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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과 사랑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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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원 목사(대광교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다루어야 하고, 가장 오랜 기간동안, 가장 많은 저자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방대한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하기가 쉽지 않고, 이 말씀을 전부 이해하는 것도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방대한 성경을 요약하고, 축소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로 시작해서,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으로 끝나는 십계명이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십계명은 1부터 4계명까지 하나님사랑에 대하여, 5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사랑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또 요약하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또 간단히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사랑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기독교의 배지, 마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랑 없이 하나님을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 교회를 나타내거나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것 다 갖추어도 사랑이 없으면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결국 교회에 사랑 없는 모습과 행동이 성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과 세상의 사랑은 차이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를까요? 본문은 바로 성경의 사랑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좀더 깊이 살펴보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1절에서 이것을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있었고, 특히 방언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방언은 말입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그날부터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부터 주신 고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어가 가진 놀라운 힘을 압니다. 하나님이 지니신 강력한 능력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살리고, 주님의 말씀이 소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가진 위대한 힘을 압니다.

  말은 설명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의견, 나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말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는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드리기 위해, 또 서로 다른 언어를 통역이나 해석하지 않고 알아듣기 위해 방언을 주셨습니다. 그 방언으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방언으로 다른 언어를 자기의 말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 이 방언이 남발하여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방언을 주신 참된 목적은 사라지고 방언이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 오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방언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사랑은 방언,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은사를 받아 방언을 해도,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 특히 자기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언어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이 세상을 지배할 만큼 수많은 말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은 많은데 행동은 뒤따르지 않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책임을 지지는 않습니다. 말해놓고 ‘아니면 말고’ 식입니다. 내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이 말이 한 사람의 인생과 삶에 어떤 결정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고,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이 없어서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서양사람들이 늘 자기 아내와 남편에게 ‘I love you, honey' 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라도, 아니 하루에 몇 번이라도 이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가정에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사랑의 말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 세상에, 가정에, 공동체에 말이 없어서, 말을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을 비판하는 것 중에 ‘말’을 빼놓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말 잘한다, 천국에는 입만 가겠다, 물에 빠지면 입만 뜨겠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이런 비판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말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행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5%가 기독교인임에도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나, 혹은 살면서 종종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이마를 입에 댑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내 머리로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입에다 키스를 합니다. 이것은 당신에 대해 항상 좋은 말만을 하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셋째 왼쪽과 오른쪽으로 힘있게 끌어안습니다. 이것은 좌우에서 항상 당신을 보호하겠다는 뜻이고, 넷째 손을 잡고 흔듭니다. 이것은 이제 당신의 필요를 알고 돕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숙여 발을 가만히 잡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 옛날, 그들은 말 대신 이런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의 사랑은 말만이 아닙니다. 행동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거룩하고 존귀하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천 마디의 말보다, 진실한 행동이 큰 힘을 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행동의 사랑을 보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예언은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입니다. 비밀은 남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식은 남이 갖지 않는 탁월한 이해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자기만이 알고, 체험한 신앙입니다. 이런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통찰력이 있고, 모든 지식과 비밀을 깨닫는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사랑이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실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제요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축구를 해설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축구를 제일 잘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때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을 알고, 되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설가를 한번 그라운드에 내 보내 보십시오. 5분도 제대로 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설도 선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만 해서는 안됩니다. 정치학박사가 정치를 잘 할 것 같습니까? 우리 나라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 모든 국회의원들이 정치이론을 배우면 나아 질 것 같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론으로는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해서 모두 설교를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과 실제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있어서 가장 우리를 감격시킨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주님은 사랑을 이론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셨습니다. 지금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면 먼저 살려주셨습니다. 굶주려 허기진 사람에게는 먼저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삶에 지친 사람에게는 곁에서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었습니다. 인생의 깊은 고민과 문제를 안고 찾아 온 사람과는 밤새도록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섬기는 삶을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 발은 더러운 발, 냄새나는 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발입니다. 조금 있으면 24개의 발이 어떻게 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결코 인간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경험이 선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살아보아야 그 사람을 압니다. 겪어보아야 그 사람됨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해 보아야 사랑을 압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면서 우리를 향한 귀하고 놀라운 사랑을 좀더 깊이 알아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사랑은 조건이 아닙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왜 여기에서 바울이 구제를 언급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교인들이 이렇게 구제하고, 도와주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아마도 지금 바울은 교인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자신의 과거의 삶과 관련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자기 몸을 불살라 종교적 열정으로 살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제하기를 좋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제하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자기 과시, 욕심, 자랑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몸을 불사르는 열정으로 종교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구제나 종교가 자기 기준, 자기 감정, 자기 조건이었습니다. 자기 조건에 따라 어떤 때는 자기 몸을 불살라 줄 정도로 열심히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와 관계가 없으면 원수로 대합니다. 그들은 조건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그것을 참 사랑에 맞추어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감정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분으로도 말고, 조건으로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조건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내 기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굳은 의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굳게 지키며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는 헬라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에로스’요, 다른 하나는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는 인간의 사랑이고,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에로스는 쉽게 말해서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쁘니까 사랑하고, 아름다우니까 사랑하고, 사랑할 이유와 조건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에로스에서는 '욕망이 사랑의 원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욕망이 있으니까 사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에로스와 전혀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에로스에서는 욕망이 사랑의 원인이라면, 아가페는 사랑이 욕망의 원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욕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에로스는 조건이 있기에 사랑하고, 아가페는 조건이 없어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에로스는 ‘because(때문에)’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아가페는 ‘in spite of(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진정한 사랑은 감정이나 조건이 우선된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의지의 결단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명령될 수 없는데 비해서 사랑은 명령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슬퍼하시오, 기뻐하시오’ 라고 명령해서 슬퍼지거나 기뻐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명령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랑을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의지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조건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조건으로 사랑하는 것을 못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관심을 주고, 호의를 베푸는데 그것을 멀리할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이런 사랑은 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은 그 조건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결코 사랑스럽지 않아도, 심지어는 원수가 되어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조건이나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조건을 보고 사랑했다면 우리 중 아무도 이 은혜의 자리에 나올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과 심판을 받아도 할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못해도 멀리하지 않았고, 우리의 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가페요, 성경의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결코 조건이 아닙니다. 자격이 없어도, 받은 것이 없어도, 결과와 관계없이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은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많은데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어 탄식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참 사랑을 몰라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참 사랑을 가지고 삶의 현장으로 갑니다. 가정으로, 일터로, 그리고 농촌으로도 갑니다. 그 사랑을 위해 휴가도 반납하고, 잠을 설치고, 땀도 흘리고, 열정으로 헌신합니다. 그만큼 가치 있고 보람있는 일입니다. 나를 향한 아가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삶에서 온전히 실천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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