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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사랑 안에 있으라 (시 51: 5~7, 롬 8:26 ~ 28, 요 15:9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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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원용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시편 51: 5 ~ 7
  실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마음 속의 성실과 진실을 기뻐하시는 주님, 제 마음을 주의 지혜로 가득 채워 주십시오. 우슬초로 내 죄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8:26 ~ 28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 복음서 15:9 ~ 12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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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우리나라에 보수, 진보를 망라해서 14개 교단 목사들이 모인 한국목회자협의회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교인이 굉장히 많이 모인다는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였던, 이제는 은퇴했습니다만, 옥한흠 목사하고 저하고 대담을 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월간지 [기독교사상]과 한목협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옥한흠 목사가 저보고, 이번에 당선된 국회의원 중에 기독교인이 130명이나 있으니 나라가 바뀌겠냐고 묻기에 잘 안 될 거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묻기에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이 설교를 잘 못해서 그렇다. 국회의원 가운데 신자가 130명이라고 하지만, 물론 다는 안 그렇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교회 다니는 것을 로터리클럽에 다니듯이 그렇게 왔다 갔다 하고, 그리고 또 교회에서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사니까 장로도 시키고 집사도 시키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별로 기대를 안 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목사들이 설교를 좀 잘해라.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 뭘 뜻하는 건지 가르쳐주면 좀 낫지 않겠느냐?”

우리나라는 교회 신도가 불어난 속도로 보면 세계 제1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만, 문제는 정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믿는 사람”을 몇이나 만나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것은 의문스럽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공부 좀 했다는 사람, 또 사회적으로 지위가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금방 말한 대로 교회를 로터리클럽 비슷하게 생각하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고, 반대로 굉장히 보수적으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와 혼동합니다. 그래서 꼭 유대교 교인들처럼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면서, 예수님처럼 거지나 거느리고 다니고 심지어 세리나 창녀, 문둥병자나 만지고 돌아다니는 그런 경건치 못한 사람을 결코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없는, 유대교식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몇 년 사이에 교인수가 갑자기 많이 불어났습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보수파의 영향도 아니고 진보파의 영향도 아닙니다. 이 뿌리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중반에 미국에 나타난 로버트 슐러 목사가 중심이 된 적극적 사고방식이라고 알려진 경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신학은 믿음으로 기도만 하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 믿음 안에서 소원이 다 성취된다는 것이고, 이것을 슐러 목사는 possibility thinking 이라고 했습니다. 가능성의 사고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에 있는, 믿기만 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성서 구절과,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있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이 결코 없다는 성서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면 다 된다는 그런 적극적인 사고 방식, 가능성의 사고방식은 미국 기독교 교인 가운데 소극적인 신도들, 심지어 부정적인 신도들 속에다가 불을 붙여주고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이분은 교인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먼저 ‘오늘 하루를 하나님이 내게 주셨으니 오늘은 한번 멋지게 살아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 믿음으로 하면 다 된다는 성서 구절을 외우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머리를 숙이고 ‘나는 믿는다, 나는 믿는다, 나는 믿는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외고 그 다음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게 되니까 신앙이 굉장히 정열적으로 되어버립니다. 냉소적이고 답답한 사람들에게 불을 확 질러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슐러 목사가 있는 미국보다도 이 바람이 더 크게 분 나라는 한국입니다. 슐러 목사 교회는 저도 가보았습니다만, 주일에 약 1만명 정도 모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 바람이 부는 교회, 여의도의 한 교회만하더라도 주일날에 30만 명이 모입니다.

이런 신앙은 참 좋은데,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관심을 중심에 두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믿는다는 게 뭐냐는 것입니다. 믿으면 할 수 있다 하는데, 그 믿음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 신앙은 믿으면, 확신을 가지고 하면 된다 하는 그런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들은 시편 21편에서는,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죄인이다. 어쩔 수 없는 죄인으로 태어난 존재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은, 오늘 읽은 요한복음 말씀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을 듣고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다 자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는 은 삼십을 받고 스승을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불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여기에서 기독교 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교회가 이렇게 생겨나서 2천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만, 과연 우리가 교회 나온다고 해서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우리가 과연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할 수 없다. 그 말씀은 옳은데, 나는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를 사랑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은 것처럼 나는 그 사랑 안에 머물러서 그 사랑을 해낼 수가 없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첫출발입니다.

우리의 불가능을 부정하고, 할수 있다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한, 우리는 결코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는 하나의 불가능, 그것이 정직한 내 고백입니다. ‘이것은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어쩔 수 없는 존재다.’ 그렇게 고백할 때에 내 귀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네가 그런 사람이어서, 그래도 너를 버려둘 수 없어서 너를 위해서, 너의 그런 마음이 참된 사랑으로 바꿔지게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기도하시는데, 너무 기가 막혀서 탄식소리를 내면서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이 성령의 탄식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해낼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자는 욕심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도저히 해낼 수 없다.” 이렇게 할 수 없는 나는 탄식소리로 기도하는 성령의 기도소리를 듣게 됩니다. 저는 마치 이것이 심리학자인 칼 융이 말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들리는 소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표면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의 세계가 있는데, 무의식의 세계는 전 역사와 전인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표면의식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가장 깊은 그곳에서 성령의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때에 우리들의 불가능성은 소멸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그것은 로마서 8장 38절부터 39절까지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내게서 끊어져 나가고 단절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두가지의 불가능을 거쳐갑니다. 첫 번째 불가능은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나는 도저히 나를 내놓고 사랑하며 살 수 없는 존재다.’ 하는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불가능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베푸시는 사랑은 절대로 끊길 수 없다는 불가능입니다. 이 두 개의 불가능을 알게 되는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신앙이라 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 스승인 라인홀드 니버는, 그 당시 미국에서는 로버트 슐러 등이 적극적인 사고라는 것을 주창했고, 반대로 유럽에 있는 신학자들은 불가능을 말하고 있을 그때에, 불가능의 가능성, impossble possbility를 이야기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때에 비로소 가능성이 나오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제 스승의 생각에 저는 동감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나 자신의 노력으로 내가 바꿔질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으로써 죽음 자체를 정복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살아난다는 건 불가능입니다. 그 불가능을 정복해가지고 생명으로 바꿔놓은 바로 그 예수를 믿는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자신의 불가능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가능성을 믿고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신앙이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 탐욕이 지배하던 그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려서 드디어 자신 주변의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 사랑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 그리고 화해가 필요한 대결 구도, 이러한 것이 내 눈에 보여지고, 그래서 그리로 참여하러 들어가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게 될 때에야, 로버트 슐러가 말하는 적극적 사고, 가능성의 사고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능하게 합니다. 그 사랑이 바로 나를 가능하게 하는 그 가능성의 신앙이 생겨질 때, 내 삶은 나 자신과 내 가정에 몰두하던 데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제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또한 우리의 민족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 내가 꼭 해야 될 일들이 보이게 되고 그 일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도 로버트 슐러 목사와 마찬가지로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는 신자의 생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 몸은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안에 머물러 있음을 믿는 한, 나는 진정으로 부족하지만,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 평화가 파괴되고 전쟁으로 얼룩진 이 세상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 사랑에 응답하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때 무엇이 생기는가? 정말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나를 십자가에 내맡기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생각을 할 때 내 맘에 기쁨이 넘치듯이, 너희들도 정말 그렇게 살면 너희 속에서 기쁨이 넘쳐나올 것이다.”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그런 약속이 이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려는 우리의 활동이 겨자씨 같이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같이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던 예수님의 그 기적이 오늘 세계에서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믿고 언제든지 용감하고 기쁘게 사는 것이 나는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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