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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르게 살자 (단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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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봉 목사 (사직동교회)

[5]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
[6]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 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 고라 하였더라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 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인류 역사상 최고, 최대의 제국을 이루었던 로마 제국 사를 들여다보면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려 300년 동안 악랄하게 우리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어떻게 갑자기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전력투구하였던 로마.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했던 로마. 그렇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순교의 제물’로 삼키고서도 꿈쩍하지 않던 로마가 주후 313년부터 왜 갑자기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고 80년 후 주후 395년에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로 출범하게 되었을까요?

그 해답은 이것입니다. 로마인들이 줄 곧 지켜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과는 다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별세계 사람들이었습니다. 욕을 먹는데도 화 내지 않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축복을 하고, 매를 맞으면서도 용서를 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로마인들은 300년 동안 기독교를 박해하고 갖은 악을 다 저지르다가 마침내 제풀에 지쳐서 쓰러진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남 다른 모습’에 감동을 받아 항복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로마인 자신들보다는 너무나 정직하게, 단정하게, 신실하게, 아름답게 즉 다르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질려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고 정복할 수 없었던 대 제국 로마는 로마인들 손에 의하여 로마를 우리 기독교에 넘겨주는 놀라운 역사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2,600여 년 전(BC586-) 세계 최고 강대국이던 저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왕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수 만 명의 유태인들을 전쟁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포로 가운데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라고 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네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느부갓네살왕의 눈에까지 띄었습니다. 명색이 대 제국의 지도자였으니 느부갓네살왕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이 히브리 소년들을 잘 다듬으면 요긴한 인재로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지도자의 덕목은 인재를 가려 쓸 줄 아는 통찰력에 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하였습니다. 왕이 본 대로 네 청년은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였으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며 인격이 균형 잡힌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왕의 입장에서 탐을 낼 만하였습니다. 우선 왕은 네 청년에게 지키기 어려운 엄격한 왕명을 내립니다. 바벨론의 학문을 새로이 공부하게 하는 명령은 히브리 청년들로서 즐거운 숙제였습니다. 공부에는 이미 도가 트인 청년들입니다.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공부만큼 쉬운 것이 없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의 숙제입니다. 5절입니다. “또 왕이 指定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

오늘 우리들은 먹는 것, 마시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자유스러운 지요? 자유스럽다 못해 무질서하고 방종에 이를 정도입니다. 정말 절제가 요구됩니다. 좀 삼가들 하십시오. 이제 새 예배당에는 공간들이 많으니 예배당 안에서 만나고, 대화하고, 차를 마십시오. ‘하늘공원/ 로뎀나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 넓은 로비/ 만남의 장소’들이 많습니다. 젊은이들도 저 운동장 쪽의 미팅장소(커피숍, 스낵코너, 레스토랑) 찾는 것을 주일에는 특히 금하고 삼가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 이 세상과는 무언가 좀 달라야 합니다. 좀은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색깔이 좀 달라야 합니다. 좀 달라야 눈에 띌 것 아닙니까? 좀 달라야 세상이 우리를 주목할 것 아닙니까? 좀 달라야 하나님께서도 잘 알아보실 것 아닙니까?

