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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홍해 앞에서 (시 7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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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동안교회)

미국 역사에 해충 재해로 남부 일대의 목화가 전멸한 일이 있었습니다. 1895년 바구미(weevil)가 번져 앨라배마부터 텍사스까지 소위 목화지대가 전멸해버린 것입니다. 해충을 극복할 방법이 농부들에겐 없었습니다. 깊은 좌절과 절망만 찾아왔고 그저 땅이 저주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절망 가운데서도 믿음 하나로 다시 땅을 일구면서 바구미에 견딜 만한 작물을 이것저것 심어보며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20년이 지나지 않아 목화로 망해버렸던 이 땅은 세계 최대의 땅콩 생산지인 풍성한 땅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주 먹는 땅콩버터를 포함해서 땅콩을 재료로 만든 모든 음식들은 이 때 미국 남부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1919년 세계 최대 땅콩 생산지가 된 앨라배마 주의 엔터프라이즈 마을은 세계 땅콩 수도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농부들은 마을 법원 앞에 한때 절망과 좌절을 가져다주었던 바구미 벌레의 동상을 크게 만들어 놓고 동상 밑에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 준 바구미 벌레에게 감사한다’ 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해 저주 받은 땅이었지만 하나님 주신 거룩한 땅, 약속의 땅으로 믿고 다시 일어섰을 때는 축복의 땅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고통에 대해 설명하기를 ‘고통이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 하게 얽혀있어 보기에 나쁘다. 고통을 다만 괴로움이나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본다면 혼란하던 실들의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혼잡을 뚫고 아름다운 미래를 본다.’ 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를 미국 남부의 농민들은 재해를 겪으며 진실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고통과 아픔, 절망만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발견하면 고통에서 그치지 않고 더 큰 창조를 이루는데 동참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역사의 수많은 예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라크에서 너무나 헛되이 피살된 고 김선일 형제를 보며 슬픔을 넘어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통해 보도된 김선일 형제의 누이가 절규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절규, 분노, 슬픔 등이 담긴 한 장의 사진에는 많은 사연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누이의 모습은 누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고 우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민을 위해 수고하고 노력해야 할 정치인들은 자기 이익 앞에 국민의 생존문제는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두고, 그 결과로 이젠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의 자괴감은 이제 바닥까지 내려와 더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 이 형제의 피 값이 헛되이 끝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냄비 근성을 가진 우리 민족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리고, 다만 유족들만이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민족 위에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와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경고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오늘 함께 나눌 시편 77편은 극심한 환란이 계속됨으로 영혼까지 피폐해진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 절규하듯 부르짖는 노래입니다. 1절부터 9절까지의 내용은 개인적인 고통과 아픔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함께 읽은 10절 이후의 말씀에서는 민족적인 큰 아픔과 고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 핵문제, 이라크 파병, 노사분규, 경제적 어려움,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도대체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야 할지 혼란하기만 한 사회, 점점 소외되어 가는 중년이상의 세대와 방황하는 젊은이 등 총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마음이 시편 기자와 동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해결할 방법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고 있을 그때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역사 속의 한 사건을 묵상함으로써 문제를 풀 지혜를 얻습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을 통해서 가장 절망의 순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고 인도하셨는지를 묵상했던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신 것을 믿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10-11절)” 시편 기자가 현재의 상황과 현실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연약함 때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은 매우 긴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종 되었던 애굽으로부터 총 열 가지 재앙을 거친 다음 출애굽 했던 백성들은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다 도착한 곳은 앞에는 홍해가, 좌우로는 도망갈 길이 없었고, 뒤로는 바로의 군대가 뒤좇아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로의 군대 손에 죽느냐 아니면 바닷물에 빠져 죽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만이 남은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바로의 군대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공통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이스라엘은 이제 끝났다고, 멸망당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껏 출애굽 시켜놓으신 후 왜 이런 곳으로 인도하였을까? 백성들은 보이는 절망스러운 현상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의문과 분노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출14:4에서 이러한 상황을 만드신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즉,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려 주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 즉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모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힘을 가진 바로의 군대가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예이던 이스라엘 군대는 바다를 건너 승리자가 된 반면 힘을 가진 바로의 군대는 물 속에 수장되어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는 힘이나 지식 그리고 인간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홍해 사건은 역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사람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부른 노래의 가사를 분석해보면 노래의 주제가 하나님인 것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어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진정한 찬송이 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역사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찬양일 수 없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당시 처한 비참한 역사적 상황을 보면서 세상의 힘과 논리에 따라 역사가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되어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홍해 사건을 묵상하고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역사는 악인들의 손에 있는 것도 아니요, 권력의 손에 있는 것도 아니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살고 싶다며 애절하게 외치던 생전의 김선일 형제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했지만,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역사를 놓지 않으시고 여전히 이끌어 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고백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다시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 우리나라의 미래를 많이 염려했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청년이 많기 때문에, 미래를 열어갈 청년들에게 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알려 주고 시대를 분별하는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하면서도 차라리 청년이 이렇게 많지 않은 교회라면 목회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겠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와 점점 나눠지는 세대의 아픔 그리고 교회가 교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가운데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그 때 바로 ‘이 역사가 사람의 숫자와 권력, 돈과 지식에 좌우되지 않고 내게 달려있는 것을 네가 믿느냐. 네 인생이 환경과 주변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있는 것을 네가 진실로 고백할 수 있느냐’ 라는 질문 앞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며 다시 평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시편 기자는 개인의 문제와 자기 민족이 당한 고난을 보며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홍해 앞에서 구원자 되셨던 하나님을 묵상하며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찾은 평안을 고백합니다. 어려움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야 되는지 말씀을 통해 깨달았던 시편 기자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도 역사의 주관자가 주님인 것을 고백할 지혜를 얻는다면 지금 느끼는 분노와 고통은 그냥 사그라지지 않고 가슴 속의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둘째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길을 예비해두신 권능의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19절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절대한계였습니다. 모든 가능성의 막힘이었고, 앞으로 올 미래의 차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지혜에 비추어보고 경험으로 분석해보아도 불가능했습니다. 곧 절망의 길이었고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이라고 생각될 때 인간은 위기의식에 빠집니다.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면 인간은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아주 유치해집니다. 충동적이 되기도 하고, 조석으로 변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지도자에게 불평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지난날이 좋아 보이고 옛날과 비교해서 익숙한 것이 편해 보이고 옳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위로를 거절하며 스스로 고립됩니다.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넓은 세상에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마음에 분노를 터뜨리며 이유 없이 격분하고 곧 후회 하면서도 여전히 조절하지 못합니다. 생각이 왜곡됩니다. 인간관계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멀리보지 못하고, 어떤 일에 집착하면서 융통성이 없어집니다. 자기 힘으로 감당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인간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게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길,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길은 생명과 기적의 길이었고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길이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시편 기자는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막혀서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여실 권능의 길이 있다는 것을 묵상하며 새로운 길을 예비하고 계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찌를 듯한 교만과 오만으로 가득 찬 애굽의 군대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이 홍해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집트 문명의 발생은 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집트의 풍요의 근원이었던 물이 정작 멸망당하는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절망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희망과 생명의 시작이 되게 하시는 권능의 하나님, 시편 기자는 권능의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 상식과 경험으로는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 때문에 낙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홍해를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과 아픔을 당할 때마다 출애굽 사건을 묵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홍해 사건과 같은 경험을 다 하지 않았습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십자가의 길을 경험했기에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앞에 열린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라 절망처럼 보일지라도 주께서 예비하신 생명의 길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다시 한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묵상할 때에야 새 생명의 소망을 다시금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현실을 보며 절망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43장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가장 큰 혼란과 불안의 시간 가운데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믿음의 걸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역사는 어쩌면 절망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약했습니다. 자존심조차 세울 수 없고, 힘없는 주장이 얼마나 짓밟힐 수 있는가를 처절하리만큼 겪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갈등과 다툼으로 혼란과 불안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을 단 시간 안에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바로 그곳에서 자기백성을 위한 구원의 길을 예비하고 계시는 권능의 주이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이 민족과 나라가 변화되고 거듭나는 창조적 고통의 기회로 주신 것을 믿습니다.

