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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각성 (골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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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현대 종교계에 제일 큰 화두는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길이 어찌 하나만 있을 수 있겠느냐?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개가 있듯이, 인간이 구원이 이르는 길도 꼭 특정 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제일 잔인한 전쟁이 종교전쟁, 종교를 명목으로 한 전쟁이었습니다. 예컨대, 십자군 전쟁, 30년 전쟁과 같은 것입니다. 종교간의 반목과 대립, 이런 인간의 속좁고 편협한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고, 종교간에 질투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개신교, 그 가운데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잘못 이해하여,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죄인의 가치관으로서 괜히 다른 종교인을 배척하고 반목했던 미성숙함은 벗어야 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며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6:46,47>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고서 배타성의 담을 쌓은 것에 대하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믿는 교리가 최고다, 왜냐하면 내가 믿기 때문에.”식의 독선과 아집을 고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독선과 아집을 고집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의 사람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저희가 믿는 믿음의 도리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은 그 본질에서 다른 여타의 종교의 가르침과 구별되는, 유일한 독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일한 독특성이란, 복음은,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 수행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명확히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모양과 칼라가 다 달라도 한결같은 공통점은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수행, 노력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도를 잘 닦았느냐가 구원에 이르느냐 이르지 못하느냐의 판단기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얼마나 노력, 수행을 했느냐에 의하여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복음은 인간의 노력, 수행과 관계없이, 어느 누구에게도 열려져 있는 구원의 길을 밝혀줍니다. 복음은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명확히 선포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가 믿는 도리인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인들을 사랑하며, 여타의 일들, 나라에 정의를 세우는 일, 환경을 건강하게 보존하는 일들 등등에 넉넉히 협력하곤 하지만,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은혜의 복음을 타협, 혼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붙드는 것은, 다툼을 좋아하거나 다른 종교보다 우리가 낫다는 우월성을 고집하는 편협성, 독단성, 배타성을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붙드는 것은 복음에 배어있는 은혜의 소중함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복음 외에, 어느 가르침에도 증거되고 설명되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사람들, 다른 종교인들, 무종교인들을 비로소 사랑하는 마음과 삶을 배웁니다. 은혜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평생의 삶, 위험을 무릎쓰고, 목숨걸고, 피곤을 모르는 불사조처럼 증거했던 자신의 사명을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은혜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핵심이 은혜라면, 그리스도인의 제일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진행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마무리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사실,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늘의 구름 떠 가는 것, 작은 나뭇잎 하나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 또 지나온 내 삶의 과정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보이십니까? 보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 내 삶에 배어있는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의 흔적들을 볼 수 있으려면, 은혜의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 각성이 있을 때에 자신의 인생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에 배어있는 은혜의 흔적들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여러분, 살기가 만만치 않지요? 나이가 들수록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인생이 이렇게 고달픈 것인가?”라는 회의적 사실입니다. 먹고 살기조차도 벅차고 쉽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은 힘든 것, 괴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허무한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전도서 기자의 표현처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음”<전1:8>을 절감합니다.

왜 이렇게 힘든 인생이 되었습니까? 그 궁극적인 원인은 명확히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이유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언하였듯이, 인간은 사망 아래 있기 때문에, 사망의 그늘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을 맛을 느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죽은 다음에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갈림길에서 내려지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미래형일뿐만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생살이 가운데도 진행형으로도 내려지고 있습니다.
<창3장>에서 배우셨지요? 인간의 죄의 댓가는 인생의 의미와 행복으로부터 단절된 실존적 사망, 영생으로부터 차단된 영원한 사망 모두 임을 배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쉽지 않은 세상살이, 꼭 속는 것처럼 느껴지고, 도려내듯이 아픔과 고통을 주는, 죽을 맛을 느끼게 하는 오늘의 삶의 현실로도 나타납니다.

