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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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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미국 사회와 우리나라 사회에서 뚜렷하게 차이 나는 것 중에 하나가, 미국인들은 ‘Thank you.’라는 말을 자주 쓰는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비교적 좀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말 한 마디야말로 사람 사이에 ‘천냥 빚도 갚는’ 값진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온갖 체면은 잘 차리면서도, 이상하게 그 말 한 마디는 상당히 아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를 안 하는 바람에 망치게 되는 인간관계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일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공짜로 받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은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은하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무언가 더 내려 주기만을 바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여겨지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악하고 철면피한 죄인이 될 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처럼 염치없고 뻔뻔스러운 인생들을 향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그 답답함을 토로하고 계시는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예수님께서 탄식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아니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감사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본문 말씀을 따라 세 가지 감사의 올바른 자세를 오늘 맥추감사 주일에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늦게 응답받을 때에도 ‘잊지 말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17장 11절로 14절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행길을 가시던 도중에 일어났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즉 그 접경 지역에 있던 어느 한 촌을 지나가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한 무리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의 자비를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와서 청하지 못한 이유는, 문둥병자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래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인다는 것은 문둥병자가 병이 낫게 된 이후에 행해야 하는 확인의 절차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당장 낫게 해 주시는 대신, 그냥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을 보이라고 말씀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문둥병자들은 실로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그 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난 그 자리에서가 아니라 제사장에게로 가던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아버렸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들을 만나셨던 바로 그 자리, 그들이 예수님께 자비를 빌면서 간청하던 바로 그 순간에 즉시 그 병을 고쳐 주셨더라면, 아마도 열 문둥병자들이 모두 예수님께 감사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예수님을 떠나서 길 가던 도중에 병이 나아지도록 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머지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자기네 몸 낫게 된 기쁨에만 젖어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 명,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만이 그 와중에도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인 줄을 깨닫고, 직접 감사드리기 위해 되돌아왔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제목으로 하나님께 간구드릴 때,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드리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 응답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새벽기도 시간 바로 그 때, 주일예배 시간 바로 그 자리에서, 가정에서 기도드리는 바로 거기서 즉시 하늘에서 무엇이 뚝 떨어지듯이 응답되는 것이라면, 아마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빼먹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평범한 하루의 일과가 흘러가고 있는 중에, 혹은 한두 주일, 혹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기도드린 자신은 벌써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기도 하십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내려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베풀어 주시는 기도 응답에 대하여 정신 차리고 주의하여 살피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로, 재수 좋아서 생긴 일로, 아니면 당연히 될만한 때가 되어서 이루어진 일로 무심히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마땅히 돌려야 할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저 좋은 일 생긴 것만 좋아하고 당장 자기 집으로 달려가 버리는 아홉 문둥병자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재수나 우연이란 단어는 적어도 신자라면 결코 써서는 아니 될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사사건건이 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따라 생기는 것인 줄로 깨닫고, 모든 일에, 모든 경우에 잊지 않고 감사드리는 생활을 꼭 습관화시킬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적게 받았다고 여겨질 때에도 ‘크게’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 15절로 17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열 문둥병자가 꼭 같이 고침을 받았지만 그 중에 단 한 명만 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사례(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습니다. 즉 열명 중 나머지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그 혼자만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히 멸시를 당하고 있던 민족이었습니다. 원래는 같은 이스라엘의 핏줄이었지만, 나라가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들에 의하여 망한 후에, 북조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일부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하여 생긴 혼합 민족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 받고 돌아왔던 순수한 유대인들은 이들을 자기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포로 해방 이후에도 구약 말씀이 계속 전수되었고 재건된 성전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메시아 소망까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에 비해서 영적으로 훨씬 더 많고 좋은 것들을 누리고 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유대인 출신 문둥병자 아홉 명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몰랐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은혜 귀한 줄을 모르는 인간의 악한 버릇이 여기서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던 그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오히려 크게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가득 차 있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유대인 자기네들만 제대로 섬긴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거부감 따위가 쉽게 들만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병 고침을 받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그 사마리아인만 돌아와서 감사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모르는 것은 결코 받은 은혜가 없거나 적어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받은 은혜에 너무 배부른 까닭에 감사드릴 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아니면 적게 받았다는 불만감에 항상 파묻혀 있는 까닭에 감사라는 영적 감동이 그 심령에 아예 자리 잡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 이 자유로운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하나님께 진정 감사드릴 제목이 없다는 사람은 이 양자에 다 해당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지키고 있지만 실상 ‘보리 추수’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식생활에 풍요로운 시대에 살면서도,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길 줄 모른다면 이 얼마나 배부른 철면피 인생이겠습니까? 좀 경기가 나쁘다 해도 적어도 굶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고, 이제는 공산독재나 군사독재의 공포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진 사회에 살면서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그 기도에 감사는 한 마디도 없고 그저 ‘이것저것 주십사’라는 욕심만 나열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철부지 교인이겠습니까?

