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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는 자의 승리 (창 50:15~21, 롬 14:10-13, 요 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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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창세기 50: 15 ~ 21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서신서 말씀: 로마서 14: 10 ~ 13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복음서 말씀: 요한복음 8: 3 ~ 11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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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어드린 구약의 말씀에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고, 신약의 말씀에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은총을 주시며,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성서를 읽은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에서만 아니라, 세계 종교 차원에서도 믿음의 조상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브라함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스라엘만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이슬람 신도인 아랍 사람들도 다 같은 대답을 합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공통적인 신앙의 조상인데, 아브라함의 자식들부터는 갈라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후손이고, 아랍 사람들은 이삭의 배다른 형제 이스마엘의 후손들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먼저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해서 고민하다가, 자기의 종인 이집트 출신 여자를 남편에게 붙여줍니다. 그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나중에 늦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아내 사라에게서 이삭을 얻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드리느냐면,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할아버지는 이삭이고,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요셉에게는 큰할아버지 뻘이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야곱이 낳은 열 두 아이 중에 마지막 늦게 얻은 아이였고, 여러 아내 중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난 자식이었기 때문에, 야곱은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그래서 열한 형제는 요셉을 시기 질투합니다. 곡식 단 열한 개가 자기 곡식 단에게 절을 했다는 이야기를 형들한테 하니, 형들은 기분이 나빴을 것이고, 해와 달―아버지, 어머니를 상징합니다만―그리고 별 열한 개가 자기한테 절하는 꿈을 꿨다는 이야기에 화도 났을 것입니다.
결국 형들은 요셉을 처치하기로 모의합니다. 들에서 죽일까?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 차라리 팔자. 그래서 동생을 팔고 그 대신에 집에 계신 아버지한테는 염소 수놈 하나를 잡아다가 요셉의 옷에다가 그 피를 묻혀서 갖다드리고는, 요셉이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자, 이렇게 해서 요셉은 이제 팔려갑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편애를 받았기로서니, 어찌 형제가 형제를 팝니까? 팔려가는 요셉의 가슴이 어땠겠습니까? 그때가 나이 열일곱 살 때입니다. 이집트에 팔려가서 이집트 왕실의 경호실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누가 요셉을 샀느냐 하면, 이스마엘의 후손인 상인이 이삭의 직계후손인 요셉을 산 것입니다. 그러고서 이집트에 팔아먹습니다. 이 이야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정통파인 한 후손이 이스마엘 족속의 상인을 통해서 이집트에 팔려갑니다. 유대인과 아랍인에게는 이것은 보통 이야기가 아니고 심각한 민족적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기 조상들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팔려가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해몽의 내용은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었고, 요셉은 왕에게 7년 동안 흉년이 들 테니, 그전에 있을 풍년 7년을 잘 관리해서 흉년에 대비하기를 권합니다. 이 일로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판 형님들, 아버지, 어머니까지 다 이집트로 불러다가 흉년을 피하게 하고 새로운 둥지를 틀게 만듭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스라엘이 먹을 것이 없어서, 정말 가난해서 지치고 지쳐서, 요셉을 통해서 전부 이주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동입니다.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을 대변하는데 열두 지파가 이동했으니,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한 것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꾸로 보면 이집트에서 4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된 시작입니다.

하여튼 요셉은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자기 민족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아버지 야곱이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형제들 간의 내재했던 갈등이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형제간에 우애가 없고, 않고 서로 갈등하며 산 경우에는, 부모가 죽으면 재산 싸움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가정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사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권위적인 한 체제가 무너진 뒤에는 갈등과 대립 속에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요셉의 형들 고민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안 계시니 요셉이 자신들을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아버지의 유언장을 공개합니다. “아들아, 형들이 너를 팔았지만 용서해라.” 이걸 가지고 요셉을 설득합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말합니다. “아우님,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요.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아우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듯이 당신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성서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만, 동생 앞에서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고 합니다. 무슨 눈물 같습니까? 받은 대로 갚아주고 싶은데, 복수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속이 터져서 흘리는 눈물이었을 것 같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형들은 계속해서 빕니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요셉의 분노의 눈물은 맺힌 마음을 푸는 용서의 눈물로 바뀐 것 같습니다.

요셉이 말합니다. “형님들, 내가 하나님이라도 대신할 것 같습니까?”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당신들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은 나한테는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와 울어도 나는 당신들을 죽일 권한은 없습니다. 당신들을 죽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 나는 하나님 노릇할 수 없습니다. 왜? 나는 형들을 죽인 다음에 다시 살려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사실 요셉이 흘린 눈물은 기가 막힌 눈물입니다. 살아가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 일 겪으시죠? 한번 후려치고 싶었던 적 많죠? 가슴에 멍이 든 일 많죠? 그래도 용서해야 때 가슴은 미어터집니다. 그래서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고요, 가슴이 터져서 흐르는 피눈물입니다.

요셉이 결단합니다. 마음은 죽이고 싶지만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포기하고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요셉의 해석입니다. “형님들은 나를 팔아먹고 나한테 악행을 범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행을 완전히 뒤집어서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나를 총리대신이 되게 하셔서 형님들과 온 이스라엘을 흉년에서 피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범한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인간이 생각지 못한 선한 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악을 악으로 갚는 권한은 없습니다. 악을 하나님의 선으로 갚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과 역사에 모든 걸 맡기는 인간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형들을 다 죽였다면 아마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요셉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죽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화해하고 살아야 하며, 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아야 하느냐면, 악을 악으로 갚으면 평생 악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악에 보복하기 위해 늘 분노와 복수심 속에서 살면 분노의 쇠사슬에 자기가 묶여 사는 것입니다.

