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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마음눈은 얼마나 밝습니까?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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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복 가운데 여섯 번째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이비 집단에서는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자기들은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마는 그 같은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 인간들처럼 뼈와 살로 된 형체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15)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딤전 6:15-16)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첫째로, 육신의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눈을 가지고 사물을 분간하고, 글을 읽고,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봅니다. 둘째로, 이성(理性)의 눈이 있습니다. 이는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셋째로, 영의 눈 또는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이 눈은 육신의 눈이나 이성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이 세 가지 눈 가운데서 마음의 눈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시간 저는 마음의 눈에 관해서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음눈이 밝아야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탐구해 온 지식은 셀 수 없으리만치 많습니다. 지식의 영역은 한없이 넓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살면서 터득한 지식의 분량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지만, 광활한 지식의 바다에 비하면 작은 바가지에 담은 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할지라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우리나라는 전력의 약 40%를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원자력 발전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더라도 전기를 사용하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 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평생 몰라도 문제될 것이 없는 지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지식은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이 있으므로 반드시 알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지식입니다. 마음눈이 소경인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 지식은 해박하지만 하나님에 관해서는 캄캄절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한 예로서,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된 쏘련인 유리 가가린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1961년 4월 12일에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대기권 밖에 나가서 지구 둘레를 1시간 48분 동안 선회하고 귀환했습니다. 그는 캄캄한 우주 공간에서 푸르게 빛나는 지구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우주여행을 하는 동안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푸른빛을 발하는 지구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감탄했지만, 그 아름다운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이같이 노래했습니다.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나이다’(시 8:) 다윗은 비록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우주 만물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손길을 분명히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눈이 밝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는 것은 우리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주신 결과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사는 60억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믿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어찌하여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나누이는 것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해 주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해서 마음눈이 소경된 사람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마음눈이 밝아진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안식일에 강가에 나가 거기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다들 듣고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나 루디아라는 여자는 적극적으로 믿을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같이 증언합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각자가 자발적으로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해 주어도 마이동풍(馬耳東風)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마치 구원이 자기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가하면 개중에는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에게 적개심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감정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영적 소경된 상태에 있는 저들을 불쌍히 여겨서 저들의 마음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셋째로, 마음눈이 밝아야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신앙생활은 하고 싶다고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서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어떤 시험도 능히 물리치는 신앙인이 되려면 마음눈이 밝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작은 시련에도 쉬 낙심하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마음눈이 어두워진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신 지 사흘 되던 날 오후에 있었던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 새벽 미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그 사실을 확신할 길이 없어서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새벽에 무덤에 다녀온 여자들이 천사를 만나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으나 모두들 반신반의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가서 빈 무덤을 확인했으나 그것만 가지고는 주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 날 오후에 평소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글로바라는 사람과 또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그 날 새벽에 된 일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랐던 만큼 예수님의 죽음이 이만저만 큰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한 것입니다.

얼마쯤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자연스레 그들 가까이 다가와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예수님인줄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연히 만난 나그네인 줄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 사람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에 보니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이라고 설명합니다. 어쩌다가 두 제자의 눈이 가리워진 것일까요? 그들에게 대하여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신 주님의 책망 속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눈이 어두워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함께 유숙하러 집에 들어가 세 사람이 식탁을 대하고 앉아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니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저들의 눈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주 낙심하고 시험에 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눈이 어두워져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사실인즉, 우리가 주님을 떠났으면 떠났지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신 대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어떠한 시련이 다가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 쓰기를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알고 미워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뵌 후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 애지중지하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의 마음눈은 어떤 상태입니까?




두 번째로, 어떻게 해야 마음의 눈을 밝게 할 수 있는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눈을 어둡게 만드는 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첫째로,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고 했을 적에,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교만한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나무를 보았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결과는 너무나 처참했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식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고, 불화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음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서 행하심으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탐욕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망치는 심각한 요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한 것 역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함께 따라 나왔습니다. 정말로 축복된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와 소 떼와 양 떼가 많아지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초장과 물 때문에 자주 다투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헤어져 살 것을 요구했습니다. “8)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고 했습니다. 그러면 롯이 아브라함에게 “아닙니다. 삼촌께서 먼저 좋은 곳을 택하십시오” 라고 사양해야 할 터인데, 롯은 자기가 먼저 기름지고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택했습니다.

그의 선택은 누가보아도 탐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단 들을 택한 롯은 점점 장막을 옮겨 드디어는 죄악이 관영한 소돔 성 안에 들어가 거처를 마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적에 롯과 그의 가족은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고, 그나마 그의 처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탐욕을 품으면 분별력이 없어져서 생명 길을 버리고 멸망의 길을 택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하며 경계합니다(골 3:5). 우리는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자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 주셔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집에서 쫓겨났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갈은 광야지대로 통하는 브엘세바 들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진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마엘이 탈진해서 쓰러졌습니다. 하갈은 자식이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이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했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가까운 곳에 샘물이 있는 것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하갈이 곁에 있는 샘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집에서 쫓겨난 일로 낙심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낙심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낙심되는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낙심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8-9)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절망적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편에서 절망적일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 8:28).




넷째로,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성경에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1서 4:18)고 했습니다.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사태를 정확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가데스 바네아에 당도했을 때였습니다. 모세는 열 두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을 두루 살피고 오게 했습니다. 드디어 40일 후에 그들이 돌아와서 백성들 앞에서 보고회를 갖게 되었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서 상반된 보고를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했으나 나머지 열 명은 말하기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열 정탐꾼은 가나안 거민들의 강함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거민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을 불신하는 지경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블레셋 땅으로 갔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힌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가 골리앗을 죽인 사람인 것을 알아보았을 때 식은땀이 솟았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상황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그 때 지은 시편이 56편인데, 그는 말하기를 “1)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두려움을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신하들과 작전을 세우고 비밀한 지역에 군대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 왕의 작전을 미리 다 알려 주어서 방비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하자, 아람 왕은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에게 작전 내용을 알려주는 자가 있다”고 하면서 그 자를 색출해 내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 신복 중에 하나가 말하기를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아람 왕은 먼저 엘리사를 잡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밤중에 선지자가 있는 도단성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그 성을 에워쌌습니다.

선지자의 사환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가보니 아람 군대가 성을 겹겹이 에워싼 것을 보았습니다. 사환은 사색이 되어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보았습니다.

선지자의 사환은 육신의 눈으로 보고, 이성의 눈으로 판단하고 두려워 떨었지만, 엘리사는 영의 눈을 떠서 그를 호위하고 있는 불말과 불병거들을 보았기에 겹겹이 에워싼 아람 나라의 병거와 말과 군사들을 조금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현대인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세속화의 물결이 교회 안에까지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눈을 감고 육신의 눈과 이성의 눈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늘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심을 부인하고 부활을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하는 신학자들이 인기를 누리는가 하면, 현세적인 축복을 기독교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 무속적인 기복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과연,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할 일은 이 세상 풍조를 좇지 아니하고 성경적인 올바른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리고 어둡게 만드는 세속적이고 불신앙적인 것들을 단호히 배격하고 영의 눈, 마음의 눈을 떠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청결케 된 성도님들의 마음눈을 밝히셔서 날마다 영이신 하나님을 뵙는 가운데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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