우리는 적게 받았다고 생각될 때에도 크게 감사드릴 줄을 알아야 합니다. 혹 모자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도 오히려 크게 감사드리는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실상은 결코 적게 받은 인생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리 감사드려도 한이 없을 풍성한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앙생활 처음 시작할 때일수록 ‘온전한’ 감사드리는 것부터 익혀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 18절과 19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구원 선포를 내려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마리아인이 나타내 보인 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그저 ‘감사’에만 국한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일련의 모든 과정을 두고 그의 ‘믿음’, 그것도 ‘확실히 구원받을만한 참된 믿음’이 나타난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여기 18절에서 예수님께서 확인하고 계시는 바이며, 실제로 15절 하반절에 보면, 그가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하여 돌아오던 도중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밝히고 있는 대로입니다.

그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자기 몸이 낫게 된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자기의 감사를 표현할만한 어떤 제물도 돈도 수중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길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심령과 그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이 그처럼 극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알았다는 것은 실로 그의 신앙이 진실하고 깊은 것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원래 문둥병자들은 제사에 참석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전 출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처럼 유대인들에게 멸시 당하던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냥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흥분되는 순간에도 그 영혼 속에서 그야말로 반사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작용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그 몸은 공예배에 참석 못할 형편이었고 그 신분은 성전 출입도 허락되지 못한 처지였지만, 그의 심령은 그처럼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성령의 전이 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 것’ - 이것은 참된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영적 반응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할 줄 아는 것을 보니 네게는 구원받을만한 참된 믿음이 있다.’라고 확증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향하여 어느 정도의 믿음이 발휘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 ‘예수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겸손과 경외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자기네들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그 기적적인 능력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더러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하셨을 때, 아직 병은 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따라 제사장에게로 가기 시작했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까지도 발휘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열 명이 처음에는 다같이 상당한 수준의 신앙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동일하지 못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 열 문둥병자들 중에서 오직 한 명만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가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할 줄을 알고 몰랐던 그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감사는 반드시 처음부터 똑바로 배워야 할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조금 주셨다 할 때 그저 제 혼자 좋아서 난리를 치는 것이나, 혹은 목사 앞에서 자기 기도가 응답받았다고 떠들어 대며 자랑하는 것도 사실은 참된 감사의 자세는 아닙니다. 오직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자만이, 그 감사 생활을 통하여 진정 구원 얻는 참된 신앙에까지 자라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 출석도 하고 다른 교회 봉사 생활도 좀 하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이와 같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감사 생활을 할 줄 모르고 있다면, 그 교인의 신앙이란 것은 지극히 약한 것이며 곧 넘어질 수밖에 없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감사는 사실 우리가 제일 쉽게 배울 수 있는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무슨 특별한 교리공부를 받지 않더라도, 초신자 때부터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예의와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믿기 전에 불신 사회에서 살 때에도 적어도 남에게 감사할 줄 아는 경험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신자가 되면 그 감사의 대상이 ‘모든 경우에 오직 하나님께’로 바뀔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온전한 감사 생활을 배움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관계를 체험하고, 결국에는 그와 같은 감사 생활을 통하여 구원 얻을 참된 신앙을 확고부동하게 붙잡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열 명 중에 단 한 명만 감사드릴 줄 알았습니다. 그 비율은 실상 오늘날에도 그리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소원하는 바가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져야만 감사 제목이 될 것으로 아는 ‘아홉’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곁에 있는 남에 비해서 적게 받았다는 불만에 항상 잠겨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좋은 것을 베풀어 주셔도 여전히 무감각한 ‘아홉’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들은 감사의 제사를 드릴 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르게 되며 그 결과 참된 신앙에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마는 것입니다.

감사란 사람 사이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예의인데,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모른다면 그것은 실로 크고 중한 죄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리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자기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이라면 결코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세상 사람에게는 좋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께 진정 감사드릴 줄 모른다면 그는 오로지 배은망덕한 악인일 따름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물어 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는 것은, 결코 감사드릴만한 은혜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평범한 날과 범상한 일 가운데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남보다 적게 받은 것처럼 보일 때에도 오히려 더욱 크게 감사드리며, 이처럼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 돌리는 생활을 통하여 끝내 영생 구원에 이르는 참된 신앙을 다져 나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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