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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상적인 지도자 (삼상 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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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우리는 대부분 크든지 작든지 선입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입견은 때로 우리의 귀를 막거나 우리의 눈을 가리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듣는 일, 보는 일, 혹은 책을 읽을 때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잘못 해석하게 만드는 그런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선입견은 지역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13일 전국 감리교회 191개 지방 감리사님들과 10개 연회 감독님들이 호남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8월 27일에는 전국적으로 감리교회 지도자 3만 명이 800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광주에서 모이게 됩니다.

교통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800대의 버스가 일시에 광주로 들어오면 광주 시내는 완전히 마비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광주를 점령하려고 가는 것입니다. 80년대 초 전두환 전대통령은 군부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를 광주로 보냈지만, 우리 감리교회는 복음으로 광주를 점령하기 위해 십가지의 용사들을 보내는 줄 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호난지역 선교연회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자로부터 지역 현황을 브리핑 받았는데, 놀랍게도 광주에는 교회가 1200개 정도가 있는데 그 중 감리교회는 10개 밖에 없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6개 교회는 미자립교회이고 자립교회는 4개 교회 뿐이라는 것입니다. 호남지역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를 잘아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과거 미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위하여 들어와 선교지역을 나눌 때, 서울 경기지역은 공동으로 하고, 남쪽은 장로교회 선교지역으로 정하였고, 북쪽은 감리교회 선교지역으로 하였으나 6. 25 동란을 맞이하면서 북쪽의 선교지역은 초토화되고 피란을 내려온 성도들에 의하여 영, 호남지역에 감리교회가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음을 통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와 충청남도 지역에서는 지금도 감리교회가 선교사역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반면에 , 삼남연회 다시 말하면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 지역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황임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이번에 감리교회 본부에서 호남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광주에서 선교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은 너무나도 적절한 결단임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전국에서 감리사님들이 모여 먼저 기도회를 갖고, 각 지방이 1개 동씩 맡아서 2시간 정도 전도와 여리고 거리 청소까지 한 뒤에 염주 실내체육관으로 모여 선교대회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특별헌금을 하여 광주광역시장에게 1억원의 헌금을 광주지역의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써달라고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순서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의 열악한 환경에 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하여 각 지방이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위논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부연회를 담당한 광산교회의 경우는 성전건축을 할 수 있도록 대지를 구입해 주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광주지역 교역자들은 여느 때보다도 더욱 간절히 주의 손길을 확신하며 기도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호남 지역을 위하여 전국적으로 선교와 봉사에 이렇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베풀에 준 적이 없었기에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광주 지역을 책임 맡고 있는 목사님이 우리 감리사 일행을 환영하면서 광주지역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이제는 호남지역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을 우리 감리교 지도자 여러분들이 먼저 없애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제일 대표적인 이야기가 전라도 사람들을 이야기 할 때 전라도 개똥쇠, 그렇게 비하하는 말을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원래 이 말은 전라도 개땅쇠, 갯벌을 일구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아주 어떤 농어민에 전형적인 표현이 잘 못 되어가면서 그렇게 표현이 됐는데, 그것부터 우리 지도자들이 알아 주시고, 고쳐주시면 좋겠다. 제가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흔히 무슨 일을 하다가 일이 잘못되거나, 어떤 동업을 하다가 배신을 하거나, 자기가 돈벌이 하다가 돈을 띄어먹다가 그러면, 꼭 저 사람이 전라도 사람이 되어서 그래. 이렇게 평가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늘 겪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이 나온 김에 우리 성도들 안에, 우리 크리스찬들 안에도 잘못된 이 선입견을 먼저 우리가 제거하는 작업을 해야 되겠다.

저는 경상도 사람입니다. 마산이 고향인데, 오늘은 전라도 홍보대사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천년 가까이 잘 못된 선입견을 준 장본인이 고려의 세조인 왕건입니다. 이 왕건은 자기의 통치이념을 팔도에 대한 사람을 평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절대로 중앙 정부에 등용을 해서 쓰면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산세를 보니까 금강이라고 하는 것이 활처럼 구비쳐서 중부지역에 흘러 가는데, 그 활의 중심에 화살 같은 모양으로 차령산맥이 서울을 향해서, 당시에는 개성이겠죠. 그 곳으로 향하고 있다. 반드시 배반할 징조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서울을 향해서 화살 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 같은 지형을 가졌기 때문에 반드시 배반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 지역사람들은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 이것이 왕건이 내린 지침이었고, 그래서 호남사람들은 중앙정부에 등용당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차단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수백년이 흐르다가 또 그 일에 더 불을 붙인 사람이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었습니다. 대원군도 팔도에 사람들을 평가하면서 왕건과 비슷한 이야기로 해서 지역에 대한 편견을 부추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평안의교회 성도들은 이런 잘못된 특정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천년 가까운 쉽지 않은 편견이지만, 이 편견을 깨뜨리는 일에 여러분들이 앞장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절대로 무슨 일을 해서 실패를 보거나 손해를 보았을 때 그런 표현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서울 사람들은 사기를 안 칩니까? 경상도 사람들은 도둑놈이 없습니까? 왜 그런 표현을 해야 하는지 몰라요.

