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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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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유대사람들 랍비들의 전승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천사가 광야를 지나가고 있는 두 나그네와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걷게 되었는데
서로 헤어질 때가 가까워 왔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말하기를
[ 나는 천사인데 여러분들과 오늘 이렇게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헤어지는 마당에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겠습니다.
그러니 한가지씩만 말씀하십시오. ]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한 사람은 욕심쟁이고 한 사람은 심술쟁이라고 합니다.
아주 욕심과 질투가 많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원을 들어주겠는데 먼저 말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말한 사람의 그것을 배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받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배를 받는다니까
욕심 많은 사람은 꼭 배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심술 많은 사람은 내가 못 받으면 못 받았지
다른 사람 많이 받는 것은 못 봐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누구도 먼저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떠나야겠다고 재촉을 합니다.
그러니까 욕심 많은 사람이 그 심술쟁이 목덜미를 붙들어 꽉 쥐고
[ 이놈아 빨리 말해. 말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 ] 고 합니다.
그러고는 숨을 못 쉬게 목을 조였어요.
그러니까 심술쟁이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 그래요, 그렇다면 말하지요. 나는 눈이 두 개가 필요 없거든요.
눈 하나는 없고 애꾸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소원입니다 ]
그랬어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욕심쟁이는 그 시간 두 눈 다 없는 시각 장애자가 되어버렸어요.
기막힌 얘기 아닙니까? 이것이 절대로 지나가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속에서 사람이 무엇인가를 많이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사람마다 문제가 많은데 그 문제를 분석해 보면 딱 두 가지예요.
하나는 욕심이고 하나는 심술이에요.
하나는 끝없는 욕심이고 하나는 끝없는 질투예요.
이 욕심과 시기 질투 때문에 나도 못살고 남도 못사는 거예요.
나도 못 받고 저도 못 받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다 망가져도, 일이 엉망이 되어도 사람이 욕심을 부리고 시기하고 질투할까요?
바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에 불만을 품은 선지자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남 잘되는 것이 배가 아파 못사는 못난 선지자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름은 요나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 란 뜻입니다.
성경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는 바로 온순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나는 비둘기가 아니라 성난 염소가 되어 있습니다.
혹 우리도 선지자 요나같이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아니한다고
하나님 앞에 성난 염소가 되어 있지 아니한지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절 보세요 [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
뭐 때문에 지금 요나가 뿔이 났습니까?
먼저 요나가 누구입니까?
요나는 북 왕국 이스라엘 출신으로
B.C.793부터 B.C.753년까지 약 40년간 활동한 선지자였다.
이러한 요나는 B.C.760년경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회개시키도록 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욘1:2절에
[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하고
다시스(현재 스페인 서남단 도시)로 달아났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는데,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니느웨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가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읍처럼
스스로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타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풍랑을 일으켜서 막으시고
요나를 깊은 바다에 던지도록 하셨습니다.
그 후 요나는 삼일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깊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니느웨 선교사명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요나는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요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니느웨 백성은 철저히 회개했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요나는 심히 싫었고 크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화가 나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니느웨의 회개로 상황이 변한 탓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북쪽은 이스라엘이고 남쪽은 유다입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은 그 위에 있는 앗수르 나라가 쳐들어와서
나라를 온통 망하게 하고 포로해 가고
또 돌아와서 잡혼을 하고 해서 아주 이스라엘을 망가뜨렸어요.
이 앗수르 나라는 한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는 원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니느웨성이라는 말은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아주 멸망시킨 그 앗수르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 수도가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실 수가 없어서
소돔 고모라와 같이 멸망시키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멸망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심판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교학적인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양심도 주었고 이성도 주었고 감성도 주었고 많은 사건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선지자를 통해서 반드시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지 않고 멸망케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비록 이방 나라도 뭐 바벨론이건 애굽이건 앗수르던
어디든지 간에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회개하라고. 그리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십 일로 한정하시고
니느웨성을 향해서 요나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가서 사십일 후에 망한다고 마지막 통첩을 하라' 그랬지요.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마지막 경고를 하고 회개를 하면 용서하겠다는
그런 깊은 뜻이 마음에 있었어요.
