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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들의 기도와 영성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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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명 목사(안산빛나교회)

세상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우리 모두가 너무도 사랑하고 사모하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들었던 별칭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삶의 목표도, 살아야 하는 이유도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참 그리스도인라면 그 이름에 맞는 그리스도의 사람,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 부하가운데 자기와 같은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를 두고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부대에서 겁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은 그 병사를 향해서 분명하게 명령했습니다.“너는 너의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 이름에 걸맞게 삶의 태도를 바꾸던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했답니다.
여러분의 말하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우리들의 말속에 용서와 사랑이 은혜가 묻어납니까?
여러분의 생각하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하루의 생각 속에 그리스도가 묵상되어지는 지요?

한 목사님의 고백이 생각이 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 제주도 여행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관광코스 중에 유채꽃 광장에 가서 만발한 유채꽃을 구경하는데 차에서 함께 내린 성도들이 유채꽃에 온통 빠져 사진들을 찢기에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한 집사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거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를“예수님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용서 해 주세요  유채꽃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5분 동안이나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그 기도소리를 들으며 아침부터 관광지에 마음을 둔 채 하루 종일 예수님 생각도 나지 않았던 목사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했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삶의 시선에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떠하십니까?
무엇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아니 오늘의 삶속에 그리스도가 배제되어 있다면 우리 모두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예수원의 토레이 신부는 이렇게 그의 삶의 자세를 정리해서 표현했습니다.“나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말하는 것을 삼가 해 왔고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중요한 결정을 늘 미루어 왔다”고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안산빛나교회 성도들에게 사랑과 성령의 능력을 더하사 우리 모두를 그 이름에 걸맞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시기를 소원해 봅니다. 오늘 본문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기를 사모하는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기도의 내용은 어떠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이여! 그대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여 그대는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첫째:  세상을 흔드는 사도들과 성도들의 기도와 영성
저들의 하는 기도는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한자리에서 마음을 모두어 부르짖는 처절한 기도였습니다. 저들은 위기 속에서 기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모든 환경속에서 그것이 순경이든 역경이든 먼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초대교회에는 엄청난 역사가 있었습니다. 전도의 열풍, 부흥의 열풍이 불면서 하루 3천, 5천명씩 성도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구원의 사람들만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나면서 앉은뱅이었던 사람이 예수의 이름 앞에 벌떡 일어나는 등 기사의 표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약속가운데 하늘로부터 임한 은혜의 성령은 다락방을 충만케 하시더니‘성령받은 사람들을 통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세상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상을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약 하늘로부터 임한 은혜의 성령이 다락방 안에서만, 오늘의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닙니다. 차고 넘쳐야 진정한 은혜입니다. 흘러 세상을 향해야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요 은혜입니다.

당시 사도들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 세상을 향해 흘러넘치기를 원하셨던 성령님의 은혜는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 세상에 흘러넘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 사도들을 통해 초대교회성도들을 통해 세상을 흔들었던 성령은 오늘도 우리 안산빛나교회를 통해 세상을 흔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은혜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만 우리교회 안에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흘러넘치는 물결마다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흥의 열풍 앞에 사단의 역사가 잠잠할 리 없습니다. 흘러넘치는 복음의 물결 앞에 세상이 그냥 흔들거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기의 부하격인 사두개인들을 데리고 몰려가서 흘러넘치는 복음의 물결 가장 중심부에 있는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사도들의 전도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은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하늘나라로 인도 되었는데 반대로 이 놀라운 사명을 감당한 베드로와 요한은 감옥에 갇히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복음의 역사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혀 썩는 것으로 표현 하신 일이 있습니다. 고난은 여전히 고난입니다.
예수의 이름이라 해도 매 맞는 일이 절대로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감옥에 갇히는 고통스러운 경험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견디기 어려운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려 함에는 누군가가 희생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아무런 희생의 대가없이 결코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당한 고통은 오늘 교회가 그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짐을 지고 먼저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을 보여 줍니다.

