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연합군의 공군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서는 아프리카로 가는 독일군의 보급선들을 출항하는 족족 격침시켜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날고뛰는 ‘유능하고 위대한’ 롬멜이라 하더라도 탄환도 먹을 것도 없는 병사들을 가지고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의 ‘선교 24주년 감사 선교대회’의 마지막 날 주일입니다. 이 선교대회는 아마 우리 교단적으로 치렀던 행사들 중에서는 아마 역사상 최고의 특별 행사일 것입니다. 오대양 육대주에 파송된 선교사님들 중에서 특별히 제3세계를 위시한 후진국 지역의 선교사님들 36명과 그 가족들을 초청하여 지난 열흘 동안 그야말로 넘치는 은혜를 함께 나누는 잔치였습니다. 저는 이 선교대회가, 물론 짧은 시간이나마 선교사님들과 가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또한 저와 여러분들 역시 이 분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통하여 평소에 이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헌금하는 이 선교 후원의 사명에 대한 보람과 각오를 스스로 더욱 고취시킬 수 있었던 귀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하라’는 것이 우리 선교 사업의 표어입니다. 선교사 사명을 받은 사람이 ‘가는’ 사람이고, 그 나머지 교인은 다 ‘보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복음의 최전선에 투입되는 전투병들이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후방의 지원과 보급이 끊이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은, 이 선교의 전투 현장에서도 꼭 같이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오늘 이 큰 선교대회를 마감하는 주일에, 우리는 그 보내는 사람, 선교 사업의 후방에 있는 복음의 지원병들로서 우리가 맡은 사명이 왜 그처럼 요긴하고도 귀중한 일인지 그 이유들을 세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선교 후원은 복음의 최전선에 있는 전도자들의 영적 사기를 크게 앙양시킵니다.

빌립보서 4장 10절로 13절에 기록하기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 기쁨의 감사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바울은 로마에서 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평생을 오직 복음 전파 위해 살아 왔던 그가, 이제는 육신이 매인 몸이 되어 내일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사정에 처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라는 교인의 방문을 느닷없이 받게 되었습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바로 빌립보교회에서 특별 파송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바울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 구체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온 교회가 특별 헌금을 하여 이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바울에게 보냄으로써 바울을 물질적으로 후원할 뿐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아예 바울 곁에 머물면서 그의 옥살이 뒷바라지를 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일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보 교인들이 단지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지 항상 ‘이를 위하여 생각은 계속하고’ 있었던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생기자마자 빌립보 교인들이 그처럼 자기를 위하여 마음을 써 주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바울은 그 옥살이 중에서도 오히려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물론 빌립보 교인들의 그런 도움이 없었다 하더라도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전도자였습니다. 비천이든지 궁핍이든지 풍부한 때이든지 가리지 않고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인들이 그처럼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자기를 후원해 주었을 때, 사도 바울은 그처럼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그의 영적 사기가 백배로 앙양되었던 것입니다.

몇 년 전 경향교회 입당 감사 주간에 교단의 몇 선교사님들이 초대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일 저녁 예배 중에 그 선교사님들의 간증들을 듣는 특별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잠시 왔다가 가지만, 이렇게 경향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저 같은 선교사들의 사기가 백배 충천해집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날마다 복음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군사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은 그 자녀들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여야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키워야만 하는 눈물겨운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선교사님 본인들은 물론이고 그 사모님들 중에서도 풍토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중에 결국 귀국하게 되는 분들을 보면 마치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어 온 상이 용사들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교인 아닌 원주민들이 설교의 청중이 되며, 안락한 교회 사무실에 앉아 있는 대신에 선교사 신분이 드러나면 곧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특수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분들로 하여금 그런 곳에서의 하루하루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는지 아십니까? 바로 저 멀리 등 뒤에 있는 우군들의 기도와 후원입니다. 군인이 뒤에서 자국민이 밀어 주는 성원이 있을 때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것처럼, 오대양 육대주에 파견되어 있는 이 선교사님들은 교단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네들을 기억하며 생각해 주고 있다는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사기충천하여 오늘도 또 한 사람의 영혼을 찾기 위하여 몸을 던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 사업은 이처럼 복음의 최전선에 있는 전도자들에게 끝까지 싸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는, 절대 필요불가결한 귀중한 임무임을 꼭 기억하고 잘 수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선교 후원은 참여하는 신자와 교회를 건실하게 성장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빌립보서 4장 14절로 17절 말씀에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비단 지금의 경우뿐 아니라 훨씬 전부터 자기를 도와주었던 것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의 시초에’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초창기 전도 사역 시절을 가리킵니다.

