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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것'과 '틀린 것'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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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일 목사 (기둥교회)

'다른 것'과 '틀린 것' 

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 38~42절)

<목회기도>

생명주신 하나님
더위를 느끼며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며 살게 하심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 여기에 모인 우리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은 복된 사람들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추함이 있고
용서받아야 할 죄가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시고
치료하시고, 고치시어 새롭게 변화됨의 기쁨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모르는 정치인은 경제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 치지만
우리가 느끼며 사는 세상은 쉽지가 않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런 저런 일로 마음에 받은 상처가 많고 이런 저런 부딪침으로 무너진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영육간에 새로워짐의 기쁨을 원합니다.
은혜 받은 감동과 간증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약속하신 성령으로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이 귀한 시간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한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군대, 객지, 외국에 나가 있는 성도들, 병상의 환자들
이런 저런 이유로 낙심하여 신앙생활에 방학중인 성도들
저들 모두가 우리와 함께 있는 복된 자리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부족한 종을 쓰시는 하나님,
목소리에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서 만난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인 줄 믿고 감사 드립니다.
비가 자주 와서 습기가 많고 날씨가 더워 짜증나는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옷 입는 것에 대해서도 편한 대로 입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글에 보니 [자신을 위해 먹고 남을 위해 입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는 것은 자기를 위해 먹고, 옷은 자기 편한 대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입으라는 뜻입니다.
여름만 되면 배꼽을 내놓거나, 아슬아슬하게 입고 교회에 오시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많이 보여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제가 나이가 들어 안경 렌즈의 초점이 위 아래가 모두 다릅니다.
아래 쪽이 돋보기라 초점이 잘 안맞아 여러분이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앞쪽에 아슬아슬하게 입은 분들이 계시면 신경이 쓰입니다.
'시험에 들 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제게 고리타분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으나 할 말은 해야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단어의 뜻대로는 '하나님께 절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단정하고 바른, 점잖은 옷차림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나 편하게 구경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름에 더워도 단정한 복장으로 예배의 자리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들과 "은혜 받는 복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사람은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고 보는 것도 다릅니다.
들리는 것이 다르고 듣는 것도 다릅니다.
여러분의 눈에 요즈음 제일 많이 보이는 것이 무엇이며 
여러분의 귀에 요즈음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그 분야에 관심이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살이란
주변의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무관심은 죄"라고 하였고,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는
"너무 무관심한 것도 병이지만 너무 한가지 일에만 집착하는 것은
  더욱 큰 병리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찾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마을, 한 촌(a village)은
  요한복음 11장 1절과 12장 1~3절에 보면
  나사로와 그 누이들이 살던 '베다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위치한 지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km떨어진 곳에 있는 지역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베다니에 가시게 되었는데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나사로와 그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와 가깝게 지내셨던 것 같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사로와 예수님의 관계를 말할 때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고 한 것이나(요11:36)

  오늘 본문에 마르다가 예수님께 허물없이 말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10:40)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집안에 모셔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먼저, 마르다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르다는 적극적인 여자였습니다.
 
베다니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간 사람은 마르다였습니다(눅 10:38).
마르다는 이런 열망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자 했던 마르다와 같은 그런 열망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부목사님들이 각 교구별로 심방했습니다.
속회별로 모여 예배 드리고 말씀을 전하고 상담을 하는 [속회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에서는 자기 집 차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번 속회 심방은 우리 집에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이 우리집에 오셔서 말씀 전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목사님들을 자기 집에 모셔가려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집은 안되니까... 다른 집에서 모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말씀 듣고 기도 받는 복된 시간을 갖기를 열망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가 자기 집에 와서 말씀을 전해주기를 열망했습니다.
 
마르다는 솔직한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뫼신 마르다는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잘 대접하려고 바빴습니다(눅10:40).
예수님을 잘 대접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자기는 일하는데, 예수님 앞에 앉아만 있는 마리아를 본 마르다가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예수님 동생 마리아는 내가 이처럼 바쁘게 일하는데
  예수님 앞에 앉아 있기만 하네요. 마리아가 지금 저렇게 앉아 있을 때인가요?
  저를 도와주라고 하세요." (40절)라고 말입니다. 
 