아무래도 평신도 보다는 제직이 좀 더 짐을 지고 고난과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제직보다는 안수집사나 권사가 더 큰 짐을 지고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수집사나 권사보다는 장로가 좀 더 많은 짐과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양떼를 맡은 목사 된 사역자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고난과 희생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삽니다.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그러나 오늘 대부분의 교회의 모습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지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고난과 희생이 아니라 대접만 받으려 합니다. 고난과 희생은 지불하지 않고 직분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주님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교회의 모범인 초대교회도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수하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두 사도를 향한 위협과 협박을 하다가 급기야는 타협을 요구합니다.
행4:17-18절에 보면 ‘이것이 민간에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민간에게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말라고 타협을 요구합니다. 그리하면 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두 사도가 어리석은 범인처럼 풀려나는 것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마귀는 타협앞에 감사하며 넘어 갔을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고 사명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타협이 훨씬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외침을 보십시오
행 4:19-20절에 보니‘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를 골라 듣습니다. 앉아서 계산이나 하지 않습니다. 앉아서 앞날이나 염려하며 자신을 합리화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내 던져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합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소원이니 마4:17절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전도는 예수님의 삶이었으니 막1:38절에 이르시되“우리가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느니라”
또한 전도는 예수님의 유언이니 마28: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전도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이기도 하니“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했습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희생을 기본으로 하니“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무엇보다 전도는 영적전쟁이니 마귀의 자녀 되었던 자를 빼앗아 하나님 자녀로 삼는 일이요 세상에 속한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지옥에 속했던 사람을 천국백성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전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습니까? 그런데 마귀가 가만히 있을까요?
온갖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타협하자 합니다. 내일부터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말고 세상의 소리를 들으라고 합니다.
전도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지옥으로 걸어가고 있는 걸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위협하던 마귀는 적당히 타협안을 제시하며 놓아 줍니다.
이때 사도들은 기도의 자리에 온 것입니다. 기도함으로 풀려나니 가족에게로 간 것이 아니라 우선 좀 쉬어야 겠다 하지 않습니다. 먼저 기도의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기도를 우선 한 것을 보는 이들은 제대로 은혜를 받은 것이요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만나 상담하며 묻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사도들은 잠시 전도를 중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를 기다린 것도 아닙니다. 주저 하지 않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저들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 더 큰 사람을 만나 인간적 이해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향하였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 앞에서는 먼저 하나님을 찾는 자요, 기도하는 자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로 잘 훈련되어진 사람입니다.
그저 무슨 일 앞에 인간적으로 뛰어 다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순경 앞에서도 역경 앞에서도 하나님을 부르는 자로 길들여지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기도를 우선하는 사도들의 영성
사도들의 기도를 봅시다. 일심으로 기도합니다. 전폭적으로 하늘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참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요 함께 기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부르짖게 됩니다. 머리의 기도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기도요 성령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소리 높혀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 삼창하며 기도합시다 하면 기도 삼창합니다. 그때 주여 소리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산에서 야호는 되어도 주여는 목소리가 크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필요가 있냐합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부르짖어 기도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영적 싸움입니다. 먼저 기도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도는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는 방법입니다.
부르짖어 기도 하십시오 주님도 땀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사람이 너무 좋으면 소리 지르며 기뻐합니다.
사람이 슬픔이 극에 달하면 소리 지르며 우는 것입니다. 부모가 좋고 자식이 기가 막히게 죽었 버리면 부르짖는 것입니다. 급한 일이 있을 때도 소리를 지릅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피가 터졌는데 진찰권을 끊고 어떻게 번호표를 자기 순서가 오기를 기다립니까?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 구해달라기 전 서로 통성명부터 하자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응급실을 직행하거나 구해 달라고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사랑하는 여러분!
기가 막힌 일을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으십시오 그 소리를 듣는 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요즘 우리 막내가 학교에서 수시로 전화를 합니다. 어떻게 수신자 부담을 알았는지 수시로 전화합니다. “아빠!” “응! 그래 아들 목소릴 들려주어서 고마워”“아빠 엄마보고 맛있는 것 저녁에 해달라고 그래 알았지?”수시로 전화 오는 막내의 전화가 귀찮지가 않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내 자식이기 때문이요 내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환경은 하나님을 기도로 만나고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으십니까?

셋째: 세상에 굴하지 않는 기도와 영성
기도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감격적입니다.
저들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여 이런 시험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결해 달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을 일격에 없애 달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무어라 기도했습니까?
4장 29절에 보면 “주여 이제로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라고 기도합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원하심을 붙들고 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위해 구원받아야 될 영혼들을 위해 기도 한 것입니다.
저들은 위협과 핍박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의 기도요 영성입니다. 문제를 만나고 시험을 만났을 때에는 그리스도인의 적극성 바로 자세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들은 온상을 요구합니다. 무사태평과 안일과 만사 형통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작은 시험 작은 문제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문제 앞에 시험 앞에 너무 겁을 먹고 있습니다.
마귀는 어차피 택한 백성이라도 넘어 트리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일이 없는 온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시험도 환난도 없는 무사 안일한 상황에서 허약하게 자라는 그런 자녀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콩나물 그리스도인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뿌리도 박지 못하고 가지도 없으니 열매도 없고 비바람에 고되게 마주서서 신앙생활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큰 교회의 보자가가 덮어주는 그늘에 숨어서 가끔 강단에서 흘러내리는 은혜의 물을 받기 위해 얼굴이나 내밀고 세상이나 문제 앞에는 감히 고개도 내밀지 못하는 허약한 그리스도인들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 말이다.
아무튼 이런 사람은 무슨 말 한마디만 들어도 잠을 못 잡니다. 조그만 문제 앞에 세상 짐을 다 진 듯 살아갑니다. 다 뿌리 없고 연약한 콩나물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보자기에 뒤집어 씌워 있기를 원하고 주일에만 예배드리고 그때에도 물만 주면 고마워하는 콩나물 크리스챤입니다.

우리 안산빛나교회 성도들은 그래서는 아니됩니다.
“ 주님! 지금 내 앞에 있는 시련도 역경도 좋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문제나 박해도 좋습니다. 다만 구하옵소서 사자굴 앞에 다니엘처럼 풀무 앞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혹시 믿음으로 고통을 당하는 성도 있습니까? 남몰래 눈물 흘리며 육신생활 지치도록 역경 중에 있는 분 있습니까? 이런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무엇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하나 우리 온 성도가 교회에서 해야 할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전도를 위해 이런 기사와 표적이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기도 외에는 아무런 역사나 기적이 일어날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역사를 맛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론: 기도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도 성도도 성령충만 한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챨스피니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 죄보다 기독교인이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인이다”
토리라는 사람은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성도의 선택이 아닙니다. 옵션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전부입니다.
저들은 충만하게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사단의 협박앞에 피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저들 안에는 주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저들 안에는 구원받아 야 될 영혼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간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보낸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이제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보냅니다. 또한 우리가 보냄을 받은 곳은 어디 입니까?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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