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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곱교회시리즈⑥ : 성전의 기둥이 되라 - 빌라델비아교회 (계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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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구로중앙교회)

몇 년 전에 교회학교 교사들과 함께 아파트에 심방을 갔다가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야기도하고, 웃기도 하다가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헛기침하는 소리도 들린다.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비슷한 느낌을 갖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때에 내 동생 친구 집이 시장에서 정육점을 했다. 놀다가 너무 더워서 잠시 고기 집어 넣는 냉동칸에 들어갔다가 안에서 문이 열리지 않고 밖에서도 몰라서 결국 자기 집 냉동칸에 얼어 죽는 사고도 있었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이렇게 사망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살면서 많은 계획을 한다. 관공서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허가를 받아야 할 때도 있다. 대학 입시를 위하여 시험을 치룬다. 대학에 가기 어려운 현실을 입시 문이 좋다고 이야기 한다. 취업의 문이 좁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같이 우리가 살면서 닫힌 문이 열려야지 문이 열리지 않으면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문이 열리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도 맞는 열쇠가 있어야 된다. 내 자동차 열쇠를 갖고서 더 좋은 차를 열려면 안된다. 나의 아파트 열쇠를 갖고서 더 좋은 집의 문을 열려고 하면 열리지 않는다. 맞는 열쇠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닫힌 문을 열어야 하는 열쇠가 필요하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신가? 인생의 열쇠를 쥐고 계신분이다. 역사의 열쇠가 주님에게 있다. 내 인생의 장래의 열쇠가 주님에게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앞길의 열쇠가 주님에게 있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닌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주님”이시다. 다윗의 열쇠를 이해하려면 이사야 22장에 보면 된다. 당시 셉나라는 사람이 국고를 맡고 있었다. 나라 창고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얼마나 막강한 권력이겠는가? 그러나 셉나가 자신의 관직을 앞세워서 못되게 굴었다. 결국 셉나는 열쇠를 빼앗기게 되었다. 후임으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 국고를 맡은 열쇠를 손에 쥐게 되었다. “내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닫으면 열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다윗의 열쇠가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 내 인생의 열쇠는 근본적으로 주님에게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열쇠를 갖고 계신가? 주님은 천국 열쇠를 갖고 계신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천국 열쇠는 음부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는 생명의 열쇠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을 종합해 볼 때에 주님은 우리의 살고 죽는 일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생명은 곧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도 결국 나의 노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국의 문을 열어 주셔야 간다.

어느 교회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교인에게 담임목사가 찾아가서 환자를 민망히 여겨 손을 잡고 기도해 주려고 했더니 그냥 해달라는 것이다. 기도 후 숨졌기에 수의를 입히려고 이불을 걷었는데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있기에 펴 봤더니 금고 열쇠였다. 그것을 놓칠까봐 목사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금고 열쇠가 효력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금고열쇠, 아파트열쇠, 자동차 열쇠, 이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 오직 주님의 이름이 곧 천국을 열 수 있는 열쇠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관하여 많은 지식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식을 앞 세워서 예수님을 모욕하려고 하였다.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책망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지식의 열쇠가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지식의 열쇠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근본적인 문을 열 수가 없다. 이같이 예수님은 생명과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신분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열쇠를 갖으신 분이다. 에베소서 1:22의 말씀에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열쇠를 갖으신 분이다.
요셉을 보라. 요셉은 형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잘 되는가 싶더니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까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의 길을 형통케 하셨다. 요셉의 막힌 문을 열어 두셨다. 왜냐면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열쇠를 갖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 돌 무덤에 장사되었다. 무거운 돌 문으로 그 무덤을 막았다. 그리고 인봉을 쳤다. 로마의 병정들이 밖에서 지켰다. 세상의 권력으로 온통 문을 꼭 막았다. 그러나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열쇠를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삶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 있어야 한다. 주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으면 이 세상의 일도 막히게 되어 있다. 잠시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 가서는 막히게 된다. 왜냐면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이다. 신통해야 형통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제대로 열려져 있어야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신통함.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될 때에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형통케 하시는 축복이 임할 줄로 믿는다.
목사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선생님이 좋으면 그 과목이 좋아지는 법이다. 세우신 주의 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줄로 믿는다.