진실로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진실로 해방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용서하십시오. 매듭을 스스로 푸십시오. 자신의 해방, 그것이 중요하다면 용서하십시오. 분노가 너무 커서 용서하기 힘들다면,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오늘 읽은 로마서 말씀은 이렇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도 되시고 죽은 자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 앞에 죽음으로라도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들 앞에 걸림돌을 놓지 마십시오.” 용서하지 않는 것, 형제를 비판하는 것은 걸림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진실로 복되게 살고 싶으면, 좌절, 분노, 악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요? 왜? 사랑하지 않고는 내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를 안다면, 요셉처럼 하나님 때문에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 용서하였기 때문에 형제들도 살았고 요셉 자신도 살았습니다. 하나님 붙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며 사십시오.

이 용서의 정신이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 이야기에서도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율법의 권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가능한 대답은 둘 중 하나입니다. “법대로 죽여라.” 아니면 “용서해라.” 죽이라고 하면 로마법에 위반이 됩니다. 당시 로마 치하에서 죽이라는 심판과 명령은 로마 황제의 권위를 위임받은 총독만이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한 사형 선고는 총독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안 그랬다면 유대인들끼리 알아서 처리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이라고 하면 로마법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그냥 두라고 하면, 간음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는 모세의 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로마법을 위반하든지, 모세의 법을 위반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경우든지 예수께서는 법 위반자가 되십니다. 예수께 거는 기대가 무너지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긴박한 순간입니다. 여자는 죄인으로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서 있고,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다그칩니다. “어떻게 할까요?” 성서를 보면 사람들이 다그치는데, 예수께서는 땅에다 글자를 쓰고 계셨습니다.

땅에 글자를 쓴 것은 무슨 행위입니까? 예레미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을 버리는 사람마다 수치를 당하고 주님을 떠나는 사람마다 땅바닥에 쓴 이름처럼 지워지고 맙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땅바닥에 쓴 글자는 지워지고 잊혀진다는 뜻입니다. 저주받을 자들이여, 죽을 자들이여, 죄인들이여 하고 땅바닥에 글을 써도, 죄상을 낱낱이 기록해 놓아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면 그 기록은 다 덮이고 지워지고 맙니다. 무슨 뜻입니까? 고소하되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땅에다 글을 쓰셨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쓰셨을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여, 그대는 죄인이로다. 그러나 이 여인만이 죄인이 아니다. 이 여인과 간음한 남자는 누구냐? 왜 그는 안 데려왔느냐?”라고 썼을 것입니다. 남자도 죄인입니다. 그 남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 눈에는 서기관이든 바리새파 사람이든 다 죄인입니다. 그 죄인들을 다 땅바닥에 쓰셨을 것입니다.

그러고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죄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부터 먼저 돌을 들어서 이 여자를 쳐라.” 그랬더니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다 사라지고 예수와 여인만 남았습니다. “여자여,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느냐?” “다 없습니다.” “생명을 주고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는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자를 돌려보내십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공통적으로 고백합니다. 사람을 죽일 권한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살려내야 합니다. 죽을 사람이라도 살려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죽이고 싶은가? 죽여 보아라. 그러나 네가 죽여서 부활시킬 수 있을 때만 죽여라.” 그것은 죽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라 하더라도 다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사실 요셉이나 이 여인은 완전히 별개의 사람이지만,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기뻐하겠지만, 용서한 사람의 기쁨과 행복은 그것에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중적인 잣대가 적용되는 사회입니다. 자기 죄는 숨겨놓고 드러난 죄인을 규탄하고 심판하려고 덤비는 우리 사회의 풍조, 개혁을 논하면서도 자기의 개혁은 말하지 않고 남의 개혁만 외치는 풍토, 자기도 죄인이면서 남의 죄만 들치는 풍조가 이 사회에 만연합니다. 우리는 다 회개하고 개혁하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중 잣대는 남녀 사이에도 있습니다. 유대 땅에서처럼 여성은 마구 짓밟혀도 되고 남성은 보호받아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간음한 여인은 데려왔지만, 그 파트너인 남자는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아내를 범하지 말라는 말도 사실은 “이웃”이라고 지칭되는 그 남자의 소유물인 여자를, 그러니까 남자의 소유권을 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부당한 사회에서 죄를 범한 여인을 데려왔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가해자도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어린 딸들, 요즘 사고가 많이 납니다. 우리가 낳은 이 딸들이 순결하기를 얼마나 바라십니까? 그런데 왜 십대 아이들의 원조교제가 이토록 번성합니까? 그 뒤에는 그들을 원조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왜 어른들이 자기 딸은 사랑하면서 남의 딸은 짓밟습니까? 그래 놓고서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까? 내 식구는 고통당하면 안 되지만, 남의 식구는 고통당하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습니까? 이념의 이름으로, 체제의 이름으로, 사고방식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이런 이중 잣대를 거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죄인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단죄 받은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단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생명을 은혜로 받았으니, 다시는 죄 짓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결단과 용기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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