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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보다 귀한 자녀(9) (엡 6:4 ,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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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호목사 (높은뜻숭의교회)

영락교회에서 고등부를 맡아 섬기고 있었을 때 고등학교 3 학년 아이 하나가 찾아와 ‘목사님, 공부가 인생의 전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긴 설명하지 않고 그냥 ‘아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싱거운지 그냥 가려고 하는 아이에게 기습적으로 ‘너 공부 못하지?’하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당황하며 ‘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당황해 하는 아이에게 ‘나는 이제껏 공부 잘하는 놈 치고 그런 질문 하는 놈 한번도 본 일이 없다’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내가 너 망신 주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진지하게 아이에게 또 물었습니다. ‘네가 지금 공부를 좀 잘 못하고 있는 까닭이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냐 아니면 게을러서 공부를 못해놓고 핑계를 하는 것이냐?’ 아이는 머리를 긁으며 ‘핑계가 맞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그런 쓸데없는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핑계하지 말고 그럴 시간이 있으면 열심히 공부하라 일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행히 그날 그 아이와의 대화는 좀 충격적이고 도발적이었지만 틀어지지 않고 잘 되었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그 해에는 대학 진학에 실패했지만 그 다음 해에는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 할 수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공부를 잘 할 수도 있고 좀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좀 성실 할 수도 있고 좋은 일은 아니지만 좀 게으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공부를 좀 잘 못하는 것도 인정할 수 있고, 좀 게을러서 실패하는 것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언제나 성실할 수만 있고 언제나 다 성공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자신이 게으르고 부족하여서 공부를 못해놓고 ‘공부가 인생의 전붑니까?’라는 식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은 싫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그깟 공부 잘하는 놈들’하며 함부로 남의 승리와 성공을 헐뜯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 것은 싫습니다. 그것은 비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제가 졌습니다. 제가 모자랐습니다.’라고 인정하고 최선을 다한 승자의 승리를 인정하고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저는 부조리한 사회적인 구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성공하고 승리하며, 최선을 다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무조건 그것이 사회적 구조의 문제라고만 몰아붙이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고 제 자녀들은,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불의한 사회적 구조를 이용하여 남을 억울하게 하며 성공하고 승리한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면서도, 정말 성실하게 자신의 최선을 다한 사람의 성공과 승리는 인정해 줄 줄 알고 축하해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국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영국의 고등학교에 일본 학생 하나가 이민을 와서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국의 학교는 일본 아이가 오기 전까지 브라운 이라는 학생이 늘 전교 일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본 학생이 오면서부터 전교 일등 자리가 그만 바뀌고 말았습니다. 시험을 볼 때마다 그 일본 학생이 전교 일등을 맡아 놓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아이들이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그것은 브라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일등 자리를 되찾아 보려고 노력을 해 보았지만 시험을 보면 번번이 일본 학생이 전교 일등을 차지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아이가 그만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꽤 여러 날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퇴원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영국의 학생들은 이번에는 브라운이 전교 일등을 당연히 하게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에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그 일본 학생이 전교 일등을 하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학교 수업도 제대로 듣지 못한 일본 학생이 전교 일등을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궁금해 했습니다. 일본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학생이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동안 브라운이라고 하는 학생이 날마다 병원을 찾아와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병원 입원으로 충분히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도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은 일본 학생도 대단했지만, 자기의 경쟁 상대라고 할 수 있는 일본학생에게 학교 배운 내용을 전해주고 노트를 베끼게 해 준 브라운이라고 하는 영국 아이는 참으로 대단한 아이였습니다.

남의 일등을 언제나 눈 꼴 시어하고, 어떻게 하든지 끌어내리려고 하는 비열한 본성이 우리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이등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일등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까지 준다는 것은 너무 훌륭하고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 그런 스케일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온 후배 목사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유학 중에 직접 보았던 일인데 금방 결혼한 신혼부부가 17년 된 중고차가 아닌 정말 고물차를 예쁘게 장식하고 깡통을 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타고 가는 것을 보고 감탄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 아이들 어디에서 ‘17년 된 고물차, 녹이 쓸고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는 차를 신혼여행 차로 꾸미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타고 다닐 수 있는 힘이 나오는가?’가 참으로 놀라웠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벤츠를 타는 사람이 되기보다 (저는 제 아이들이 벤츠를 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솔직히 좋겠습니다) 17년 된 고물차를 타고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밝게 살 수 있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당당함과 자신감을 어떻게 밴츠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 아이들이 17 년 된 고물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벤츠를 타는 사람을 무조건 시기하지 아니하고, 인정해 주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축하해 줄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이 있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의한 사회적 구조만 생각하고 모든 성공과 모든 승리를 다 그와 같은 것에 의한 것으로만 생각하여 모든 성공과 승리를 부정하고 죄악시 하고 공격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사고방식이 사회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와 같은 사고방식에 의한 세상은 100년의 실험을 끝으로 실패하였습니다.