며칠 전에 우리 집사님 몇 분과 축구 경기를 갔었어요. 부천 종합 운동장이 생긴 이후에 처음 갔습니다. 왜냐하면 목요일 저녁에 경기가 있었기 때문이예요.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에 계속 경기를 해서 마음이 원인데, 갈 수가 없었지요. 처음으로 목요일 저녁이라고 해서 눈이 동그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과 몇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집사님들이 그래요. 우리 묘자리를 잘 못 써서 그런가 여기 뭐 어쩌구 저쩌구 그래요. 제가 그래서 그 이 집사들이 정신 나간 집사들 이구만. 지금 목사 앞에서 집사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앞에서 아주 면박을 주었어요.

보통 우리 크리스찬이라는 사람들도 무슨 일 하나 잘 안 되면 이게 조상 탓인가. 묘자리를 잘 못 썼나.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자기 은연중에 선입견에 들어있는 빼앗을 수 없는 뼛속에 파 묻혀 있는 잘 못 된 생각들 이예요.

사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지역적인 편견이, 천년이 넘어온 지역적인 편견을 제가 한 번 드린 말씀으로 솎아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입견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서론을 시작했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 오늘 제가 사울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데, 사울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이미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울, 불순종한 사람, 주의 종에게 불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을 가고, 결국은 심판 받아 죽은 사람,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울 같은 인생을 살지 말자.

결론이 이미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오늘 설교는 들을 것도 없어요. 분명한 것은 오늘 9장 말씀은 사울의 그러한 잘못된 삶, 이전에 순수했던 사울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에게 가지고 있던 그런 편견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다 치우고, 순전한 모습으로 순전한 사울의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들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절에 보면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자기의 가정에 쭉 족보가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사울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가 나와 있습니다. 외모가 소개되어져 있는데,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이만한 사람이 또 없다는 것입니다. 키가 커서 백성들보다 어깨만큼 더 높다는 거예요. 제가 이 말씀 생각하다 보니까 우리 허권사님네 상훈이 생각이 납디다. 그래서 우리 상훈이가 왕의 재목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키가 홀쭉 크고 준수한데, 백성 중에 그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평가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집안에 대한 소개입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외모에 대한 소개입니다. 다 훌륭한 그런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본론으로 들어가 봅니다. 3절에 보면 사울의 아버지, 기스라고 하는 분이 암나귀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한 일꾼과 더불어서 그것을 찾으라고 부탁을 했는데, 사울과 한 사환이 그 암나귀떼를 찾기 위해서, 에브라임 산지를 다 뒤지고, 살리사 땅을 다 뒤지고, 사알림 땅을 다 뒤지고, 결국 베냐민 땅을 다 뒤져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두지파에게 지파별로 땅을 분배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팔도에 경계가 있는 것처럼 지파별로 땅을 주었는데, 그 베냐민 지파땅을 다 다녀도 잃어버린 암나귀 떼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거지요. 굉장히 멀리 멀리 암나귀떼를 찾으러 나갔습니다. 결국 숩 땅에 이르러서 사울이 염려합니다. 암나귀떼를 찾으러 나갔다가 아버님께서 아들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시겠다. 돌아가자.

그 때에 사환이 사울에게 건의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가는 것 보다 이 지역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은 모든 분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능력이 있어서 그 분이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답되어지는 그런 분입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말하고,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이 가면 좋지만, 지금 우리가 보니까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 떨어졌는데, 무엇으로 그 분에게 다시 말하면 어떻게 빈 손으로 가겠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자 사환이 제 손에 은 한 세겔에 1/4,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남아 있는데,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10절에 보면 그 사환의 말을 듣고서 내 말이 옳다. 사환의 말을 인정하고, 선지자를 만나러가는 장면까지가 오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잡았습니다. 저도 역시 지도자이지만, 여러분들도 지도자인 줄 믿습니다. 교회에서 지도자중에 지도자가 누구냐하면 속장님과 강사님입니다. 속장님은 어머니처럼 속도들을 돌보는 지도자이고, 강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능력있게 선포하는 지도자입니다. 어떤 속회는 속장님이 어머니처럼 잘 돌보지를 않아서 스트레스 받는 속도원이 있고, 어떤 속회는 강사님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시원치 않아서 스트레스 받는 속회가 있습니다.

