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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들 (히 1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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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말하라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불교는 산속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도를 깨닫고 수도하여 성불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부처’라고 하는 말은 곧 ‘깨달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명상과 사색은 중요시하는 정적인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거리의 종교입니다. 삶의 종교입니다. 삶의 현실, 역사의 현장에서 삶을 변화시키고, 생명의 역사로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중점을 둡니다. 기독교는 조용히 머무는 종교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살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생명, 곧 영원한 구원을 향하여 쉼 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착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그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 아닙니다.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성령은 권능, 힘,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 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자면, 태양은 성부하나님, 빛은 성자하나님, 열(에너지)은 성령하나님 입니다. 에너지는 곧 힘입니다. 이 힘은 씨앗 속에 있는 생명을 움직입니다.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에너지, 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성령의 에너지, 성령의 권능을 가지고, 생명과 영원한 구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남겼습니다. 그것은 곧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행동했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냥 묻어 두었습니다. 그것은 곧 움직이지 못 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버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속에 생명이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겨자씨 비유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씨, 그러나 그것이 심겨지고, 뿌리 내리고, 줄기가 자라면 새가 둥지를 틀 정도가 됩니다. 그 작은 씨앗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씨앗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 안에 생명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만 있으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식이나 생각하는 정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가 뭡니까? 죽은 사람은 그 세포 하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세포 하나하나마다 다 움직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은 내 안에 계셔”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은 그냥 머물러 계실 뿐입니다. 그 예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농 안에 잘 싸서 보관해둔 금덩이와 같습니다.
사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 움직이려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그냥 마루에 누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뛰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않으면 눕고 싶고, 그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굳이 어려운 길 보다 편안한 길 가기를 원합니다.

자녀 교육에 어머니들이 왜 그 열성입니까? 그 아이가 큰 뜻을 가지고 그 뜻을 이루도록 하려고 그럽니까? 아닙니다. 어떻게든 평하게 살기를 바라서입니다. 뜻을 가지면 오히려 힘든 삶을 삽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녀의 뜻과 어머니의 편안함이 부딪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영혼 구원에 이르기 위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힘들다고 그만 둡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봅니다.

1) 담대해야 한다.

(35절)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은 확신을 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버리지 말라.” 그러면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있다는 것입니다. “버리지 말라”는 말은 “있는 것 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만약 없으면 “담대함을 찾으라.” “담대함을 구하라.” 그랬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담대함을 가졌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하반 절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한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뭡니까?
로마서 6장 3-5절에,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 받은 우리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합하여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장사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으심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은 우리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 하였다면, 그래서 그가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다면, 그가 부활하심 왜 우리도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담대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면 예수님과 함께한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기었노라”는 한번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나간 것, 지금, 그리고 먼 미래의 것을 다 통틀어서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뭡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이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앞으로 이지만, 그 죽음을 이기신 것은 이미 벌써 전입니다. 그들은 이미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담대함을 어떻게 하라 하셨습니까?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또한 버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착각은, 한 번 은혜 받으면 영원하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한번 주입하면 그만인가요? 아닙니다. 늘 공급 받아야 합니다. 한번으로 다 되면 뭐 하러 매주 예배드리며, 주일 오후, 수요일 저녁 그리고 속회 새벽기도회 등 그렇게 예배드립니까? 그것은 에너지를 공급 받기 위한 겁니다. 만약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애기가 태어났습니다. 보니까 울기도 하고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 놈 살아있구나” 그리고 아무것도 안 먹입니까?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보약입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도 그렇습니다. 늘 주시는 은혜를 받기 보다는 어쩌다 한 번 보약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 사는 것은 어쩌다 보약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겁니다.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때 버리게 될까? 대체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낮에 길가는 것하고, 밤길 어두운길 갈 때 하고 어느 때 더 담대함이 필요합니까? 당연히 밤길 어두운 길 일 때입니다.
인생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대함이 필요할 때 늘 고난당할 때, 어려울 때입니다. 그래서 이럴 때도 둘 중 하나입니다. 담대함을 잃어버리거나, 오히려 담대함이 더욱 채워지거나.

사도행정 20장에, 바울이 빌라도에서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고별 설교 합니다. 21장에 예루살렘으로 향해 갑니다. 그 때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이번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당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질 거라고 예언합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당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 23장의 바울은 죽음 앞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23장 11절,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인하여야 하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중에 로마로 압송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에 의해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배 안에 있는 것 다 버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두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바울이 그들에게 큰 소리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하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며, 그때 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디까지 갈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곧 영혼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입니다. 그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담대함’을 ‘확신’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담대함은 버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습니다.