이 빌립보교회는 바로 그 때부터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좀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주고받음으로써 내 일에 참예한’ 유일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즉 그 당시에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을 물질적으로 후원했던 교회는 이 빌립보교회 단 하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다’는 말에서 ‘한번 두번’이란 말은 ‘다시 또다시’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빌립보교회는 교회가 개척된 직후부터 계속하여서 그야말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을 꾸준히, 그리고 정성으로 후원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그런 후원을 칭찬하는 것이 그 교회와 교인들부터 개인적으로 무엇을 더 많이 받고자 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닌 것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이미 받은 것만 해도 넘치도록 풍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칭찬과 격려의 진의는 바로 그 빌립보교회로 하여금 더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하는 마음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즉 그처럼 전도자를 생각해 주고 도와줄 때 그 자체가 바로 빌립보 교인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열매가 풍성한 신자로 살아가는 축복의 방편이 될 것을 사도 바울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8, 9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그는 ‘용도가 부족’했습니다. 즉 현실적으로는 돈이 모자라 어렵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바울의 목회를 받고 있던 고린도교회는 바울을 물질적으로 전혀 돕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 즉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그 사도 바울의 생활비를 후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은 마치 탈취한 것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고린도교회를 위해 사역하고 있지만 생활비는 다른 교회들로부터 받고 있으니, 고린도교회 입장에서는 마치 다른 교회들의 물질을 빼앗아 오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사에서 이 대표적인 두 교회들의 차이를 보십니까? 빌립보교회는 세워질 때부터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을 후원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일년 육 개월이나 체류하면서 전도하여 세워진 교회였지만, 그 중에도 그 이후에도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는 전혀 돕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처음부터 전도자의 ‘괴로움에 동참’할 줄 아는, 즉 물질적인 어려움을 생각해 주고 후원해줄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처음부터 자기 교회의 목회자 생활비를 전적으로 다른 교회에게 떠맡기고 자기네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결국 영적인 차이로 귀결되어 갔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신약의 초대 교회 중에서도 가장 모범된 교회로 자라난 반면에, 고린도교회는 초대 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문제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아예 개척 시작할 때부터 선교 사업을 적극 추진해야만이 건실하게 성장하게 되며, 교인은 신앙생활 첫걸음부터 선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체질화해야만이 진짜 신앙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게 되는 것이 철칙인 줄을 깨닫고, 이 보장된 축복과 은혜의 방편을 결코 놓치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선교 후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고의 제물이요 영광이 됩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 이하 20절에 기록하기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선교 사업을 세 가지 표현으로 묘사하며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받으실만한 희생이요,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을 인간적으로 돕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직결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여기서 ‘향기로운 제물’이란 표현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 혹은 성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함을 뜻할 때 자주 사용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에베소서 5장 2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선교 사업은,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을 온통, 최대한으로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제물을 반드시 기쁘시게 받으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사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향기로운 제물을 기쁘시게 받으신 후에는 반드시 그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그 풍성한대로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처럼 빌립보교회만이 특별하게 행하는 이 선하고도 은혜로운 복음 사역을 생각할 때 절로 감격에 벅차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궁토록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순교만이 자기 몸을 하나님 앞에서 희생으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몸 가지고서도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지는 희생이 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선교 사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만이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대한민국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더라도 우리가 선교사님들의 ‘쓸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정성껏 후원헌금을 바침으로써 우리들 역시 꼭 같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적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 사업에 우리 생애 전체의 목표를 잡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며 많은 생명을 구원해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최고의 길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선교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으로 남기신 단 하나의 명령도 선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 후원은 결코 단순히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닙니다.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것은 세상의 무슨 자선 단체를 돕거나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는 따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직접 바치는 일이요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한 일인 것입니다. 전 생애를 통하여 오직 선교 사업 위하여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며 정성을 다하여 물질로 후원함으로써, 마치 자기 몸을 불 가운데서 혹은 칼 앞에서 순교의 제물로 온통 바쳐드리는 것과 꼭 같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희생제물로 드릴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저는 한 십여 년 전에 어느 선교사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를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 분은 남아프리카에서 원주민 흑인 아이들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을 얻어 일년 가까이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좀 낫게 되자마자 곧 돌아가서 선교 사역을 계속 시작하시던 참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편지는 “저는 하나님께서 ‘OO야, 그만 쉬어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일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었습니다. 사는 날이 바로 날마다 선교하는 날이고, 선교 사역 끝나는 날이 바로 하나님 뵙게 될 날이라는 각오로, 이 순간에도 오대양 육대주에 파송된 우리 선교사님들은 정말 ‘죽도록 충성’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분들 뒤에서 어찌 그냥 모른 체 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편안한 후방에 있다고 해서 전방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우군을 지원은커녕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런 몰염치한 사람이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후방이 무너지면 전방이 결코 지탱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들을 위한 여러분의 정성어린 후원헌금이 오늘이 이 선교사님들로 하여금 그 병약한 몸을 가지고서도 또 선교현장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용기를 불어 넣어 줍니다. 이 복음의 전사들을 위하여 뜨거운 기도를 계속하시는 가운데 건실한 신자가 자라면서 복을 받게 되고 일하는 교회로 성장하면서 더 많은 과실들이 번성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선교사님들을 기쁘게 하고 목사님들을 흐뭇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애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이 선교 사역을 진두지휘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야말로 일석삼조라 아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 선교대회의 표어 그대로, 실로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요 동시에 ‘우리의 몫’입니다. 경향교회는 24년 전 이 ‘복음의 시초’에서부터 이 하나님의 것을 바로 우리 각자의 몫으로 알고 ‘참예한 교회’가 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명령을 내리시고 진행하고 계시는 이 ‘하나님의 것’ 선교 사역을 위하여,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주어져 있는 ‘우리의 몫’을 받아서 끝까지 함께 참예하고 더욱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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