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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하지 말라 (마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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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물론 겉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키가 커진다든지, 얼굴이 예뻐진다든지, 날씬해진다든지 이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달라집니다. 점점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 삶속에서 주님의 향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마 5장-7장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속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예수를 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의 향기를 날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 한 가지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비판의 문제입니다. 비판에 관해서 우리 속사람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으려면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서 주님의 향기가 나려거든 비판을 자제하라는 말씀입니다

고슴도치는 온몸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 있습니다.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 뾰족한 가시에 찔리기 때문입니다. 온 몸에 돋아난 가시는 포식자들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준비된 일종의 방어용 무기입니다.
그러면 같은 고슴도치끼리 사랑은 어떻게 할까요? 재미있는 것은 번식기인 10-11월 사이에는 그 털이 일시적으로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가가 사랑하기 위해서 그 가시가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마음에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갈수록 더 억세져만 갑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비판하고 공격합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서로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속사람 안에 있는 가시가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더 이상 가시가 가시노릇을 하지 못하도록 가늘고 힘이 없어져야 합니다. 아니 가시가 아예 뽑혀나가야 합니다.


비판하는 이유

본문 1절을 보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은 바리새인들이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해 왔던 비판을 말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구분된 자신들을 드러냈습니다. 정말 그 비판으로 사람들이 깨닫고 고치고 변화되기를 바라서 하는 비판이 아닙니다. 이해심도 동정심도 없이 그야말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지 말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권면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허물을 말하면서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보면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심리적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 이유입니다.


1. 심리적 이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독특한 심리적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속으로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피해보려 합니다. 위안을 삼으려 합니다. “다 그렇지 나만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이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지각을 했습니다. 5분이나 늦었습니다. 자기 혼자 늦었습니다. 허둥지둥 뜁니다.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릅니다.

10분을 늦었습니다. 허둥지둥 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여럿이 여유를 부리며 걷습니다. 부장님도 저 앞에 걸어가고 계십니다. 자기도 여유를 부립니다.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심리가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고 지적하면서 속으로 자기의 허물에 대해 안도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입장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자기가 같은 잘못을 저질러 봤기 때문에 그 안에 남모르는 내용을 너무도 잘 압니다.

일전에 어처구니없는 보도를 본 일이 있습니다. 한 고위층 인사가 청소년 성매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지기를 그 사람이 과거에 그런 전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그 내용을 자기가 체험해 봤기 때문에 잘 알아서 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비판으로 자신을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심리가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비판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자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남의 허물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심리를 잘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비판의 유혹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2. 신앙적 이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나름대로 신앙적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영적인 우월감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당시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 당시 율법적 실천 규정을 무려 613가지나 정해 놓고 목숨 걸고 지켜왔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자기들의 의가 되었습니다. 이 의가 영적인 우월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규정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마 15:2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항변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여기서 장로의 유전이라는 것이 자기들이 정해 놓은 율법의 실천 규정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나름대로 어떤 원칙을 정해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남들을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자기는 매일 1시간씩 정해 놓고 기도합니다. 매일 성경을 30장씩 읽습니다. 물론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다음으로 용서의 은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죄를 범한 후에 침상을 눈물로 띄우며 요를 눈물로 적시며 철저한 회개를 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남의 허물을 신랄하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흘려야 할 눈물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안타깝게 여기고 위해서 기도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용서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의 그 크신 은혜를 잘 압니다. 죄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자기가 비판하는 그 비판이 죄 용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신앙적 오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판의 유혹을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

오늘 본문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실까요?

1. 우리가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

1절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이라는 구절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문법적으로 수동태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비판할 분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비판을 받을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생님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교실에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 위에 두었던 볼펜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도 아끼는 것이어서 무척이나 화가 났답니다. 그래서 교실에 있던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심하게 야단을 쳤답니다. 나중에는 학생들 하나씩 소지품 검사까지 했답니다. 그러나 나오지 않더랍니다.

화가 난 채로 집에 와서 옷을 벗다 보니 자기 안주머니에 있더랍니다.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랍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런 실수와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줄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비판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심판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먼저 우리는 비판하는 그 동일한 비판을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자기는?”하고 의문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 우리 안에 동일한 잘못이 있지는 않은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너나 잘해라”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판하는 그 심정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남을 비판할 때 무자비한 경우를 흔히 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집어든 사람들처럼 남의 허물을 향해 돌을 집어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고 있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무자비할 때 하나님께서 같은 무자비한 심정으로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비판하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돌을 들고 남에게 던지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머리 띠 동여매고 팔을 흔들면서 남을 공격하는 자리에 서 있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눈에 남의 허물이 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5절을 보면 한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자기 눈에 대들보만한 큰 통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작은 티가 들어있는 것만을 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타락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합니다. 자기가 하면 투자인데 남이 하면 투기입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인데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그래서 내 눈의 들보가 티로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눈의 들보를 들보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의 티가 티로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바늘 끝처럼 철저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와 허물은 뼛속 깊이 아파하고 괴로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실수와 허물은 관용을 베풀고자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눈의 들보가 들보로 보여야 합니다. 우리 눈의 들보가 티로 보이면 그 눈에 병이 든 것입니다. 이 영적 눈병을 고쳐야 합니다.


2. 기도해야 합니다.

남의 눈에 티가 보일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 사람의 허물을 이해하게 해 주십니다. 비판하려는 마음을 가라앉게 해 주십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그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실제로 남을 향한 비판은 그 사람이 그 허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비판은 오히려 그 사람을 방어적이 되게 만듭니다. 자기의 허물을 숨기고 가리게 몰고 갑니다. 오기를 부리고 나름대로 억지 논리로 자기 정당화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도는 다릅니다. 그 사람이 용기를 가기고 자기허물을 고백하게 해 줍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의 허물을 벗어던지게 해 줍니다. 허물 이전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3. 덮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과 허물이 있다는 말입니다. 들추기 시작하고 비판하기 시작하면 누구라도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물론 덮는다는 말은 죄와 사람을 모두 다 덮자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몰아내고, 사람은 덮자는 것입니다. 잘못과 죄를 턴다고 사람까지 버리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죄는 미워하셨지만 사람은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사람은 덮어주셨습니다.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으셨고, 계속해서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를 청산한 뒤, 철저하게 회개한 뒤 다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눈에 티가 보이거든 그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티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남모르게 그 티를 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티를 빼고도 아무런 문제없이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형제가 연약해서 실수할 때 그를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가 그 허물로부터 벗어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그를 덮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우리가 남의 티를 보게 될 때 철저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그분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니 이미 그런 잘못을 범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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