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할 이유 - (마 6:9 - 15)

  • 잡초 잡초
  • 460
  • 0

첨부 1


- 설교 : 이명무 목사 (영신교회)

예) 코리텐 붐 여사는 화란 사람입니다.  2차 대전 중 쫓기는 유대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나치 수용소에 갇혔고, 혹독한 고문 끝에 온 가족이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녀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전도자가 되어 온 세계에 다니며 용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가 용서의 메세지를 전하는 곳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독일에서 그를 청하여 특별 집회를 가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어느 날 저녁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자기 손을 잡은 노신사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자기 가족을 고문하여 죽게 하고, 자신의 꽃다운 처녀시절 옷을 벗기고 때리고 고문하고 온갖 고통과 수모를 주던 바로 그 전범이 아직 살아있지 않은가?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을 몰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하나님,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용서해도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졌노라’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은총을 힘입고 그 원수까지도 용서하였습니다. 그를 마음으로 용서하는  그 순간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즐거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 국어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처럼 위대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용서해야할 상대가 내게 물질적 손실을 입힌 사람이던지, 내게 지극한 고통을 준사람, 내 사업에 해를 끼치고, 우리 가정을 파괴시킨 사람이라면 사실 그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기가 어려운 이유 중에 또 하나는 용서가 한 번만으로 끝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계속 용서해야할 필요성을 느끼는 형제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 들 간에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한 두 번 용서하는 것은 그래도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용서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입니다. 누가 누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그를 형제와 자매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 같은 위대한 기적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반드시 형제를 용서해야 할까요?

1.주님의 명령이기에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마태18장21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까지 하오리이까?”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2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하되 4번 째 용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후하게 생각해서 7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생각을 뛰어넘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지니라”(마태18:22절)

  일곱이란 숫자나 일흔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490번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으로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일에는 숫자의 제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골3:13-14“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엡4: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주님의 명령이기에 우리는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은 또한 친히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눅23:34“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향하여 그들의 사죄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박는 것 같은 고통을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고 뜻이기 때문입니다.


2.내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일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임금에게 많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 종들은 임금의 재산을 투자해서 사업을 하곤 했는데 한 종은 번번이 임금의 재산을 잘못관리해서 1만 달란트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말미를 주고 갚도록 했지만 그 종은 기한 내에 갚지를 못했습니다. 임금은 연말이 되어 결산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하나도 갚지 못하였음을 발견하고 처자식과 모든 소유를 팔아 빚을 갚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종은 왕에게 엎드려 사정하였습니다. 왕은 어차피 이 종의 힘으로 이 빚을 갚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그의 모든 채무를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탕감 받은 종은 은혜를 입고 기분이 좋아 집으로 가는 길에 길에서 자기 동료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100데나리온을 꾸어갔다가 아직 갚지 못하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이 종은 그 친구를 만나 그의 멱살을 잡고 경찰서로 끌고가 그를 고소하여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성경에는 ‘붙들어 목을 잡고’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목을 비틀어 끌고’ 갔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임금의 부하들이 괘씸한 마음이 들어 임금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였습니다. 임금은 분노하여 그를 꾸짖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태18:32-34)

  당시의 로마가 유대전역에서 1년 동안 걷어 들이는 세금의 총액이 8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만달란트의 액수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현시세로는 4000억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비해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된다. 5만원씩 계산한다면 약 500만원의 액수이다. 4000억을 탕감 받은 이 종은 500만원을 빚진 자기의 동료를 감옥에 넣어 고통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마음에 더 큰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이시고,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우리들이며,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은 바로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갚아야할 채무 즉 빚을 죄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이 비유의 결론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18:3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야 할 이유는 바로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용서할 수 없음을 변명하지 않습니까?
‘용서할만해야 용서하지’  ‘잘못을 인정도 안하는데 어떻게 용서해?’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은 그가 변화되거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가 용서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어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용서받을 만한 조건이 눈곱만큼도 없지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3.내가 앞으로도 용서받기 위해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5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2절)입니다. 이 기도는 마치 조건부 기도처럼 보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기도도 성립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하거든 우리 죄도 사하여 주지 마옵소서”

  주기도문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입은 것같이 우리도 형제의 허물과 죄를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어떤 조건이나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당연히 형제의 죄도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처음 예수 믿고 죄의 용서를 받을 때는 형제에 대한 사죄와 아무 관계없이 용서받았지만, 이제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도 계속 긍휼만을 베푸실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4-15절에서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보충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어느 날 용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예배에 참석했던 당시 유명한 장군이 웨슬레 목사에게 걸어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설교는 감동적이지만 나는 내가 아는 한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소”
  그때 웨슬레목사는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장군님, 용서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으려면 장군께서는 앞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죄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에 어떤 비율이 적용됩니까? 누가 더 많이 용서를 받아야할 입장입니까?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더 많이 짓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더 많이 짓습니까? 우리의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 우리는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4.나의 행복을 위해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은 마치 내 가슴에 불을 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숯덩이를 품고 있다면 상대를 태우기전에 먼저 나를 태워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 행복을 위해서는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예)미국 미시간주 호프대의 연구결과 남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71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용서와 신체반응의 관계를 실험하였습니다.  16초간 과거의 마음의 상처와 원한, 분노, 그리고 미움을 되새기도록 한 다음에 측정하였더니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빨라지고 혈압이 상승하였습니다. 그 다음 잠깐 휴식 후에 이해와 용서의 마음 갖도록 한 다음에 측정하였더니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예)스위스의 심리학자인 폴 트루니에에게 불치의 빈혈증에 걸린 한 소녀가 날마다 치료를 받으로 왔습니다. 어떤 정신 요법이나 약물 요법으로도 낫지 않는 병이었습니다. 소녀는 마침내 산중의 요양소로 보내어졌습니다. 얼마 후 요양소에서 진단을 했는데 혈액 검사의 결과 아무 이상이 없고 빈혈증도 아니고 불치의 병도 아닌 정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에게 지난번 자신에게 진단을 받을 때와 요양소에서 진단을 받을 때까지의 생활상에 무슨 변동이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지독하게 미워했던 사람을 갑자기 용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환해지고 삶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이 되고 적극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점점 몸의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위험이 두 배나 많다고 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50대 사망률이 무려 다섯 배나 더 한다고 합니다. 나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상대를 용서하라고 합니다.

  윌리암 아더 워드는 “우리가 복수할 때 우리는 짐승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인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 같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5.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용서가 없는 공동체에서 평화와 일치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평화스럽게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이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음은 그도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용서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저는 우리 영신교회가 서로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화평과 일치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 용서할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게는 도대체 용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용서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형제를 이해할 때 그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그를 보는 것입니다. 내 관점에서 상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그를 보아주는 것입니다.

  예)한번은 영국의 여왕이 아프리카 추장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나누고 중요한 회의를 갖도록 예정되었습니다. 까다로운 왕실의 식사예법을 아는 신하들은 아프리카 추장들을 철저하게 교육시켰습니다. 반드시 음식은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해야 하며 손으로 집어먹어서는 안 된다고 부탁하였습니다. 긴장한 추장들은 그런대로 식사를 잘 하다가 불편했든지 한 추장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어던지더니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의 눈살이 찌프려졌습니다. 그것을 미소로 바라보던 여왕은 자신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더니 소매를 걷고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신하들도 여왕을 따라 손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의 회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화기애애하고 협력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서 그로인해 영국은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만큼 용서받은 사람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용서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용서의 능력을 소유하고 용서의 기적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