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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恩惠)의 의지(依支) (갈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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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스위스의 칼 바르트가 이미 유명해진 후, 미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미국에 도착하는 날, 수많은 기자들이 그를 인터뷰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그 중의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평생동안 신학을 연구하여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었는데, 당신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신학은 무엇입니까?”

이때 이 세계의 위대한 신학자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으로 기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사실입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찬송을 읊조렸습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여러분도 발견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은혜의 각성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생활의 시작입니다.

혹시 아직도 모르신다면, “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구?” 질문을 끌어안고 하나님을 주목해 보십시오.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즉 은혜의 각성이 과거라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은혜를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율법적 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 본문으로 삼은 <갈2:16절>의 내용은 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사람은 율법적 시도에 의하여 의롭게 되지는 않는다.
2.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오늘의 교회가 의롭게 된다는 것,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기독교적 용어로 제한시켜 버린 것은 큰 오류입니다. 교회는 교회, 세상은 세상 이렇게 이원론적 신앙의 영향 때문에 소위 칭의라는 용어도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만 사용되는 단어가 되어 버린 것이 교회의 비극입니다.

의롭다는 개념, 쉽게 이해하면, 떳떳하다는 것이고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떳떳하게 느껴지고 내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게 느껴지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contentment, 만족, 심리학 용어로 자존감이라고 하지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존감을 말합니다.

사람은 이 자존감, 자신이 떳떳하고 인정받는다고 받아들여질 때,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자존감이 건강할 때 비로소 사는 보람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거꾸로 자존감이 결여되면, 사람이 의존적이 되고 열등의식, 피해의식, 우울에 곧잘 빠지며 비판적이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곤 합니다.

갈라디아서2;16절은, 자신의 의롭다고 받아들여지는 것, 마음에 떳떳하고 자신을 가치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이 자존감은 율법의 행위로서는 아무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율법의 행위, 율법적 시도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신의 행동이 흠없이, 손가락질받는 일이 절대로 없게 하는 행위 완벽을 추구하는 시도로 나타납니다. 구약의 십계명, 구약 성경에 직접적인 명령으로 기록된 도덕율 600여가지, 여기에 그 구체적인 적용 규례 일만여 가지.. 이 모두를 다 지키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그 하나에서도 흠 잡히지 않으려고 하는 시도를 말합니다.

예컨대, 막10장의 부자청년과 같은 예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왔을 때, 자신은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정말로 자기가 기억하는 한,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이 부자 청년의 마음이 여전히 공허하다는 것이지요?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며 영혼이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조항들 아무리 잘 지켜도, 도덕율, 정말 깨끗하게 완벽하게 살아도 그것이 나의 마음에 의롭다함을 내려주지 못합니다. 자존감을 만족시켜 주지 않습니다.

사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자존감을 얻으려하면 할수록 그 마음은 더욱 민감해지고 불안해집니다. “내가 뭐 실수한 것은 없나? 말 잘 못한 것은 없나?” 여기에 몹시도 시달리지요?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행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에게 결단코 의롭다함을 주지 못합니다.

율법적 시도 두 번째는 소위 정통성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의 배경에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큰 이유가 그들이 유대인 =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영적 정통성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뼈대있는 가문, 양반자손이라는 의식, 오늘날 같으면 상류층에 소속하고 싶은 마음, 학벌에 따른 동창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런 심리입니다. 명품, 명품이 안되면 짝퉁이라도 두르고 시내에 나가야 쪽팔리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의식도 일종의 정통성에 대한 집착병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체면 문화라 이 정통성, 뽀다구에 아주 묘한 집착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 정통이라는 것에 제일 집착하는 사람들이 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서울의 교회 이름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이 첫째가 제일교회이고 둘째가 중앙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 지구촌교회라는 이름도 인간적 야망의 냄새가 풀풀 배어 있는 이름이지요? 교회 이름은 빛과 소금의 교회가 제일 낫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고 이런 말들으면 기분이 좋은 목사와 교인들은 아직도 정통이라는 율법적 시도에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적 시도 세 번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비교 우위를 통하여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이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려고 하고 율법을 최고로 잘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인데 이들 관계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들은 만나면 서로 박터지게 싸웁니다. 왜 그래요?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남들보다 더 나아야 하기 때문에... 박터지게 싸웁니다.