인생의 절망은, 소위 인간이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이든, 명성을 쌓아서이든, 고행과 수행을 쌓아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의 굴레를 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 심판에서 자유와 해방을 내려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고통스런, 고뇌하는 인생을 살다가 지옥의 나락에 떨어지고 마는 사망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벗겨 주시지 않는 한, 인간은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가졌다 할지라도 죽을 맛의 운명을 벗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망 아래 거하는 인간의 운명을 생명의 자리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심판 아래 갇혀 있는 인간의 실존과 운명을 영생의 환희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사전적 정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댓가없이 베풀어 주는 호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노력, 모습과 관계없이 심판 아래 거하는 운명의 멍에를 벗겨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떻게 그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려서 어느 누구보다도 고단한 심판 아래의 인생살이를 경험하시고 십자가에서 온 몸으로 죽으신 희생은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여전히 심판의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여/ 허덕이며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확실한 생명,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하나님의 은혜는 ‘사망과 심판 아래’라는 인간의 운명을 ‘생명의 기쁨의 자리’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심판과 사망의 연자맷돌을 벗을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나의 아무런 참여의 수고, 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아무런 댓가없이, 생명과 영생의 운명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운명의 대전환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악의 코드를 타고 태어난 인간의 운명을 선의 코드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사람은 그의 운명이 바뀝니다. 당연히 삶에 임하는 마음의 태도가 바뀝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합니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교회에 있으면 가끔씩 교회순회구걸자들이 찾아 옵니다. 저희 교회 예배당은 간판도 별로 없고 4층이라 찾아오는 사람이 적습니다.

전에 있던 서울침례교회 예배당은 시내 복판에 있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교회순회구걸자들이 찾아옵니다. 처음에 놀랐던 것은 대다수의 순례자들이 말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사무실에서도 이 사람들을 위하여 항상 동전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한번에 200원씩. 그래서 꼭 수금받으러 다니는 사람같습니다. 서로 아무 말도 없습니다. 그냥 손을 쑤욱 내밀면 200원 동전을 얹어줍니다.

그 모습을 보고 “멀쩡하게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저렇게 해야 하나?” 회의가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제 마음에 이상한 충동을 넣으셨는지, 한번은 단골 순례자가 왔길래, 그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아저씨, 200원 받으러 다니지 말고 제가 일당을 드릴테니 노동을 좀 하시지요? 제가 5,000원을 드릴테니 저희 교회 남자화장실 청소를 한번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땡 잡았다는 표정으로 그러겠다고 하여 화장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5분이 안되어서 이 아저씨가 올라왔습니다. 청소 다했다고. 그래서 가 보았더니 화장실에 물만 한번 끼얹어 놓았습니다.

청소를 하시려면 어느 정도는 하셔야지... 물만 끼얹으면 되겠습니까? 세면대도 닦고 바닥도 닦고.. 하셔야지요?

그러자 이 아저씨, 자기는 그렇게 못하고 청소 다했다고 돈만 달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러면 아저씨 제가 돈을 못드립니다. 말했더니, “자기 바쁘답니다” 그리고는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내 오기로 안줄까 하다가, 준다고 하였으니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돈을 받고 돌아가는 표정이 제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를 향하여“세상에, 별 이상한 사람 다 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습니다. 물론 고맙고 감사하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욕망과 자기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혀 있으면, 은혜를 모릅니다. 은혜의 복음을 숱하게 듣고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못봅니다.

연민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도 연민과 욕망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욕망을 채워주고 연민을 부추겨주면 그것이 은혜인 것처럼, 잘못 생각합니다.

예컨대, 부모님은 뼈빠지게 일해서 돈을 버는데, 자식은 유흥비로 탕진하기 위하여 부모의 돈을 모조리 빼앗아 갑니다. 부모가 유흥비로 탕진하는 돈을 잘 주면, 좋은 부모라 여기고 안 주면 부모를 향하여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뼈빠지게 번 돈을 가져가는 탕아가 진정 부모의 은혜를 압니까? 어떤 탕아가, 부모가 뼈빠지게 일하여 번 돈을 유흥비로 쓰면서 “우리 부모님은 정말 은혜가 많은 분이야 내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눈물을 흘리며 감격합니까? 아니지요? 부모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유흥비로 부모의 재산을 탕진하지 못합니다.

