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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과 진정으로 (요 4: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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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일 목사 (범어교회)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1.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님의 영원한 샘물에 관한 말씀을 듣고는 사마리아 여인은 즉시 그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물을 마시는 일에 ‘왜 남편이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신비의 생수가 아니라 곧 예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이루는데 남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란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구원은 분명히 개별적이고 단독자의 결단이지만 항상 공동체와 연결되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홀믿음 신자의 경우에서 우리는 그 신앙 생활이 얼마나 힘든가를 엿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홀믿음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이 중보의 기도만이 홀믿음 성도에게 가장 큰 사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분명 처녀가 아님을 직관하시고 함께 사는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홀 믿음 성도 여러분! 가서 남편을(혹은 가족을) 데리고 오십시오. 함께 주님의 영원한 생수를 마시십시오.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좋은 음식이 생기면 남편이나 가족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하물며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생수를 마시는 곳에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을 함께 모시고 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 많이 하시고 공을 들이세요. 왜냐하면 이 생수를 맛본 자 마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오는 것을 예배 의식만을 생각하면 반드시 가족을 데리고 와야 할 이유라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생수를 마신다는 확신이 없으십니까? 생명의 양식을 먹고 계신다는 확신이 없으십니까? 있다면 데리고 와야 할 이유가 분명할 것입니다.

2.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요구에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절)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 말씀하시길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b-18절)

고 하셨습니다. 이에 즉시 여인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고 응답했습니다.

‘선지자’란 이 표현은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신적 능력을 지닌 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속사정을 너무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놀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시며 곧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속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성경엔 우리 머리카락도 하나하나 다 세시는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운 것입니다. 매를 들고 계셔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 사정을 다 알고 계셔서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다시는 교회 안 올란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교회 안 오신다고 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요 1:48) 고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더라도 우리를 정죄하려고 혹은 심판하시려고 보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여 범죄자를 색출하거나 그 죄증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그런 분위기는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여인의 비리를 알고 계신다고 그 여인을 협박하지 않으십니다. 혹은 신랄하게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비리를 알고 있으면 그 하나를 가지고 그를 모두 평가 해버립니다. 비리가 아니더라도 조금의 실수나 허물을 알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 하나를 들고는 상대 못할 죄인으로 취급해버립니다. 그러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교회 신축 부지 부근의 주민 중 몇몇 분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이기적인 교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십계명을 어긴 교회,’ ‘자기들의 재산을 헤치는 교회’ 등으로 표현하면서 건축을 시작하면 집단 행동을 불사하겠다는 협박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사랑도 없고 이기적이고, 그들의 재산을 헤치는 괴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가지 일로 너무 극단적인 표현으로 상대를 순간 폄하(貶下)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느 교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참 웃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분이 우리 교회에 잠시 나왔는데 이웃 다른 교회로 옮겨버렸답니다. 우연히 만나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목사님이 싫어서 그랬답니다. 이유는 저의 앞 머리카락 색깔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멋 내려고 앞머리에 흰색 브릿지를 하는 그런 교회는 안나간다’고 하더랍니다. 이 머리 때문에 오시는 분도 계시지만 이 것 때문에 가시는 분도 있을 줄 전혀 몰랐습니다. (이 천연 브릿지를 몰라주다니 ^-^) 

아무튼 예수님은 이런 여인의 속사정을 너무도 정확하게 알면서도, 그 여인이 다른 이야기로 비켜나가려는 모습을 보시고 그 여인의 마음을 헤아린 듯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지혜요 깊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줍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정죄하기 위하여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과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들어온 것입니다. 앞의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사마리아 여인이 비켜나가려고 택한 질문은 예배 처소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절)

선지자라고 부른 예수님에게 가장 적합한 질문이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중한 대화 과정에서 나온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얼떨결에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신학적인 질문이 깊은 사색에서 나올 때도 있지만, 비켜나기 위한 혹은 자기를 변명하고 속내를 감추기 위한 공격성의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지만 그것을 오히려 기회 삼으셔서 예배의 중심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 처소로 왈가왈부할 때가 많습니다. 교파를 두고 어느 교회에 등록해야 할지 헷갈린다고 하며 교회를 은근히 비난하는 모습들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순례 다니시는 분들에게 그런 위험성이 많습니다. 이 교회는 이렇고, 저 교회는 저렇고 하다보면 다닐 교회가 지상에서는 찾기 힘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1, 23-24절)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예배자에게 신령과 진정을 원하십니다. 이 말씀의 좀 더 가까운 뜻으로 영어에서는 ‘in spirit and (in) truth'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곧 우리가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을 보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a)

우리는 예배당으로 나아오기 전 우리의 육체의 현저한 모습을 버리고 주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성령 안에서 예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졸지 않도록 미리 피로회복을 시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과 행동을 삼가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육체의 현저한 현상대로 나아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진정’이란 말은 곧 ‘진리’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진리입니다. 까닭은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십자가의 복음의 은총이 없이 드려진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가 우리 예배의 중심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음 없이 드려지는 어떤 예배 전례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몸도 마음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은혜를 찬양하며 성령 안에서 우리의 성품과 뜻을 다하여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에 예배 안에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납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며, 영원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시며, 삶의 참 행복을 누리도록 복음을 내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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