이런 마르다가 버릇없는 나쁜 여자입니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 중에 마르다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적극적이고,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며,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사실 마르다는 본받을 점이 많은 여인입니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예수님께 항변하고 있었을 때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눅10:39)
 
자기 집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눅 10:42)라며 마리아가 마르다에 비해서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 중에 누가 더 잘했느냐'라는 판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상황에서 <왜 예수님이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던 마리아를 칭찬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아래 앉았다고 해서 일평생 말씀만 듣고, 말씀만 묵상하는 생활을 계속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노동에 부지런하도록 창조되었으며,
각자의 소임에 충실하고 공동유익을 위해 잘 사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신학자들이, 설교가들이 오늘 본문의 두 자매 이야기를 말하면서
예수님은 일하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서 사색하고 명상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좋게 여기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 하지 말라고 하시거나 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일의 우선순위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손님이 오셨을 때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열심히 일하면서 마리아가 가만히 앉아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기만 일한다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보면 이곳 저곳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가운데 간혹
  '나만 바보처럼 일하는 것 아냐?, 나만 주차장에서 매연 맡아가면서 안내하고,
  방송실에, 교육실에, 주방에… 나만 처박혀 고생하는 것 아냐?'하며
자신의 봉사와 땀흘림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발 앞에 앉은 마리아를 무조건 칭찬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런 삶을 살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하지 말라고 하시거나 일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식사할 겨를도 없이(막 3:21) 일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일 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르다의 문제는 너무 '지나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많이 할 필요가 없는데,
한 가지만이라도 족한데 왜 그러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너무 낭비적이었습니다.
검소하고, 알맞은 식사를 준비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마르다와 비슷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많은 음식을 장만합니다.
반찬이 많은 음식이 좋은 것인 줄 압니다.
대개 보면 음식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놓는 것이라도 많게 하려고…
숫자만이라도 많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심방 가서 보면 음식을 너무 많이 차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음식을 너무 많이 차리지 마십시오.
 
여러분, 목회자들이 심방을 갈 때는 밥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심방 가는 집에 말씀을 전하고 그 집을 위해 기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는데 부엌에 가서 달그락거리며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작 설교를 듣고 기도 받아야 될 사람들이 음식 준비하느라 나가고, 애기가 울어서 나가고…
말씀도 못 듣고 기도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심방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음식은 알맞게, 적게 다섯 가지 이내로 하고 비싸지 않게 먹는 것이 좋습니다.
 
먹는 것을 탐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 이상을 먹는 것은 남이 먹을 것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중세 시대의 다섯 가지 탐식>
 
  1. 너무 빨리 먹는 탐식(praepropere)
  2. 너무 비싸게 먹는 탐식(laute)
  3. 너무 많이 먹는 탐식(nimis)
  4. 너무 열심히 먹는 탐식(ardenter)
  5. 너무 야단법석을 떨며 먹는 탐식
 
우리는 알맞게 적게 비싸지 않게 먹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르다의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은 옳고 마리아는 틀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동생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바른 행동을 하고 있을 때에라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얌체가 있습니다.
자기는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입으로만 다른 사람을 부리고, 정말 공주처럼, 왕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않고 얼굴 내미는 곳에만 나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얌체들의 행동을 가지고 마음 아파하고 투덜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마르다의 더 큰 문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좀 알아달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예수님께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명령한 것입니다.
 
마르다만 그랬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안들어
  '하나님, 이렇게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렇게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며
  하나님께 항변한 적은 없으신지요?
  주로 믿음 좋다는 이들, 기도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 교회에 소속된 성도로 산다면서… / 겸손하게 섬기며 산다면서…
  '목사님, 이렇게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렇게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며
  목소리를 높이신 적은 없으신가요? 
 