이 탕자가 언제 부모의 은혜를 깨닫습니까? 유흥에 탐닉하는 자신의 욕망과 연민의 마음이 죄악임을, 몹쓸 짓임일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연민의 마음이 죄악임을 깨우치기 이전에는, 인간은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죄인된 자신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욕망의 충족이 아닌 것을 보는 것이 은혜의 깨달음입니다. 은혜의 각성은, 내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의 각성은, 내 심판의 운명을 바꾸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욕망과 연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인생을 탕진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살리시려고, 나의 운명을 바꾸어 주시려고,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내게 새로운 삶, 영생을 맛보며 진정한 가치와 행복의 삶을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형벌을 몸소 지셨습니다.

혹시 당신은 여전히 욕망과 연민의 늪에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욕망과 연민을 채워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해 주지도 않으면서 그게 무슨 사랑이고 무슨 은혜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을 뜨십시오. 욕망과 연민을 채워주는 것이 당신에게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을 더욱 사망의 늪에 빠지게 하는 것일뿐입니다. 

눈을 뜨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심판의 형벌의 착고를 벗기고, 당신에게 창조적인 새로운 삶을 내려주시기 위하여, 침묵하시며 고통과 수치를 담당하시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이 은혜의 각성에서부터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또 하나 주목하고 꼭 기억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Lord)되어주심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 험한 세상에서 당신의 지혜와 힘으로 잘 살 자신이 있습니까? 정신과의사 생활을 하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스캇트 팩(Scott Peck)이 그의 유명한 책, ‘아직도 가야할 길(The Road Less Traveled)’과 ‘끝나지 않은 길(The Road More Less Traveled)'’라는 책에서 인생은 어려운 것(Life is Difficulty), 인생은 복잡한 것(Life is Complex)이라고 고백합니다.

인생을 살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더 나아가 두렵게 하는 것은 이 복마전(伏魔殿)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내가 너무나 어리석고 너무나 연약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마치 풍랑이는 바다에서 작은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사투를 벌여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악귀에 쫓기는 공포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이제는 동료들 아무도 없고 연약한 혼자의 힘으로 악귀를 물리쳐야 하는 절박한 심정처럼 인생길이 느껴지곤 할 때에, 우리는 비애감과 두려움을 절감합니다.

경영을 잘 못해서 다 망해가고 부도나기 직전인 회사를, 어느 사람이 부채를 다 갚아주고 새로이 경영을 잘해서 흑자로 전환을 시켜준다면, 이 회사에는 그가 구세주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 벅찬 것임을 빤히 보면서도 헤쳐 나갈 수 밖에 없는 인생길, 그 길에 넉넉한 사랑으로 함께 하시며 넉넉한 능력으로 인도하시며 마침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가시겠다고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 이 초청보다 더 큰 은혜가 있겠습니까?

“왜 그렇게 혼자 고민하고 혼자 싸우고 있느냐? 내 손을 잡아 보아라! 네 삶의 키를 내게 맡겨 보아라! 내가 너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선한 목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 진정 살맛나게 하는 보람과 기쁨, 쉼을 줄터이니 네 인생을 내게 맡겨라.”

이 초청만큼 은혜스런 초청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되어 주심이 은혜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은혜의 초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떤 사람들이 이 은혜의 초청을 거절하겠습니까?

“난 내 힘으로 해 볼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힘으로 해 볼렵니다, 상관하지 마십시오. 난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지요?

자신이 아직도 강하고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은혜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아직도 자존심에 목매어 있는 사람은 은혜를 무시합니다. 이 사람들, 사실은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지옥같은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안내려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인간이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죄사함받을 수 있는, 예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자신의 연약한 자임을 깨닫고 오만한 자존심을 내려놓는 자에게 부어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셨습니까? 아니, 예수님의 은혜의 초청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십시오. 욕망과 연민을 좇아 사는 마음을 회개하고, 나의 운명을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십시오.

오늘 당신의 인생의 주인되어 주시겠다고 당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청을 들어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마11:28-30>

나의 인생을 진정한 쉼과 생명, 보람과 가치를 느끼도록, 생명을 누리며 살도록 나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손 내미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온전히 맡겨 보십시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을 의지하고 따르십시오.

그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그것이 이제는 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사는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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