내 아들 꼭 1등을 만들려고 하는 부모들이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그 학부형들끼리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율법적 시도가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마음에 의롭다함을 못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적 시도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마음에 평안이 없고 마음에 쉼이 없고 떳떳함이 없고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사랑의 느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율법적 시도를 집착하는 것은 은혜를 의지하는 것과 정반대가 되어서, 율법적 시도에 매여 있으면 있을수록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말콤 엑스, 어렸을 때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 원망스러운 나머지 마음에 백인을 향한 증오심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백인을 미워하면서 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백인이 되기를 소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인을 미워하면서도 자신이 백인이 되고자 어렸을 때부터 비누, 스킨, 크림 등을 사다가 그냥 계속 자기 피부를 문질러댔습니다. 하얀 백인이 되지 않을까 해서 별별 짓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말콤 엑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피부를 문질러대는 노력으로는 결코 백인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자기가 백인이 되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더 일어납니다.

말콤 엑스가 백인이 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의 마음은 불안하고 분노에 더욱 더 차듯이, 사람이 자신의 노력, 율법적 시도로 마음을 떳떳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 불안해지고 더 죄의식에 시달리고 더 불편해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가운데 살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율법적 시도들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통해서 만족하고자 하는 마음을, 흠없이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속으로 흐뭇하게 느껴보고자 하는 시도를, 내가 중심이고 내가 정통이라는 생각에서 떳떳함을 느껴보고자 하는 시도를 벗으십시오.


그러면 이와 대조적인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은혜를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은혜를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은혜의 사랑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혜의 사랑을 입었습니까?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섭리의 은혜인지요?

죄인되었던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입니까?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을 대신 받아주신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사람은, 얼굴이 이쁘든지, 재주가 좋든지, 권력이 좋든지, 하다못해 돈이 많든지..어느 구석이라도 잘난 것이 있어야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없는 사람은 부러움에 한이 맺히고, 있는 사람은 뻐기고... 질투와 으시댐이 범벅이 된, 웃지 못할 코미디 세상을 만들고 있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데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 옛날, 출애굽하고 광야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선택하여 준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감격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오만이 점점 더 쌓여갑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제 일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을 안듣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의 울타리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선민이라고 으시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신명기, “이렇게 살아라” 가르쳐 주시면서 실상을 깨우쳐 주십니다. 

<신7:6-8>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사실은)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러 주심이 우리가 착해서입니까, 재산이 많아서 하나님 사업에 쓸모있겠다 싶어서입니까, 재주, 은사가 많아서 써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까, 똑똑해서 입니까, 얼굴이 잘 생겨서 하나님 나라에 모델로 사용하려고 입니까... 우리가 진리를 찾고 싶은 마음이 많아서 입니까?
아니지요?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뻐기려고 하고,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정말 속보이는 인생인데, 다만, 인생이 불쌍해서 사랑해주신, 은혜의 사랑입니다.

<롬5:8>“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내 인생이 불쌍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들으면, 여러분 느낌이 어떻습니까? 혹시 약간 기분 나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감격이 있습니까?

출애굽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 왜 그렇게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고생하고 난리를 치고 망하고 예수님마저도 배척하고 그럽니까?

출애굽의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선민이 된 것이 마치 자기들이 뭔가 잘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처럼, 자기들의 힘으로 얻은 것처럼 오만하게 착각하기 때문에,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 난리를 피우고 생고생하고 쫄닥 망하고 창피를 당하고 비참한 과정을 거치고 맙니다. 은혜를 잊어 버리면 망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죄인되었던 나를 사랑하신, 다만 인생이 불쌍해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죄인되었던 나를 사랑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죄인되었던 나를 불쌍히 여겨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 여러분도 읽어 보셨지요? 그 책을 기억하면 무슨 생각이 제일 많이 납니까?

저는 한동안 오랫동안 빅톨 위고의 ‘레 미제라블’, 우리말 번역하면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이 소설을 생각하면 장발쟌에서 온 촛대를 선물로 준 미리엘 신부를 생각했습니다. “나에게도 저 미리엘 신부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마음 한 구석에 갖고 살았습니다.

장발쟌이 더 이상 좀도둑이 아니라 훌륭한 마들렌 시장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이 미리엘 신부의 덕택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이런 연민적인 생각, 많이 생각하셨지요?

그러나 사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장발쟌이지 미리엘 신부가 아닙니다.

좀도둑 장발쟌이 훌륭한 시장 마들렌으로 변화되게 한 것은, 한번 은혜의 선물을 내려준 미리엘 신부가 아니라, 그 은혜의 선물을 평생토록 기억하며 밤마다 은촛대에 촛불 켜놓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묻는 장발쟌의 큐티였습니다.

물론 장발쟌을 의인인 것처럼 대하여 준 미리엘 신부의 은혜를 결코 작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장발쟌이 은혜를 잊어버렸다면, 그는 또 다시 좀도둑의 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자신을 의인인 것처럼 대하여 준, 한번의 은혜를 평생 기억하며 간직하며 살았기에, 장발쟌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속에 산다는 말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에서 완전히 자유, 해방되었으며 그리고 은촛대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성령을 값없이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멋있는 사람이 됩니까? 어떻게 이 이기적이고 못됐고 오기쟁이고 고집쟁이인 그러면서 사실은 굉장히 연약하고 초라한 존재인 내가 어떻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까?

