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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고백이 고백되기까지 (요 1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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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사랑의 고백은 해 보셨습니까?
만약에 고백이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이신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은 모습과 말씀들은 제자들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분이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당황한 제자들이 이해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성찬예식을 행하셨습니다. 평소와는 다르셨습니다. 식사를 하시는 도중에 떡을 주시며 “이것은 내 살이라 하시고 잔을 주시며 이것은 내 피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씀들을 유언처럼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래 내가 잠시만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 합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날 밤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아직 알 수 없는 제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말씀하시는 예수를 다 이해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을 다 이해 할 수는 없지만 베드로에게 계속 신경 쓰이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꾸만 어디를 가신 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어딘가로 떠나 실려고 준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베드로는 묻는 것입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가시면 왜 가시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 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는 더 크게 말을 합니다. “왜 저는 지금 따라 갈 수 없다 하십니까? 나는 지금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시몬 베드로야 네가 지금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는 하지만 닭 울기 전에 새벽에 오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할 것이다”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으로 요한복음 13장이 끝나지만 마26장에 보면 베드로가 한마디를 더 한 것으로 소개 합니다. “다 주를 버릴 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을 지언 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베드로의 고백이 너무나 멋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 다닌 수제자로써 얼마나 충성스럽고 사나이다운 고백입니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남달리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로서의 각오와 결단입니다.
눅22:33절에서는 주와 함께라면 옥에도 죽는데도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이런 제자의 고백을 주님께서는 인정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서운 했을까요? 왜 내 고백을 믿어주지 않냐는 것이지요. 베드로의 더 큰 서운함은 저와 여러분 마져도 베드로의 고백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배반하고 저주하고 떠나가 버린 베드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 하면 어떤 생각이 납니까?
베드로 하면 주님을 저주하며 배반한 사람으로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조용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리석다고 여기는 베드로의 고백 속에서 오늘 여기 앉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이런 신앙고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위해 죽으셨군요! 나도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옥에도 죽는 데라도 가겠습니다.” 하는 신앙고백을 해 보았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너무도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룟유다를 비웃고 베드로를 어리석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를 향한 신앙고백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인 저마져도 기도 속에 사역 속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라도 내 놓을 수 있다는 고백이 메말라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 한 것입니다. 기도는 했습니다. 열심히 사역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 앞에 요구만 했습니다. 염려만 아뢰었습니다. 부흥되게 해 달라고만 했습니다. 고잔의 새 성전부지 위에 속히 주의 전을 세워 달라고 만 했습니다. 성도들을 축복해 주셔 달라고만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요구만 있었지 고백은 없었습니다.

...주와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아 병들어도 좋아... 노래는 하지만 사실 이것은 소극적인 고백이고 적극적인 고백이라면 찬송가 355장에 가사처럼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을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영광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요구만 있었지 고백은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주님을 위해 죽겠다 주님이 원하는 곳에 가겠다고 하는 신앙고백은 골동품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내 안에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고백은 없고 요구만 있는 삶은 이제 곤란합니다.

초기 기독교 사회의 가장 큰 능력은 주님을 위해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위해 일하겠다는 것을 넘어 죽겠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도 많고 성도도 많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은혜 받았다고 사명 받았다고 하는 목사 후보생들은 쏟아지고 있습니다.
여자 전도사님들도 우리에게 목사 안수를 달라 시대는 변했다 성경적으로 조명을 다시 해보자 하십니다. 물론 저도 찬성입니다. 어설픈 바지보다 널찍한 치마가 낫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문제는 주님은 죽었으니 나도 좋지 하는 고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인가요? 인터넷 신문에 엘지 정유 노동조합에서 파업을 준비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들의 순수 연봉이 7600만원정도 한답니다. 우리나라 왠만한 사람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저들입니다. 상위권의 연봉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연봉을 인상 해 달라 42시간에서 38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해 달라 합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참으로 배가 불렀다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저들의 깊은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한없는 요구의 모습입니다. 요구가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요즘 신앙이 요구만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 때문에 부자 되고 주님 때문에 문제 해결되고 주님 병 낫게 해주세요...신앙고백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목소리 높혀 기도도 하지만 조용히 주님 앞에 드려지는 헌신된 기도, 신앙고백이 없는 기도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아멘 합시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요구만 있는 사람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고백합니다.
고백이 없다면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보십시오.