속장 좀 바꿔주세요, 강사 좀 바꿔주세요, 중간에 바꾸면 표가 나니까 일년 갑시다. 안타까운 담임목사의 권면이 따릅니다. 그리고 설득하지요. 어떻게 해요? 1년은 가야지. 다 바뀔때 바뀌면 표가 안 나지만, 중간에 그 속만 바뀌면 그것이 부흥이 되어가지고, 좋은 의미에서 바뀌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 내가 잘 못해서 짤렸구나.’ 이러면 또 무슨 시험이겠습니까? 그러니 그 사람도 생각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연말까지 갑시다. 그런 안타까운 목사의 권면이예요.

혹 여러분 속회 가운데, 속장을 잘 못 만났다거나 강사를 잘 못 만나서 스트레스 받고 계신 분이 있다면 연말까지는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참지 마시고, 기도해 주시면 더 좋겠어요. 우리 강사님, 기도하는 강사님 되셔서 말씀을 연구하시는 강사님 되셔서, 능력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달라지면 되잖아요. 우리 속장님 자기 일에 바빠서 속도 돌보는 일 신경 안 쓰는데, 우리 속도들 어머니 같이 돌보는 좋은 속장 되게 해 주세요.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지도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 받아야 하고, 그 공동체에서 선교회의 임원도 지도자입니다. 교사도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들이 많아요. 그러나 그 지도자들이 어떤 모습을 가져야 정말 바람직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인정 받고 존경 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도의 제목이요, 고민입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도의 제목이요, 고민입니다. 저는 세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우리 지도자들의 모습은 순종의 미덕을 가진 지도자여야 하겠습니다. 순종이라고 할 때 첫째는 가정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지도자,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않는 지도자는 지도자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님들에 순종하십니까? 순종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들만 순종을 말할 것 같지만, 사실 여러분들도 다 부모님이 계시잖아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십니까? 여러분의 기분에 맞는 것만 하고, 맞지 않는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그런 삶을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두 번째 우리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그 지도력에 의해서 그 교회가 지어져 갑니다. 우리 부천의 어느 교회는 목회자가 정말 성실하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교회가 800명 모이던 교회가 점점 더 줄어서 300명까지 내려갔어요. 결국은 교회의 장로님과 지도자들이 ‘더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하고, ‘목사님, 이제 다른 데로 가셔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 분이 오셔서 열심히 교회를 부흥시키면서 지금 거의 절반이상 갑절의 부흥이 된 줄 믿습니다. 매 주일 열명이상 나갔던 그 교인 중에서 희망이 없다고 다른 교회로 갔던 분들이 열명이상 매주 돌아오고 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교회 장로님을 만났어요. ‘장로님 새로 오신 목사님 어떻습니까?’ ‘너무 좋아요’ 아주 눈을 꼭 감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너무 좋으면 눈을 감아야 하나봐요. 그래서 제가 그 분의 표현을 보면서 지금 저 장로님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고,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저렇게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하면 지도자가 똑바로 하면 저렇게 좋아하는걸. 왜 못했을까? 그 교회는 지금 행복에 들떠 있습니다. 순종하는 미덕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사울은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떼를 찾기 위해서 정말 멀리멀리 갔어요. 베냐민 땅을 다 두루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아버지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때문에 걱정할까. 거기까지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상적인 모습은 겸손의 미덕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1절말씀을 보면 사울이 베냐민지파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사실 베냐민 지파는 열두지파는 열두번째 막내 지파입니다. 위치로 봐도, 서열로 봐도, 규모로 봐도, 베냐민지파는 지도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임명을 받았을 때에도 그 스스로 뭐라고 이야기 했느냐 하면, 우리 지파는 미약한 지파인데, 어떻게 왕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을 가졌습니다.