저도 불의한 사회적 구조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구조를 바꾸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제 아이들이 그와 같은 불공평한 구조를 이용하여 쉽게, 쉽게 인생의 성공과 승리를 도적질 하는 것이 싫습니다. 저는 대형교회 목사 아들이 목사 아들이라고 하는 특권과 지위를 백분 활용하여 아버지의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형교회 목사 아들이 아니지만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성실히 공부하며 목회의 길을 쌓아 올라가는 많은 목회자들에게 절망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 목사 아들도, 그렇지 못한 가난한 신학생과 목회자도 공정한 기준과 상황 속에서 경쟁하는 구조를 깨트려서는 안 됩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저도 이제 제법 세상의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제 아이들이 저의 그와 같은 기득권을 잘 이용한다면 남들보다 쉽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와 같은 마음이 있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마음과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혀를 깨물고서라도 제 사랑하는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도록 몰아 부칠 것입니다.

저는 불의한 세상의 구조 속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인생의 승리와 성공을 도둑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압니다. 저들의 분노를 압니다. 제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저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게으름과 실수까지도 다 불의한 세상의 구조 때문이라고 핑계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무조건 모든 승리와 성공을 시기하고 정죄하고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제 아이들에게 공정한 게임을 요구하겠습니다.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살라고 가르치겠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게임에서 패배하였거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승리를 인정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축하해 줄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저는 그래야 세상이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승리를 무조건 부정하고 시기하고 죄악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세상이 절대로 진보하고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승리하는 게임을 하라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괜히 겉멋이 들어서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 베게 하고 누웠으니’ 하는 식의 삶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승리를 하찮은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공정하게만 게임을 한다면 최선을 다하여 승리하라고 요구하고 싶습니다. 고지를 정복하라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좋으나 실력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방면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싸움을 싸워 승리한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저 자리에 서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 봅니다. ‘앞으로 몇 년 쯤 이면 우리 아이들이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때까지 내가 살 수 있을까? 죽어서 천국에서 보아도 아무 문제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허락만 해 주신다면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합니다. 저는 거의 매일 그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이 자신의 게임에서 최선을 다하여 승리한 후 그 승리에 도취하여 교만한 자가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패배한 자를 우습게 여기며 깔보는 사람이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들을 함부로 해도 되는 패잔병으로 취급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게임에 있어서 승리와 패배가 인간의 차이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패배자의 최선을 인정하며 승리와 패배의 차이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승자의 입장에서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패배한 자를 격려해주고 저들과도 친한 친구가 되어 저들을 돕기도 하고 때로는 저들의 도움도 받을 줄 아는 승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승자가 되었을 때 겸손하여 패자를 격려하고 승자와 패자가 별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패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패배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여 승리한 승자를 인정하고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이 근사한 삶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와 같이 성공과 실패, 부함과 가난, 그리고 승리와 패배를 뛰어 넘는 근사한 삶을 살려면 세상적인 성공과 실패, 부함과 가난 그리고 승리와 패배를 뛰어 넘는 보다 근사하고, 보다 훌륭하고, 보다 의미 있는 가치를 발견하게 되게 되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높이고 자랑하려고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남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고 정말 인생을 걸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종과 상관없이 똑같습니다.

자기의 출신과 학력과 소유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출신과 학력과 지위를 소개합니다. 그와 같은 인간적인 조건에서 하나도 뒤질 것이 없는 바울은 그러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와 같은 모든 자랑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승자와 부자의 겸손함과 패자와 가난한 자의 당당함은 이와 같은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를 잘 믿어 하나님으로 인하여 배부름을 얻은 사람은 세상에서의 가난과 부함 그리고 승리와 패배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달리 그것에 초연하여 겸손할 때 겸손하고 당당할 때 당당할 뿐 아니라 승패와 상관없이, 빈부와 상관없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증거를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초대교회에서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하늘을 바라보게 된 저들에게 세상에서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저들은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서로 친구가 되어 서로 유무상통하는 정말 천국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예수 잘 믿는 자녀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성령으로 거듭하는 삶을 사는 자녀로 기도하며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사는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살게 하지만, 세상을 초월한 하늘을 바라보고 삶으로 승리에 겸손하고 패배에 당당한 삶을 사는 근사한 자녀로 욕심내며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에 앞서 그와 같은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 중에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맥아더 장군의 그 기도 위에 ’승리한 자를 인정하고 축하해 줄 줄 알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덧 붙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승자. 승리한 자를 인정하고 축하해 줄 줄 아는 패자는 참으로 근사한 삶을 사는 사람들 입니다. 살다보면 승리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항상 승리만 함으로 잘 사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경주를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하여 경주하면서도 승패를 떠나 승리에 겸손하고 패배에 당당할 수 있다면 그는 언제나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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