셋째 시편기자는 자기들의 목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시편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해 볼 때, 목자가 양을 인도함같이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광야 길을 걷는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로 설명했다는 것은 기막힌 설명입니다. 양에게 목자는 절대적입니다. 목자는 양에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같습니다. 광야를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입히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의 지형과 날씨,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미리 아시고 양들이 방황하지 않고도 갈 수 있도록 정확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은 한 마리 한 마리 자상하게 챙겨 광야 길 가는 동안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병들지 않도록 돌보아 주신 분이라는 것을 역사를 통해 분명히 보았습니다. 

양은 20m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냄새도 잘 맡지 못하고,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대로 두면 질식해서 죽어버립니다. 스스로 방어할 무기도 없습니다. 목자가 앞장서서 가지 않으면 양은 흩어집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 바로 이와 같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뿐만 아니라 오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러합니다. 똑똑한 것 같고 잘난 것 같아도 지나온 인생을 보면 주께서 그때마다 이끄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헤어 나오지 못할 수많은 인생의 위기들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나를 놓지 아니하시고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의 골짜기와 어둠으로부터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해 가십니다.

가장 절망적인 환경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가실까 목자 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 다시금 평안이 찾아옵니다. 시편기자는 자기 판단과 지성을 내려놓습니다. 현장을 바라보는 모든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을 다시 묵상하며 의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이해관계를 다 내려놓을 때입니다. 우리의 분노를 내려놓을 때 입니다. 옳다고 주장하던 기준을 내려놓을 때입니다. 김선일 형제의 죽음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크고 작은 어려움에 절망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우리가 오늘 무엇을 묵상해야 할까요? 바로 시편 기자처럼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절망스런 홍해를 가르시고 그 속에 생명의 길을 예비하신 권능의 하나님, 광야같이 가기 어렵고 험한 길을 목자 되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런 하나님과 다시 인생의 걸음을 걷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요?

국민일보의 한 칼럼에서 읽은 글입니다. 몇 줄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국교회를 잘 알고 있는 일본 신학교 교장의 강의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교회와 일본 교회의 차이는 순교자의 차이라는 흥미 있는 지적을 했습니다. 일본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것은 순교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한국 기독교가 가진 순교유산의 부요함을 감격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 자랑스러운 순교유산을 이 땅만이 아닌 전쟁의 상흔으로 찌든 이라크까지 확산해 나가야 합니다.’

고 김선일 형제의 죽음은 어쩌면 스데반의 죽음처럼 선교의 비전과 꿈들을 잃어가는 이 땅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수많은 아귀다툼 속에 선교의 불길과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시작이 될지도 모릅니다. 기도로 마음을 모아 함께 하나님께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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