이같이 주님은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열쇠를 갖고 계신분이다. 살고 죽는 일의 열쇠, 만물을 다스리시는 열쇠를 갖고 계신분이다. 어떻게 우리의 인생에 문이 열리는 형통의 은혜가 임하겠는가? 닫힌 문이 열리는 축복을 경험하겠는가? 본문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대답해 주고 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갖고 있지만 말씀에 순종하였다. 당시 빌라델피아에는 지진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살 만한 사람들은 그곳에 살지 않았다. 주로 고생하는 노예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작은 능력을 갖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공식이다.

작은 능력을 갖고서도 내 말을 지키라. 사람들이 왜 실패하는가? 자신의 약함을 보고서 스스로 절망하고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저 사람은 저렇게 빵빵하게 잘 나가는데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이냐? 매일같이 신세 타령만 하다가 세월지나 실패한 인생을 살다가 죽는다. 계속해서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능력을 갖고서 주님의 말씀을 지킬 때에” 거기에 문이 열려지는 축복이 임할 줄로 믿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했다. 커다란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7일 동안 성을 돌라. 7일째 일곱바퀴째 돌 때에는 함성을 질러라. 주님 말씀하시기에 그대로 지켰다. 결국에는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작은 능력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킬 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점령한 후에 그들은 강해졌다. 다음에 점령해야할 성이 아이성이다. 여리고 성에 비하면 작은 성이다. 아이성을 점령할 때에 어떤 물건에도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강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 점령을 실패했다. 아간이 몰래 금과 은, 아름다운 외투를 몰래 훔쳐갖고서 나왔다. 강하였지만 말씀을 따르지 않았을 때에 주님은 문을 닫으셨다.

문제는 내가 지금 큰 능력이 있는가? 아니면 작은 능력이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내가 지금 작은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는가? 이것이 문을 열수 있는 열쇠이다. “작더라도 말씀을 지키라.” “힘들더라도 말씀을 지키자.” “부족하더라도 말씀을 지키자.” “병들었더라도 말씀을 지키자.”

이렇게 작은 능력이라도 말씀을 지킬 때에 문을 열어 주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빌라델피아는 지진이 너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기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기둥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성전을 지으면서, 목회하면서 기둥같은 장로님들과 대화할 때가 많다. 어느 장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에 거역하지 않고 사는 것이 제 기본 마음입니다.” 얼마나 감사한가? 교회의 기둥처럼 쓰임 받는 자가 되려면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 성전의 기둥이 되라. 그러려면 작은 능력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자. 부족함이 많이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자. 주님께서 우리를 성전의 기둥으로 세워 주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앞 길도 열어 주실 줄로 믿는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을 부르시더니 “얘들아, 들고 가기에 조금 무거운 돌을 들고 따라 오너라” 하셨다. 그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등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거운 돌을 들고 예수님을 따라 갔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아이고, 귀찮은 짓한다" 하면서 한손으로 달랑 들 수 있는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평평한 곳에 가시더니, 주님께서 각자 가지고 있는 돌들로 떡이 되게 하셨다. 베드로도 배불리 먹고, 야고보, 요한도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김밥 한 조각만한 것 하나만 먹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시면서 "얘들아, 작은 돌 몇개 가지고 일어나거라" 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작은 돌 몇 개 들고 가는데 가룟 유다는 아까 배고팠기 때문에 큰 돌을 들고 따라 갔다. 주님께서 맛난 열매가 있는 나무 아래 서시더니 돌을 던져 따먹으라고 하셨다. 다들 돌팔매질을 하여 자기 먹을 것을 땄는데 가룟 유다는 그 무거운 돌을 높이 던질 수가 없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의미가 있다. 내가 작을 지라도 주님 말씀 데로 순종하자. 그래서 우리의 앞 길에도 형통한 길이 열리고, 성전에도 기둥처럼 쓰임받는 축복의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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