제대로 콩꺼풀이 씌워 사랑해 보십시오.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올인 하는 것입니다. 쏟아 붓는 것이지요 인생을 거는 것이지요
당신과 함께라면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라면...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짐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다음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잔디 뽑고 청소하고 이런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이 눈물의 씨앗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콩꺼풀이 벗겨지면 제 정신이 드는 것입니다.배우자들끼리 콩꺼풀이 안 벗겨지고 평생 가는 것은 복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하면 올인 하는 것입니다. 부모도 재산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 외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만 사랑 하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죽음으로 우리에게 사랑으로 올인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는 것은 사랑 때문이고, 고난 받으신 것도 사랑 때문이고, 죽으신 것도 사랑 때문이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 포기하고 선교사로 가는 것 아닙니까!
사랑은 포기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기할 때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예배에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예배는 너무나 받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은혜 사랑등등 모두가 달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모든 것을 올인 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축복하고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하겠습니다. 아멘 하겠습니다.” 여야 합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예배 후에 어느 성도가 저에게 말하기를 “오늘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주신 말씀에 결단하고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바로 교회 앞 현수막 게시대에 바로 예배를 통해 당신은 무엇을 헌신하기로 하였습니까? 라고 붙였겠지 않았겠습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습니까! 왜 입니까?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사실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가 결론을 알고 이해하니까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는 모르나 마16: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이다 라고 믿음의 고백과 요13:37절에 주를 위하여서 어디든 갈 것이요 내 목숨도 버리겠다라고 사명의 고백을 했던 제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을 믿습니다 라는 축복된 고백에서 말씀 하옵소서 듣겠나이다. 사명의 고백까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은 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까?
왜 주님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고 하셨을까요?
왜 지금의 많은 각오와 결단이 있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십자가 없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영광 만 꿈꾸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없는 신앙생활도 점검받아야 하지만 십자가 없는 고난을 배제한 신앙고백도 점검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의 사역 중에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감옥과 태장과 매를 맞았고 그럼에도 그는 감사했고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병 나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 사업을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아름다운 여러분의 신앙고백위에 십자가가 담겨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노래하는 노랫소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헌신이 없는 십자가 없는 신앙고백은 속된 표현으로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베드로가 하는 지금의 고백은 십자가가 없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신앙고백이 있는 신앙을...그리고 예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십자가 정신이 있는 신앙고백을 원하십니다. 믿습니다를 넘어야 합니다. 요21:15-23절에 보면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고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릴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봅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곧 부인하는 것과 저주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린 것이 아니라 “네가 지금은 아니지만 후에는 따라 올 것이다” 하시고 그의 고백을 인정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연약한 베드로에게 미래적 사명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너를 앞으로 더 큰 일을 할 사람임을 인식시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지금에 매여 있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내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지만 주님은 나를 기대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앞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물론 베드로는 말씀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 할 것이고 했습니다. 저주까지 퍼 부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난 주님은 지금의 베드로를 보신 것이 아니라 미래의 베드로 지금을 넘어를 보셨습니다.
주님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지금만 봅니다. 지금을 보며 앞으로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미래를 보며 기대가운데 지금을 참아주고 인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까지 그리고 시몬이 베드로가 되기까지 그리고 사울이 바울 되기까지 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기대하며 지금을 말하는 자여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하는 것을 넘어 앞으로 있어질 베드로의 충성을 보셨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을 보고 형제를 판단해서는 아니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유다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 하게 될 베드로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연약한 사람들을 보며 심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판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앞으로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대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는 지금 큰소리치는 사람도 유다와 베드로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성령 충만했지만 결국이 나쁜 니골라가 있어지듯 말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주님은 저들을 사랑하고 결국 저들을 쓰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아니지만 후에는 언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온전해졌습니까?
‘후에는’ 언제입니까? ‘성령충만 받은 후에...’입니다.
신앙이 신앙다워 질려면 고백이 고백다워 질려면 ‘성령충만’입니다.
사복음서의 제자들은 떠날 수밖에 없는 제자들이었지만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져 죽음 마져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실 화려하게 포장을 해보지만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사복음서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겨우 구원을 받으나 배반하고 저주하고 떠나는 연약한 존재에서 사도행전 적 그리스도인이 되면 성령의 능력을 받고 환경을 이기고 강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지내는 천주교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남다른 사랑을 입은 성도님들이여!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고백에 십자가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은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 할 때 온전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행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즘 성도님들은 사랑할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 할 힘이 없습니다. 인간적 힘은 베드로의 고백이 깨어지듯 깨어지고 엄청나게 주를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나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모든 환경에서 고백이 고백되게 하고 사명이 사명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사역을 해야만 합니다. 모든 환경에서 모든 환경을 감당 할 능력이 그리고 사랑할 힘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제대로 한번 쏟아 부을 수 있는 기회와 마음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고백에는 십자가 정신에 담겨 있느냐? 그리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고백되는 비결은 다짐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있어진다는 것을...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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