2) 인내해야 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향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36절)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소중한 품성입니다.
사람들은 인내할 줄 모릅니다. 한국인들은 “빨리 빨리”를 외칩니다.
사자가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보면 바로 덤벼들지 않습니다. 바로 성질내고, 덤벼들면 거의 실수합니다. 사자는 먹이를 보고 오히려 인내합니다. 살금살금, 가장 적절한 때, 가장 적절한 거리가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사람은 성질나는 대로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자신도 매사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참을성도 없고 기다릴 줄도 모릅니다.
목회자의 가장 힘든 일 중 하는 빨리 성장 안 되는 것입니다. 금방 100명 되고, 200명되고, 천 명 되고 그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짜증납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상한 거 하게 되는 겁니다.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니꼴로 파가니니가 어느 연주하던 중에 바이올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노련하게 연주합니다. 또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침착하게 줄 둘로 연주합니다. 또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그는 연주를 잠시 멈추더니 “줄 하나와 파가니니”를 외치고 노련한 솜씨로 연주했답니다. 연주가 끝나자 우뢰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마음대로 안 된다고 짜증 낼 것 없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오랜 역경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갖고 그 역경을 견디고 이겨낸 뒤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동물의 왕국”에 보면, 북극 사는 펭귄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놈이 그 알을 발등에 올려놓고 자기 몸으로 덮어 줍니다. 최소한 두 달 동안을 먹지도 않고, 꼼짝도 않고, 영하 30도의 강추위에 견딘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알에서 새끼가 부화 하는 겁니다.
약속이란 그냥 그 순간 되는 것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75세 때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와 그의 부인이 이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약속하신지 25년 만에 그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내하지 못하면 약속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인내 하십시오.
영혼 구원에 대한 약속,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인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까지 열매 중 하나가 인내입니다.
본문 37절,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이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오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머지않아 말입니다.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 그러나 담대함도, 인내함도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데서나 담대하나요? 무조건 참아요?
38절에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명이 있는 것, 또 생명이 없는 것조차도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도 다 하나님의 뜻과 있어야 할 목적이 있는 겁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세 종류의 사람 있습니다.

i)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옛날 생각, 과거의 향수와 미련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조상의 과거 벼슬을 자랑하고, “과거에, 소싯적에”를 들추어냅니다. 신앙인들도 “전에 어느 교회 다닐 때” “전에 어느 목사님 계실 때”를 말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지금 잘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물론, 가끔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셨지” 그것이 오늘 나의 신앙에 확신을 줍니다. 담대하게 합니다. 인내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지금과 그리고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광야 40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들 때마다 옛날 생각합니다. 고기가 없을 때 애굽의 고기 가마 생각을 합니다. 민수기 13, 14장에는 가나안 정탐하고 온 후 “우리의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다 죽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 그 들에게는 진전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ii) 현실주의자입니다.

“오늘 여기가 제일이요 최고”라고 생각 하는 겁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늙어서 못 논다고 지금 놀기만 하면 그 나중 삶은 어찌 됩니까?
사회 부조리라 여전합니다. 그토록 개혁을 이야기 하지만 아직도 뇌물 등으로 사회가 어지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중에 산수 갑산에 가더라도 지금은 먹고 보자”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과거도 필요 없습니다.  “그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남의 도움을 받았어도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어도 감사가 없습니다. 지금 잘 되어 있으면 감사하고 지금 잘 안되어 있으면 불평합니다.
이들은 미래도 꿈도 없습니다.

어느 언론사에서 서울 강남 압구정동을 서성대는 젊은이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의 꿈이 무엇입니까?” 젊은이가 대답합니다. “꿈이요? 왜 꿈을 꿉니까? 나는 꿈을 안 꿉니다. 오늘 저녁도 잠 안자고 밤 세워 놀기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밖에 없는 사람은 수시로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그러나 지금만이 아닙니다. 지금이 곧 과거를 이루었고, 지금이 곧 좋은 미래를 만드는 겁니다. 어제와 내일, 그 연결에서의 지금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지금을 사는 사람은 미래를 보고 달려가는 지금을 사는 사람입니다.

iii) 미래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꿈이 없는 삶,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그리 삽니다. “꿈과 소망이 없다”는 것은 이미 끝났다는 겁니다.
속초에 가면 ‘아바이 마을’이 있습니다. 그들은 휴전선 가까운 곳에서 모여 삽니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소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애굽에서 나왔다.” “해방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준비했습니다(믿음으로). 아브라함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믿음으로). 모두 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일을 바라보고 나아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신 겁니다.
“그냥 바라보고만 있지”가 아닙니다. 바라보고 달려가자는 겁니다. 거기 1절에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그랬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그랬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오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본문 38절에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민수기 13장, 14장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그것은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도착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상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바울은 “부름의 상”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달려가십시다.
때로 두렵지만 담대하십시오. 또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때로 힘들지만 약속을 믿고 인내 하면서 오직 앞을 바라보고 달려가십시다.
신앙도 그러하지만, 여러분의 삶도 그리해서 여러분과 저 그리고 이 교회의 큰 꿈들을 이루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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