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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 (대상 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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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우리가 보통 ‘요단강 건너편’ 하면 제일 먼저 상기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모르기는 하지만,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 가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찬송은 장례식 때 잘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요단강’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요단강 건너가서’ 즉 죽고 나서도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요단강 건너는 것을 죽음에다 비유하는 이유는, 요단강 건너기 전에는 광야와 같은 세상이 있고 그것을 건너가면 가나안과 같은 천국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하여간에 그런 찬송 가사 때문에 우리에게는 ‘요단강 건너편’하면 곧 ‘죽음’이 상기되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요단강 건너편’이란 말은 순전히 지리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을 동서로 나누는 요단강을 중심으로, 요단강의 동쪽에 있는 땅을 두고 요단강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 부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요단강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단강 서쪽 지역이 또 ‘요단강 건너편’에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요단강 서쪽 지역이 가나안의 중심인 까닭에 일반적으로 ‘요단강 건너편’ 하면 바로 요단강에서 동쪽에 있는 땅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역대상 5장에 기록된 지파들은 바로 이 요단강 건너편, 즉 요단강 동편에 위치한 지역에 살게 되었던 지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오게 될 때,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반에 속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지역에서 생활 터전을 먼저 잡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역대기가 기록될 때 즈음에는, 다른 지파들과 마찬가지로 이 요단강 동편의 지파들 역시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다 멸망을 당한 후였습니다.
이 세 지파, 정확히 말하자면 둘과 반 지파에 관한 역사와 족보가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요단강 건너편’에 살던 지파들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서, 교회와 신자가 참된 축복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물질 축복보다 영적 장자권을 훨씬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진짜 좋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해 올 때 다른 지파들보다도 먼저 땅을 차지하는 특권을 누린 지파들이었습니다. 본문 역대상 5장 3절로 10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 요엘의 아들은 스마야요 그 아들은 곡이요 그 아들은 시므이요 / 그 아들은 미가요 그 아들은 르아야요 그 아들은 바알이요 / 그 아들은 브에라니 저는 르우벤 자손의 두목으로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로잡힌 자라 / 저의 형제가 종족과 보계대로 족장 된 자는 여이엘과 스가랴와 / 벨라니 벨라는 아사스의 아들이요 세마의 손자요 요엘의 증손이라 저가 아로엘에 거하여 느보와 바알므온까지 미쳤고 / 또 동으로 가서 거하여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 지경까지 미쳤으니 이는 길르앗 땅에서 그 생축이 번식함이라 / 사울왕 때에 저희가 하갈 사람으로 더불어 싸워 쳐 죽이고 길르앗 동편 온 땅에서 장막에 거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것은 야곱의 첫 아들 르우벤 지파의 족보입니다. 6절에 보면 「브에라」라는 두목이 앗수르 왕에게 사로잡혔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앗수르 제국의 제1차 침략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그 때를 제외하고는, 이 르우벤 지파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제3차 침입 때 완전히 망하게 되기까지는 자기네들의 땅에서 「생축이 번식」하는 목축업의 축복을 누리면서 잘 살았습니다.
특히 벨라라는 족장의 지도 하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그 때에 「길르앗 동편 온 땅에」 최고의 영토 확장까지 이루어졌다고 본문이 밝히고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가 번성하며 살았던 길르앗 땅이란 ‘요단강 건너편’ 지역을 위, 중간, 아래로 삼등분 해 볼 때 제일 아래쪽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진군해 들어 올 때, 제일 먼저 차지하게 되었던 땅이 바로 이 지역이었으며, 바로 그 땅을 르우벤 지파가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시간적으로 따져 볼 때,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이 각기 자기 땅을 차지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동시이지만, 이런 지리적인 순서를 볼 때, 르우벤 지파는 열두 지파 중에서는 물론이고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 중에서도 제일 먼저 땅을 차지하게 된 지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안정된 축복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가나안 땅을 얻는 것이 모든 지파들이 최고로 갈망하는 제일의 목표가 되고 있던 시기에, 그 땅의 기업을 남보다 먼저 얻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물질적인 축복에 있어서는 제일 첫째를 누렸던 르우벤 지파에 대하여, 본문은 마치 찬물을 끼얹는 듯한 냉정한 서두를 달고 있는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의 이런 물질적인 축복에 대한 기록 바로 앞에 있는 1절과 2절 말씀이 어떻게 충격적인 쐐기를 박고 있습니까? 기록하기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르부벤은 족보에 장자로서 기록되지 못하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원래는 장자로 태어났지만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즉 자기 서모와 간음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모든 장자권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물질적인 장자권은 요셉에게로 돌아갔고, 영적인 장자권은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 를 배출시킨 유다 지파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유다 지파가 르우벤 대신 누리게 된 것이 바로 영적인 리더쉽이 강조된 장자권이었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바로 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물질적 장자권을 잃어버린 것은 그래도 ‘요단강 건너편’ 지역의 땅을 제일 처음 차지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메꿀 수 있었다고 하겠지만, 이 영적 장자권을 잃어버린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도무지 회복될 수 없는 엄청난 손실이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었습니다.