왕으로 뽑히고 나서 너무나도 자신이 그 부분에 있어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많은 짐을 쌓아둔 그 짐 뒤에 숨었다고 그랬어요. 왕으로 임명을 해 놓았는데, 왕으로 기름을 부었는데, 저 뒤에 가서 숨는 사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이 됩니까? 우리 지파는 미약한 지파인데, 어떻게 우리 지파에서 왕이 나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사울을 겸손의 사람으로, 순종의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이 사울을 준수한 사람으로 평가를 했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지도자라도 100%는 될 수 없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성경에는 일부 비류라고 그랬어요. 비류라고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그런 폭력배 라던지, 어떤 신앙지역에서 탈선한 그룹이라던지 별로 좋지 않는 의미에서의 집단을 말하는데, 그런 비류들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앞에 와서 면전에서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느냐고 얼마나 면박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미 사울은 왕으로써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왕으로써의 권세를 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그렇게 앞에서 모욕을 당했는데도 사울은 그들에게 해꼬지 하지 않았어요. 왜? 당신들 말마따나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미약한 지파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더 감동을 받았어요. 왕으로써 저렇게 모욕을 면전에서 당하는데, 그것을 참다니, 그것을 참아주다니, 역시 사울은 그릇이 크다. 오히려 사울은 겸손으로 인해서 더 백성의 존경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사울의 이 행위 속에서 보면 사환이라고 하는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그 사환의 건의와 충고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만나자고 하는 그런 권위를 받았을 때 그러면 가자라고 그랬다가,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데, 뭔가 드릴 것이 없는데, 어떻게 빈 손으로 가겠느냐라고 난처해 했을 때, 사환은 제가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있으니까 이것이라도 가지고 가십시다라고 권할 때 내 말이 맞다고 하면서 함께 주의 종을 만나러 가는 사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목회자를 사랑하는 일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되는데, 여러분들이 1년이 지나도 담임목사와 식사 한번을 못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교인이 천명을 넘어서 너무 교인이 많아서 그런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성도들이 목사를 대접하려고 그러면 마음에 부담을 갖습니다. 그래도 저 신라호텔에 가서 뷔페는 사드려야 할텐데, 저 명월관에 가서 갈비와 냉면은 대접해야 할 텐데, 그러다보니까 언젠가는 하겠지, 언젠가는 해야지. 그러다 1년 가고, 2년 가고, 10년이 갑니다. 저는 너무 안타까워요.

우리가 만남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정상적인 폼을 가진 그런 공식적인 만남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제 새로 나온 한 성도가 팥칼국수를 했다고 그래요. 우리 김미숙성도님 식당에서도 팥칼국수를 하는데, 팥칼국수를 집에서 했대요. 그게 전라도에 아주 중요한 음식이라고 그래요. 저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본인이 목사님에게 대접하는 걸 이 팥칼국수 한 그릇을 가지고 오는게, 이것을 드리고는 싶은데, 이것을 어떻게 드릴까? 고민하다가 속장님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드리고 싶은데, 될까요?’ ‘아우, 좋아하시죠? 목사님이’ 그래서 속장님하고 같이 오셨어요. 저는 우리 가족들과 팔칼국수를 나누어 먹으면서 크나큰 성도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얼른 제 사무실로 내려가서 제 수첩을 뒤지고 새 가족 카드를 뒤졌어요. 그리고 그 성도를 찾아내고서 제가 이렇게 메모를 했습니다. ‘팥칼국수 가져왔음’ 여러분이 갈비 사 준 것은 적어놓지 않습니다. 그 분은 새 가족이고, 발걸음이 어려우실텐데, 그것을 담임목사에게 전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있었어요.

우리 할머니 성도님들은 담임목사가 상추 좋아한다고 상추를 밭에다가 텃밭에 심어가지고 그것을 끊어서 한 줌씩 가지고 오시는데, 그 상추 한 줌을 가져왔다고 딩동하고 목사님 만나기가 미안하니까 그걸 집 앞에 놓고 가셔요. 상추를 이제 펴보면 상추의 모양만 봐도 이게 누구 것인지 대강 압니다. 이것은 어느 권사님 거 겠다. 이것은 어느 집사님 것 같다.

사랑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이 사울의 마음처럼 무언가 우리가 주의 종을 만나려면 좀 준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할 때에, 사환의 이야기는 그것도 좋지만 여기 작은 것 있으니까 가져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사울이 그 건의를 받아준 거예요.

저는 이 말씀 준비하면서 그 칼국수를 더 은혜롭게 먹었다는거 아닙니까? 내일부터는 칼국수가 미어터지겠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그런 작은 사랑들이 얼마나 저로 하여금 신나게 만드는지 몰라요. 지금 중요한 것은 사울이 이름도 없는 사환의 건의를 순전하게 받아주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도자되면 자존심이 생겨요. 내가 생각해낸 이야기가 주장되지 않으면 괜히 마음이 상하고 그런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은 사환의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거듭 받아들이고 있어요. 내 말이 옳도다. 그것은 결국 열린 마음의 모습이고, 이상적인 지도자가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나누면서 저를 포함해서 모든 평안의 성도들,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영향을 행사해야 할 평안의 지도자들이 이 순종의 미덕을 소유한 이상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겸손의 미덕을 소유한 지도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도 받아들일 수 있고,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한 지도자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사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함을 가졌으나 하나님을 은혜로 세움을 입었을 때 언제나 겸손의 자리에 서게 하시고, 순종의 자리에 서게 하시고, 열린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언제나 주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이 되어지는 아름다운 충성의 지도자들로 삼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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