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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어찌하여 못하였나이까?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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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성목사 (멋진교회)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언제나 인기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런 프로그램이 나오면 딱 멈추게 됩니다. 기인열전, 진기명기,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신기한 재능들을 보여 줍니다. 1 분 만에 자장면 10 그릇을 먹어 치우는 사람, 고무장갑을 입으로 불어 터트리는 사람, 맨 주먹으로 솥뚜껑을 깨뜨리는 사람··· 모두 흔히 볼 수 없는 구경거리들입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통의 한계를 넘는 기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기인 중에 한 분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어떤 병도 고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도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기도 했습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이고 남긴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마술 같은 눈속임이 아니라 실제 나타난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머무는 곳에는 이런 기이한 능력을 보려는 구경꾼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랐습니다. 특히 12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많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분적으로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런 능력을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도 병자를 고쳤고,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능력의 일부를 흉내 내면서 우쭐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산에 오르신 중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과 그 아비가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자, 제자들에게 대신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보니까 심각합니다. 귀신이 발작을 하게 하면 이 아이는 어디서든 거꾸러집니다.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얼굴빛이 파리해집니다. 간질 증세를 보였습니다. 어떤 때는 불을 피워 놓은 곳에서 발작을 할 때도 있었고, 물에 뛰어 들기도 했습니다. 몸에는 화상 흉터가 여기저기 있었을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뇌에 이상이 있었고,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듣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증세는 어렸을 때부터였습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이 함께 이 아들을 붙잡고 합심해서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귀신 들림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구경하던 서기관들과 제자들이 변론이 붙었습니다. 능력은 없었고 말만 무성한 싸움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참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소란한 이유를 알게 된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를 탓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곁에 안 계실 때도 이런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19 절에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이 아버지는 다시 아들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 아버지는 제자들을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붙어 있던 귀신이 예수님을 보더니 아이를 다시 발작을 일으킵니다. 아이가 땅에 엎드러져 경련을 하면서 거품을 흘렸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애가 탄 이 아비는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시가 도와주옵소서.”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이 아버지는 제자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실패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문가에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실례입니다.

길가에 자동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마침 운전자는 자동차 정비공이었습니다. 간단하게 해결할 줄로 여기고 보닛을 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고장의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던 한 자동차가 섰습니다. 도와주겠다며 차에서 내린 사람은 노인이었습니다. 자동차 정비공은 노인을 보더니 비웃었습니다. “놔두십시오. 제가 차에 대해선 전문가인데, 이 차는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 노인은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이것저것 만지는 것 같더니 금방 시동이 걸렸습니다. 깜짝 놀라 쳐다보는데 노인이 말했습니다. “저는 이 차를 만든 포드 1 세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는 훌쩍 떠났습니다.
자동차를 만든 포드 1 세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례를 범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병도 고치십니다. 예수님도 물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고 고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대답하시길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까딱하면 예수님 마음이 상해서 은혜를 못 입게 될 것 같았습니다. 곧 이 아비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를 잘해야 합니다. 기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갖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데 억지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이 사람처럼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 아들의 병 고침은 아버지의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즉각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아이에게 있는 귀신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가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이 귀신은 장애를 가진 귀신입니다. 자기가 말 못하고 못 듣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똑같이 해코지 합니다. 이게 귀신의 심보입니다. 귀신은 자기가 멸망당하니까 남들을 끌어 함께 죽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는 방법은 꾸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권세를 이기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 앞에 귀신은 언제나 벌벌 떱니다. 꼼짝 못합니다.

그런데 듣지 못하는 귀신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붙어있던 귀신은 소리를 지르면서 나갔습니다. 말을 못하던 귀신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귀신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입니다. 귀신도 병에 걸립니까? 그럼 예수님이 이 귀신의 병을 고친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이건 병 걸린 것도, 장애도 아닙니다.

말 안하고 못 듣는 게 뭡니까? 삐진 것입니다. 삐지는 첫 번째 증세가 말 안하고 못들은 척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심보가 못되어서 무슨 일이든 삐딱하게 봅니다.
누구랑 삐쳐서 말 안하고,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 하면 그건 귀신의 작전에 넘어간 것입니다. 왕따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패거리를 만들어 함께 따돌리는 것입니다. 합치면 힘이 점점 커집니다. 괴롭히는 강도가 점점 세집니다. 귀신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자기 같은 못된 심보를 심어 놓습니다.

귀신 들린 게 뭡니까? 귀신의 심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쁜 마음, 못된 마음 이게 다 귀신이 심어 놓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귀신은 삐지게 만듭니다. 주의 일을 방해하는 최고의 전술입니다. 누구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주의 일을 중단한다면 귀신이 이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왕따가 일어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여러분! 삐지지 맙시다. 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 교회가 분열됩니다. 목사와 장로가 싸우면 교회가 갈라집니다. 삐지는 마음은 상대방의 허물을 덮지 못하는 좁은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사랑도 그 앞에는 없고, 은혜도 없습니다. 오직 잘난 자존심만 있습니다.
누구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본 때를 보여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시도하면 사단만 좋아합니다. 다만 사랑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와 말 하지 않는 사이가 되면 그것이 귀신의 장난입니다. 왜 교회가 이일을 민감하고 중요하게 다루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새신자들 때문입니다. 새신자들의 눈에 이런 모습이 비치면 그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어쩌다 교회에서 누구랑 삐치게 되면 새신자의 영혼에 상처를 주게 되는 줄 알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귀신은 벙어리 되고, 듣지 못하는 귀신이었지만, 예수님의 명령을 잘 듣고 있었고, 소리를 지를 줄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엄한 꾸짖음에 놀라 나간 것입니다.