성경은 르우벤 지파의 자손에 대하여 기록할 때 다른 그 어떤 것들보다도 바로 이 사실을 가장 요긴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장자권의 상실이야말로 이 르우벤 지파의 역사에 있어서 실로 결정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본문은 ‘르우벤은 원래는 장자였지만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을 받은 자로서 기록되지 못하게 되었다.’라는 사실을 제일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하여 바로 이 영적 장자권, 영적 리더쉽의 축복이 귀중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물질적으로 축복받는 것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더 약한 교회를 돕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여러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물질적으로 복을 받고자 기도해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장자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교인이라고 다 불신자보다 더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교회도 물질적으로만 따질 때 이 세상의 다른 단체보다 가난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상 교회를 통하여 돌아가는 금전의 액수는 세상 영리 단체의 규모와 비교할 때는 상대도 될 수 없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국가와 사회, 민족과 개인의 영혼을 리드하는 고유의 장자권을 소유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신자들 또한 이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영력을 발휘하는 장자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권자’를 배출시킨 유다 지파처럼, 장차 재림하실 그리스도께로 똑바로 이어지는 이 장자의 계보를 생명처럼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신자는 ‘형제보다 뛰어난’ 유다 지파처럼, 예수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이라는 이 최고의 보배를 간직하고 불신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이끌어 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화육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이 구속사의 계보에서, 참된 구원 신앙, 진짜 천국 소망을 지키고 전파하는 이 장자권이야말로 교회와 신자가 결코 빼앗기거나 잃어버려서는 아니 될 최고의 권리요 자산이요 축복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이 ‘형제보다 뛰어난’ 장자권, 세상 나라와 족속들 앞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주권자’를 선포하는 이 영적 장자권이야말로 물질적 축복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인 줄 알고 귀중하게 간직하며 자랑스럽게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받은 축복에 안주하지 말고 새 사명을 위하여 계속 일해야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역대상 5장 11절 이하 17절에는 갓 지파 자손에 대한 족보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어지는 18절 이하의 말씀에는 이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이 어떻게 그 땅을 정복해 나갔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18절로부터 22절에 기록하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의 나가 싸울만한 용사 곧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기어 싸움에 익숙한 자가 사만 사천 칠백 륙십인이라 / 저희가 하갈 사람과 여두르와 나비스와 노답과 싸우는 중에 /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하갈 사람과 그 함께한 자들이 다 저희 손에 패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셨음이라 / 저희가 대적의 짐승 곧 약대 오만과 양 이십 오만과 나귀 이천을 빼앗으며 사람 십만을 사로잡았고 /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으니 이 싸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이라 저희가 그 땅에 거하여 사로잡힐 때까지 이르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 요단강 동편 지파의 사람들은 전투에 매우 능한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용사였으며 방패와 칼을 들고 활을 당기어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전쟁에 아주 숙달된 훌륭한 군인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이들이 요단강 동편을 점령해 나갈 때 항상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그들이 대적과 싸우는 도중에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즉 순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도우심을 입게 된 것은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셨음이라」고 본문에 기록했습니다. 싸움에 나가야 할 일이 생기니까 먼저 하나님께 철저히 매달리고 도와주실 것을 위하여 기도할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전투의 결과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즉 하나님께서 맡아서 이기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은 전쟁에서 연전연승이었고 가는 곳마다 막대한 전리품들을 얻었었습니다. 그들은 그 얻은 땅에서 거하면서 「사로잡힐 때까지」 즉 앗수르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때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싸울만한 용사」들이 많이 있고 「싸울 때」가 끊임없이 이어질 때, 이 ‘요단강 건너편’ 지파들은 계속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더 많이 받는 전성기를 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있어났습니까? 