하나님의 말씀 따라 천국백성으로 사는 이들은 믿고 순종할 의무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빛 되고 소금 된 삶을 사는 이들은 겸손함으로 섬길 의무 밖에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 소개된 마르다는 예수님을 모셔 놓고 대접 때문에 분주하다 보니
예수님의 방문이 자신에게 무익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방 받는 분들 잘 들으세요.
마실 것을 주시고, 때론 음식을 주시며 대접 해 주시는 것 감사합니다.
그러나 심방은 대접 받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안 하셔도 됩니다.
해도 예수님 말씀처럼 간단한 것이면 됩니다.
말씀 듣고 기도 받는 일에 관심 가지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 잘~ 들으세요.
여러분이 주일이면 교회에서 주방에서 봉사,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
안내, 주차안내, 차량운전, 교회관리… 등올 봉사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한다는 이유로 예배에, 기도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됩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예배를 잘 드렸다는 이유로,
자기가 열심히 일한다는 이유로 다른 분들에게 무례해선 안됩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한다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교회에도 유익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마리아가 자신과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Time 지에 소개되었던 문화의 다양성에 관한 그림을 보여 드리려고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위의 그림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영국에서는 이 자세가 '편안한(relax)' 자세라고 합니다.
반면에 태국에서는 '무례하고 버릇없는(rude) 자세'라고 한답니다.
 
밥 먹는 방법에 관한 다양한 문화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젓가락을 사용합니다.
영국에서는 칼과 포크로 밥을 먹고, 인도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우리나라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밥 먹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이 삶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처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옛날의 아프리카 흑인들은 그냥 짐승 같은 삶을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국을 거쳐서 아프리카 우간다 선교지를 방문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대한 여러 책을 보다가 [레마 솔라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이 책은 케냐 북부 벌판에서 소떼를 지키던 소년이 꿈을 가지고 공부하여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방학이 되면 다시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아가 원주민처럼 생활하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저는 그 책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과 문화
특별히 예절교육과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 등에 대해 소개된 내용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과 그들의 삶의  스타일이 다를 뿐이지
그들도 본받을 만한 좋은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흑인, 특히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한 생명이라도 구원받기를,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고난받으신 것에 대해 드러냄 없이, 값없이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합니다. "누구든지".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다른 사람이 지금 처한 위치와 삶에 대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대화하려고 하고 사귀어야 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 식으로만 바꾸려 하다가는 크게 실 수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섬김도 다른 사람이 나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하거나 함부로 손가락질해서는 안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 자신과 다르기 때문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다른 집 아이와 다르다고… 모두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TV에 나오는 남자, 영화에 나오는 여자 같지 않아서 불만입니까?
우리는 TV 드라마와 영화를 너무 현실화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지만 서로 의지하고 서로 귀히 여기고 사니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말없고 무뚝뚝하고 재미없습니까?
그러나 성실하고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우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애교떨고, 싹싹하고, 간드러지지 못해도
넉넉하지 않지만 살림 잘 하고 애들 키우며 열심히 사니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지난 6월 13일 주일 밤 예배에 장홍선권사님의 주선으로 중국 [꽃봉오리 예술단] 어린이들이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장권사님으로부터 사진 몇 장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제가 은혜 받은 아래의 사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서로 앞에 앉은 아이의 머리를 손질해 주는 사진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하는 여러분, 세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여러분,
우리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내가 뒤에 있으면 앞의 사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앞에 있으면 뒤의 사람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힘이 있으면 연약한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여유가 있으면 부족한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땀흘림과 수고를 다른 사람들이 꼭 알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땀흘리고 애쓰고 희생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 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했어"라고 칭찬하실 날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나님께 칭찬 받는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주일 아침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말씀을 들은 성도들 훗날 하나님 앞에 가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자리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때로 일하면서 실망할 때도 많이 있고
일하면서 고통스러워 하소연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낙심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주일에 세상에서 땀흘려 얻은 물질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사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4년  7월  11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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