장발쟌이 밤마다 은촛대 켜놓고 은혜를 기억하는 큐티를 했듯이, 우리도 죄자격없는 저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따라 기억하며 살 때, 바라보며 살 때에 변화됩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신,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마음에 인장처럼 품고 살아갈 때에, 어느새 정말로 의인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은혜를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이처럼 은혜를 잊어 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은혜를 기억할 때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은혜를 알 때 비로소 훌륭한 인생,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은혜를 의지하여 사는 원리에 대하여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혜를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은혜의 사랑에 응답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 갈2:16에서 흥미롭게 반복하여 나오는 어구가 그리스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이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율법적 시도와 대조되는, 은혜를 의지하는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은혜의 사랑을 체험케 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사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1984년 LA 올림픽 때에 동양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 다이빙, 10m 프랫폼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중국 여자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저우지홍입니다.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서양 선수들과 비교할 때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유연한 몸동작, 침착한 자세 그리고 전혀 두려움이 없이 멋지고 놀라운 다이빙에 성공하였습니다. 혹시 그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이때 저우지홍이 아주 흥미있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어머니 때문입니다. 내 어머니 때문에...” 깜짝 놀란 기자가 되물었습니다. “어머님 때문이라뇨? 어머님이 어떠셨길래...”

그러자 저우지홍은 어머니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100m 경주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경주에 자주 나갔지만 나는 자주 넘어졌고 매번 입상권 안에 들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사랑하는 딸아, 나에게는 네가 일등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네가 넘어졌다가 일어날 때의 네 모습이 나에게는 더 아름다웠단다. 네가 일어나서 다시 달리는 모습이 일등보다도 내게는 더 뿌듯했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이빙을 시작하여 때로 실수하고 때로 잘못하기도 하고 하였지만, 그 때마다 어머니는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등은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는 네가 운동하는 그 모습, 그 자체가 기쁨이란다. 너를 보는 것이 내게 기쁨이야. 너를 보는 것이 이 어미의 행복이야.’

저는 다이빙의 그 스탠드에 설 때마다 어머니를 떠 올립니다. 그러면 저절로 미소가 나오고 긴장이 풀어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다이빙을 즐기는 마음이 생겨서 언제나 침착하게 경기에 임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어머니 때문입니다.”

10m는 인간이 제일 공포를 느끼는 높이라고 하지요?

올림픽 다이빙 플랫폼에 올라섰을 때,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숨죽여 지켜 보는 관중들, 저 아래 여전히 숨을 멎게 하는 파란 물,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까지 지켜 볼 심사위원들... 이 여자가 이런 것들을 의식했다면, 바라보았다면 과연 그렇게 여유있게 침착하게 뛰어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겠습니까?

육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의 마음에 자신을 사랑하신 어머님을 바라보고 어머님의 미솟짓는 웃음에 응답할 때, 그는 아름다운 점프를 그려냈습니다.

인생길을 가는 우리의 마음에도 수많은 모습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마음에 보여집니다.

잘 해야 될텐데 스스로의 압박감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은근히 내가 실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보기좋게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귀의 비웃음소리도 있습니다. 

좇아오듯이 나의 마음을 몰아치는 소리, 모습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피곤하고 지치고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고 맙니다.

그러나,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죄인된, 연약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즐거워하시며 기뻐하시며 언제나 나의 모습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앞에서 행하는 응답을 드린다면,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아름다운 점프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에 응답하여 사십시오. 어느 때나 내 마음에 여러 가지 칼라들이 비춰지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의 빛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들어 그 은혜를 응답하여 살아보십시오.

그 때에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용기와 힘을 얻으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는 삶인지를 당신도 누릴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은혜를 의지하여 살아갈 때에 비로소 의롭게 됩니다.

의롭다 함을 얻으며 의롭다 함을 누리고 그리고 의롭게 됩니다.

율법적 시도를 버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은혜의 하나님 기억하며 바라보며 나아가 내 모든 삶의 행동 그 은혜의 응답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심령에 떳떳함을,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 받아들여지는 자존감을, 안정감을, 행복을, 살맛나는 즐거움을 충만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당신을 정말로 아름다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은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의지하여 살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아갑시다.

허무하고 우스꽝스러운 율법적 시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품어 기억하며 그 은혜에 응답하는 사랑으로 살아봅시다.

좀도둑 장발쟌이 훌륭한 시장 마들렌이 되었듯이, 저우지홍이 아름다운 비상을 하였듯이, 당신의 인생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비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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