본문 역대상 5장 23절로부터 26절에 기록하기를 「므낫세 반 지파 자손들이 그 땅에 거하여 번성하여 바산에서부터 바알헤르몬과 스닐과 헤르몬 산까지 미쳤으며 / 그 족장은 에벨과 이시와 엘리엘과 아스리엘과 예레미야와 호다위야와 야디엘이라 다 용력이 유명한 족장이었더라 /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하숫가에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대로 이 ‘요단강 건너편’ 지파의 사람들은 용사로 유명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므낫세 지파에 유명한 용사들이 많았는데, 여기 24절에 보면 그들을 가리켜 「다 용력이 유명한 족장」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그 요단강 동편 지역에서 「번성하여」 자기네 생활 터전을 어느 정도 확보하게 되자 그만 방심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기는」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싸움에 능한’ 핏줄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나안 정복 초창기의 용사들보다 더 「용력이 유명한」, 즉 지휘관이나 용사로서는 더 능력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나안 완전 정복이라는 목표를 도중에 포기하고 이미 점령한 지역에만 안주하려고 했을 때부터 문제는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장 큰 문제는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정조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로 가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들 지파의 선조들은 그들 자신이 받은 용사의 자질에다, 싸울 때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르짖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그 땅을 정복하고 그 풍성한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손들은 그 물려받은 용맹은 놀면서 썩혀 버리고, 그 전해 준 신앙은 다 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있어났습니까? 26절에 보면, 이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은 앗수르 제국이 침략해 왔을 때, 그 원래 살던 땅에서 강제 이주를 당하여 이방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는 비참한 지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용력을 싸우는 데에 사용하지 아니하고 따라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신앙마저 잃게 되었을 때에는, 뭐 ‘조상 적부터 유명한 용사들로 지파’라든지 뭐 ‘용력이 유명한 족장들이 이끄는 전통 있는 지파’ 어쩌고 하는 것들은 그 대적들 앞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상의 전투교회도 마찬가지로 계속 싸울 때가 좋은 때가 됩니다. 교회가 어떤 어려운 일에 계속 부딪히고 성도들이 온 힘을 다하여 한 목적을 위하여 매달릴 때에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그 앞에서 계속 부르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야말로 영적 생기가 넘치고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는 체험을 실제로 겪게 되며 그 결과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들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인적 자원이 있고 아무리 좋은 재정 바탕이 있다 하더라도 그저 안온하게 앉아 있는 교회는 결정적인 시험이 닥쳐오면 한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입니다. 유명한 전통만을 자랑하는 교회, 자기 교회 교인들은 다 ‘좋은 사람’들만 모였다고 으쓱대는 교회, 교회 건물 하나 마련해 놓았다고 마치 할 것 다 해 놓은 것처럼 이제부터는 어찌하든지 평안히 안주할 길만 모색하는 교회 - 이런 교회야말로 마귀의 좋은 먹이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은 썩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말 받은 축복이 계속 이어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선한 일을 위한 목표를 끊임없이 세우고, 그 싸움에 익숙한 용사 신자들을 계속 양육해 내고, 그 실전에 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간절히 부르짖을 줄 아는, 이 전투태세를 한시라도 늦추어서는 아니 됩니다.
경향교회의 지나온 30년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 교회와 성도들은 그 30년 동안 한 순간도 영적 싸움을 멈춘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숨 돌릴 틈도 없이 싸워야 했기 때문에 기도 또한 끊일 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당신께로부터 말미암는 승리의 전과를 계속 부어주셨습니다.

지난 30년을 통하여 이미 증명되고 체험된 이 축복의 길을 우리가 어찌 이제 와서 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선배 성도들이 싸우고 이루어 놓은 이 축복의 터전에 결코 안주하지 않고, 이 경향교회를 이제부터 더 훌륭한 그리스도의 용사를 배출해 내는 요새로, 더 큰 싸움을 싸우는 사령부로, 그래서 결국 더 큰 축복을 계속 넘치도록 받아 채우는 창고로 누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은 이 쪽 지파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러운 것을 먼저 다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남 먼저 땅을 차지하고 생활의 기반을 잘 잡았습니다. 그들은 싸움에 능한 용사들이어서 연전연승하고 그 판도를 넓혀 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장자권이 상실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끝까지 싸우는 전투의식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신앙이 사라져 갔습니다.

우리 경향교회는 ‘다른 지파’ 사람들 앞에 어떤 교회로 보여야 하겠습니까? 예산이 부요한 교회, 크고 좋은 예배당을 마련하고 이제 건축헌금할 걱정은 없는 교회로 보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용두사미가 되었던 ‘요단강 건너편’ 지파도 누렸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먼저 ‘장자권’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을 똑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 수 있는 능력, 민족과 국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관을 가지고 지도할 수 있는 리더쉽, 바로 이와 같은 영적 장자의 족보를 지키는 교회가 되기를 저는 진정으로 소원합니다. 우리는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계속 싸우는 ‘전투태세’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 각자가 다 영적 싸움에 능한 용사가 되고 싸우기 전에 항상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래서 싸운 후에는 반드시 더 큰 승리의 축복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저는 정말 소원하고 있습니다.
물질 축복보다 영적 장자권을 더욱 귀중히 간직하고, 주신 축복에 안주하지 않고 새 사명을 위하여 계속 일하는 가운데, 이 ‘경향 지파’를 통하여 제일 좋은 축복을 끝까지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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