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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요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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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서철 목사 (왕십리교회)

일반적으로 변화에 대해서 세 가지의 다른 이해가 있습니다. 첫째, 진화론적이고 변증법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진화적 형태로 변해가거나, 때로는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틀에서 정반합의 형태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변화입니다. 이 것은 순리적인 방법에 의한 변화이고 정신적인 작용에 의한 변화입니다. 높은 교양과 인간답게 살려는 가치관을 함양함에 따라 변화되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배우고 깨닫는 노력에 의한 변화인 것입니다.

셋째는 창조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변화이고 능력에 의해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계속되고 있는 재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갈릴리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이 잔치 집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척집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혼인잔치에 초청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잔치는 7일간 계속되는데, 이 잔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잔치 집의 흥을 돋구는 포도주가 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잔치의 흥과 즐거움을 깨뜨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변화를 창조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변화는 잔치 집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예수님이 만드시는 창조적 변화는 문제해결의 요인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은 평범에서 특별함으로의 변화이고, 무가치에서 가치로의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잔치의 수준을 높여 주었습니다.
신앙의 역사는 우리자신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직면하는 문제를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변화가 되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문제에 얽매이고 지배되어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문제자체에 익숙해져버려 체념적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 자체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문제는 극복되고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미국 뉴욕의 이발업자 조합의 조합원들이 호반에 모여 대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회 중 그들은 이발사들이 사회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길가에서 잠자고 있는 거지를 데려다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다음 목욕을 시키고 양복을 입히고 머리를 멋지게 깎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다시 찍었습니다. 더럽고 추한 거지가 훌륭한 신사가 되었습니다. 이발사들은 이 두 사진을 함께 걸어놓고 거지로 살아가는 한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자신들의 공헌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이발협회는 이 사람을 다시 거지 소굴로 돌려보낼 수 없으니 직업을 얻어 주기로 하고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는 사람으로 취직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방을 얻을 돈을 거두어 주고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출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지의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12시가 되도록 거지였던 사람은 직장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히 여겨 그 거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거지는 신사복을 입은 채 지저분한 골목길에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술에 너무 취해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이 거지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이발과 목욕을 시켜주고 새 옷을 입혀주며 직장을 알선해 주고 주거지를 해결해주는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을 제시하는 변화보다 더 깊고 근원적인 인간의 질(質quality)이 변화 되야 했던 것입니다. 그의 인간의 질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인간의 질인 생명이 변화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더 심각한 과제는 외형적인 문제 자체보다도 그 문제를 만들어낸 그 질이 어떻게 변화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문제 자체보다 문제를 만드는 질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고 새로운 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질적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변화를 이루겠습니까? 변화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변화의 주체

그것은 변화를 만드는 주체가 누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나 혼인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변화는 예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항상 변화의 사건이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와 교회 역사 가운데 보면 예수님이 전해지고 증거 되는 곳과 믿는 곳에는 항상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도 예수님이 계셨기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변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같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우리는 변화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계실 때 가정에 변화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직장, 우리 교회, 우리 사회 가운데 계실 때 그곳에 변화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변화를 만드시도록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문제의식

문제에 대한 의식이 가져야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잔치집의 문제가 무엇임을 알았기에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문제의식은 변화를 찾게 해줍니다. 우리에게 심각한 병은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문제의 사건들은 우리로 변화의 삶을 살게 해주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 죄가 만드는 역사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의식해야 합니다. 주어진 사건들이 나의 미래의 삶을 얼마나 위협하는 조건들인지 의식해야 합니다. 내게 있어 당연히 행복해야 하는 데 행복하지 못한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바로 의식해야 합니다. 의식하는 데서 변화가 있게 합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고백하였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고 복음의 사도로 완벽한 사람이면서도 이러한 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죄의 법”을 심각한 문제로 의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내면의 “죄의 법”을 문제로 의식하였기에 죄의 법을 극복하는 “성령의 법”에 의한 창조적인 변화를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 가운데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문제의식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를 의식하는 데서 변화가 나타나고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문제에 예민하고 문제를 깊이 의식함으로 변화를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구함

변화를 필요로 하고 변화를 위해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변화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화를 주셔서 우리를 축복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십니다. 하나님은 변화되기를 원하고 구하는 사람에게 변화를 주십니다. 마리아의 구함은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신앙의 큰 잘못됨은 자기가 스스로 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열심히 율법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변화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주님이 변화시키시도록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은혜입니다. 변화의 주체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하지 않습니다. 변화시키는 주체가 자기가 되기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서 가운데 보면 변화를 원하고 구했던 사람들이 그 변화를 경험했음을 봅니다.
마가복음 9장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당시 율법에 보면 하혈하는 여인들은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되어 공적인 자리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12년 동안 많은 의사를 만나보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하였지만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변화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 뒤에 가서 예수님 옷만 만져도 낳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옷자락을 만짐으로 혈루의 근원이 마르는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12년 동안 포기하지 아니하고 부단히 변화 받기를 원했고 구했던 여인에게 변화의 역사가 찾아온 것입니다.

성서가운데 보면 병자들 불구자들 버림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그들은 변화를 원했고 구했기 때문입니다.
내게 필요한 변화를 찾아봅시다. 내가 꼭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어디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내게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변화를 원하고 구하십시다. 주님은 새로운 변화를 창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순종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보면 정결케 하는 많은 결례의식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식사 전이나 귀가 후에 결례의식으로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생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밖에서 접촉한 부정한 것을 제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혼인집의 잔치는 큰 잔치였기에 물을 담아두는 돌 항아리가 여섯 개나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실 때에 하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주라고 하실 때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였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변화가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비극은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명령과 지시에 대하여 분석하고 계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변화를 창조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분석하고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계산하고 따지는 것이 믿음에 장애가 됨을 유념하고 그러한 태도를 철저히 버려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은 가감이나 수정 및 보완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상은 우리가 받아드릴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거기에 변화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돌문을 옮겨 놓을 때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38년 된 환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고 하셨습니다. 따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걸어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세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썼어도 좀처럼 분쟁이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그 문제의 모든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시켜 그 해결의 답을 얻기로 했습니다. 이윽고 컴퓨터에서 답이 나왔습니다. 그 답은 “예수를 믿으시오” 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를 창조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하십시오. 그곳에 변화가 있을 줄 믿습니다.

변화는 문제해결을 이루는 요인입니다. 논어에 “어리석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W. 어빙’은 “변화에는 일종의 구원이 깃들여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집의 변화의 사건은 잔치 집의 문제를 해결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과정에서의 문제는 변화를 만드는 데서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 나의 의식, 나의 삶의 질(質)이 변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삶의 질이 변해야 내게 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문제해결은 가정의 근본적인 질의 변화를 찾는 데서부터입니다.

더 좋은 창조적 변화는 기쁨과 칭찬 받는 삶의 역사를 만드는 요인입니다.(10절) 변화는 예수 안에 사는 축복된 삶의 영광을 드러냅니다.(11절) 더 좋은 변화의 삶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더 좋은 창조적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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