자 다시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를 보십시오. 저 아름다운 히브리 청년들을 보십시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할렐루야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장면 아닙니까? “뜻을 정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누구의 음식입니까? 누가 내리는 음식입니까? 바벨론에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이 지정하여 내리는 음식입니다. 감히 거절할 수 있습니까? 찍소리 못하고 황급히 먹어야 합니다. 아니면 황송하고 감읍하여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만세삼창(폐하를 위하여!) 한 번 하고서 받아 먹든지 둘 중 하나일 뿐 신하로서, 백성으로서, 더군다나 패전국에서 잡혀 온 포로신분의 처지에서 이 왕이 하사하고, 왕이 지정하여 내린 거룩한(?) 음식 그야말로 왕의 진미를 거절한다는 것이 어디 있을 법한 말입니까? 나는 기껏해야 권하는 술을 사양해 보았을 뿐입니다. (고3시절, 공부하다가 저녁에 친구들과 식사하러 간 식당에서..../ 군에서 연대회식, 포 사령부 회식 자리에서 연대장과 포 사령관으로부터....) 사실 당시의 그 분위기에서는 그렇게 사양하고 거절하는데도 제법,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물론 제사를 거부하는 것도 있었음) 그러나 여기 다니엘과 세 청년들이 승전국이요, 정복자요, 당시 세계 최대 제국을 이끌고 있는 느부갓네살왕이 내리는 음식을 완벽하게 거절하는 장면을 대하고 보면 우리의 갖가지 무용담들은 그야말로 애교와 엄살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다니엘을 비롯한 히브리 청년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과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많이 달랐습니다. 신앙의 농도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대와 유행과 상식과 기회주의 성공관 하고는 철저히 역류하고 있는 히브리 청년들의 ‘다름의 인생관/ 차별성 있는 인생관’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예! 바로 느부갓네살왕입니다. 왕은 네 청년에게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는 무리한 왕명을 내려놓고서도 돌아서서는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지켜보면서 내심으로는 거듭 놀라고 또 놀랐습니다. 자기 나라의 젊은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 경영, 세계 제패를 꿈꾸고 있는 느부갓네살왕으로서는 이 히브리 청년들을 등용하여 자기 옆에 두고서 핵심적인 두뇌 역할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르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청년들은 그 시대와 야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불이익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시대 사조에 영특한 사람들은 이 청년들을 비웃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청년들은 그 대신에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얼마나 가까워졌을까요? 풀무불속으로 내동댕이 쳐져버린 이들을 살리고자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비상(?)을 걸 정도로 신속하게 구조 활동을 펼칩니다. 그 무서운 풀무(용광로)의 불기운을 금랭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구조대장으로 급파하셨습니다. 이 청년들이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가를 단적으로 증거해 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 시대의 불 신앙적이고, 비 성경적이고, 반 기독교적인 유행과 풍속을 열심히 따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도 가까이 하고 싶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겠습니까? (마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약1:7-8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삼손을 보십시오. 나실인된 목적과 정체성을 명심하고 여기에 충실해서 살 때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한없이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귀 턱뼈 하나로 수천의 블레셋 군대를 쳐부수면서 신통력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으로서 무언가 다르게 살지를 않고 블레셋 사람들과 어울려 방탕하고, 불신자와 동일한 인성으로 전락해 버렸을 때 그 신통하던 능력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삼손은 두 눈까지 뽑힌 채 우상(다곤) 신전에서 연자방아 맷돌을 돌리는 초라하고 불쌍한 존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르게 살아야 불신자들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기들과는 무언가 다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치 불신 남편이 아내에게는 새벽 기도 하러 가라고 깨워 주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자신은 아직 교회에 못 나오지만 아내가 대표로 새벽 기도하러 가서 자신과 아이들을 위하여 전능하시다 는(?) 하나님께 기도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마5:13-16) 우리가 불신자 저들 보다 월등한 우위에 서지 않고서는 저들을 교회로 이끌 수 없습니다. 불신자였던 저 느부갓네살왕을 보세요! 바벨론 청년들과는 월등하게 다르게 처신하면서 살아가던 히브리 청년들을 끝까지 지켜 보고 나서 마침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단2:47-49와 3:26-30을 보십시오.

요즘은 비슷해 가지고는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무언가 달라야 합니다. 대중들에게는 없는 색다르고 독특한 것이 있어야 보아줍니다.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고 따라 옵니다.
우리는 (교회는)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과 달라야 하겠습니까? 우선 저 히브리 청년들처럼 ‘하나님에게만 충성하는 유일신 신앙과 월등한 도덕적 우위’를 지킴으로 다름을 보여 줍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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