귀신이 나갈 때 경련이 심했고,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었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아비와 아이는 돌아갔고, 구경꾼들도 돌아갔습니다.

진짜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 쉬고 계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조용히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아까 있었던 해프닝으로 부끄러움을 당했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못하였나이까?'

세상에는 불가능이 있습니다.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은 많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 불가능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가능은 우리의 도전 정신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한계를 알고 쉽게 포기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벼룩은 높이뛰기 선수입니다. 보통은 20 센티는 다 뛸 수 있습니다. 어떤 벼룩들은 무려 30 센티를 뛸 수도 있습니다. 이 벼룩들을 10 센티 높이의 유리컵에 담고 뚜껑을 덮었습니다. 뛰던 벼룩들은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헤딩을 몇 번씩 한 벼룩들은 기껏해야 7-8 센티를 뛰었습니다. 두 시간 후 이 벼룩들을 유리컵에서 풀었습니다. 벼룩들은 밖에서도 계속 7-8 센티 이상은 뛰지를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기 한계를 정한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뛸 수 없다. 이런 벼룩의 근성을 비웃는 말이 생겼습니다. “뛰어야 벼룩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힘의 한계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계를 잘 알고 있지만, 우리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려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불치의 병에서 고침을 받으려면,

첫째, 그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19 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19 절 마지막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따라서 하십시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이 아이의 아버지는 처음에 누구에게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까? 예수님을 찾다가 안계시니까 제자들을 찾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못 고쳤습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잘못을 범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디를 찾아 갑니까? 교회를 찾습니까? 교회 나오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목사님을 찾아옵니다. 목사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면 예배를 드립니다. 두 세 사람 이상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에 나왔다는 것만 가지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문제가 해결되는 장소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하나님을 잘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은 만나러 온 사람들을 문 앞에서 대기하도록 막는 비서가 아닙니다. 누구나 원하면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이런 부탁을 종종 받습니다. 그러면 기도합니다. 이것은 성경대로 하는 것입니다. “너희 병든 자들아.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기도 부탁을 받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대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다만 기도의 심부름꾼입니다. 병은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직접 가지고 나오십시오. 주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둘째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믿음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용히 찾아 왔습니다. 아까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실패한 것이 창피하니까 조용히 찾아 왔습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홉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기도했는데 못했습니다. 처음 해본 일도 아니고 전에는 병자들을 기도로 고쳐 봤습니다. 귀신을 내쫓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6:7 말씀을 보면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 고 했습니다. 12 절 13 절을 보면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했습니다.

분명히 제자들이 능히 감당했던 일입니다. 경험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안 된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9 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바로 믿음입니다. 이 말씀은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현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도 그렇고, 아이의 아버지도 그렇고, 구경꾼들도 그렇고 믿음이 없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족했을까요? 아닙니다. 충분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전에는 제자들도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오늘의 현장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은 잘 조절해야 합니다. 믿음은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100% 순수한 신뢰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오래되면 변질됩니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던 믿음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한 것인 줄로 여깁니다.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빈번해 집니다.

지금 예수님도 안계십니다. 제자들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빠졌습니다. 평소에 대장 한번 못해보고 눌려 있던 아홉 명만 남았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없어도 나도 할 수 있다. 이럴 때 본때를 보여 주자.

우리가 실패할 때는 바로 교만한 마음이 깃들 때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실 때, 베드로도 없을 때 과시해 보려는 마음이 싹이 텄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과신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긴장하면서 지키지 않으면 허물어집니다. 사단은 우리의 믿음을 허물기 위해서 언제나 노리고 있습니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떠내려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려면 대비를 해야 합니다. 영적 전투를 각오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이 영적 전투가 치열한 곳입니다. 예수를 편하게 믿으려고 하면, 아무런 기적도 맛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손을 뻗어 합심기도를 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연마하는 것입니다. 굳세게 담금질을 해야 합니다. 믿음은 에베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방패입니다.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도 쓰여 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사단이 공격하지 못합니다. 공격해도 소용없습니다. 믿음은 바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든든한 도구입니다.

셋째로, 문제 해결의 비결은 기도입니다.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못했고, 오직 예수님 만 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조용히 찾아온 제자들에게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지막 29 절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공한 비결은 바로 기도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럼 제자들은 기도를 안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은 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이 아이를 고칠 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귀신을 향해서 꾸짖었을 뿐입니다. 죽은 것 같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킨 것 뿐 입니다.

그럼 기도가 비결이란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평소에 기도생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능력의 비결은 바로 평소의 기도의 삶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 마음이 찔립니다.
아마 예수님의 대답을 듣던 제자들도 마음이 찔렸을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주님은 감람산을 자주 찾으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바쁜 사역 중에도 짬만 나면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늘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은 귀신 앞에서 갑자기 기도하려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기도응답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것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쉬지 않고 늘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못합니다. 안합니다. 왜 오직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멋진교회 기도의 불을 붙여 봅시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끈입니다. 평소에 연락하지 않다가 무슨 부탁이 있을 때만 연락하니까 응답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얌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있어서 우직하고 미련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생일 때 두 아들에게서 카드를 받았습니다. 한 녀석은 아빠 걱정과 좋은 목사님 되실 것이라는 기대와 착한 아들이 되겠다는 내용입니다. 또 한 녀석의 카드에는 이미 자긴 착한 아들이라는 선언과 함께 뭘 사달라는 내용입니다. 이 목사님은 어느 녀석에게 더 마음이 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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