그런데 요나는 가서 외쳤다가 만일에 회개하면 안 망할 거라는 거죠.
그래서 그는 혹시라도 회개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안가겠다고. <4>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동안 있다가 그것이 토해버림으로써 니느웨성에 아주 직행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꼼짝 못하고 니느웨성에 왔는데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 40일 후에 망한다고 합니다. 빨리 회개하세요.
그래야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해야 되겠지만 그럴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40일 후에 망한다. 40일 후에 망한다" 하고
억지로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40일 후에 망한다" 하는 말을 마지못해서 니느웨 성에 가서 외쳤는데 놀라운 것은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재를 무릅쓰고 다 회개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저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나가 못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4장 1절에 보면 기막힌 얘기가 나옵니다.
[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요 ]
이렇게 요나가 못마땅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원망할 뿐만 아니라
괴로워하고 싫어하고 그 다음에 죽기를 소원합니다.
'나 이런 꼴보고 사느니 죽고 싶습니다.'
참 못난 사람이에요. 아니 죽을 사람이 살았다면 잘 된 거지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이런 꼴 보느니 나가 죽고 싶습니다.]
정말 못난 사람 못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런 못난 선지자도 들어 사용하시는구나 입니다.

이런 요나의 불평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절 [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
야 요나야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구원 받는데
너 왜 그렇게 열 받느냐?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바른 말 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하는 말이 왜? 성부터 내느냐?
그러면 내가 왜 성내? 경우가 그렇단 말이지 .....
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니느웨가 망해야 될 건데 회개하고 구원받게 생겼으니
자신도 모르게 열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이게 열 받을 일입니까? 사람이 언제 성내고 열 받게 됩니까?

<폴 투르니>에라고 하는 심리학자이면서 의사인 유명한 분이 계시죠
(강자와 약자)The Strong and the Weak 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의 일상 생활 중에 현대인은
너무 피곤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뭡니까? 열 받는 것입니다.
그 피곤한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일을 많이 한다, 순수한 과로입니다.
자기 건강에도 한계가 있고 정신에도 한계가 있어요.
여유 없이 너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많이 해서
순수한 과로 현상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신적인 압력이에요.
그래서 윗사람에게 관계되고 아랫사람에게 문제되고
또 사회의 여론과 평판, 동기와 특별히 하나 더 질투가 있어요.
이 정신적 스트레스가 사람을 몹시 피로하게 한다는 일반적인 얘기입니다.
세 번째 게으름 때문이라고 했어요.
이거 아주 재미있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해야 할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
그래서 해야 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거기에 정열을 기울이며 일하면 피곤이 없는데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해야 될 일에 대해서는 게을러 빠졌어요.
하지 말아야겠다고 하면서도 그 일에 끌려갈 때 그것은 피곤한 것이에요.
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항력 앞에 반항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큰 일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어요.
그걸 알았으면 순종해야지요.
마음에 들던 안들던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여러분 마지막에 죽음이 오더라도 '아, 이제 죽는 시간이구나,
그러면 조용히 가야지. "왜 죽어" 그러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 하필이면 내가 죽느냐,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느냐 이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반항이 많아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때에는 우리는 조용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걸 반항하게 될 때 피곤하게 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 요나가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 하나님에 대해 반항을 하게 되고 열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기질이 바로 온유 아닙니까?
온유는 바로 마음에 열 처리가 잘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잘 길들려진 기질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혹 나는 지금 신앙에 열 받고 있는 처지는 아닙니까?
그러나 어디 반항한다고 될 일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기에 순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나는 어떻게 해야 할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큰 뜻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시간에 찬양해야 할 시간에 원망하고, 감사해야 할 시간에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못났습니까? 이것이 바로 요나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이 고민은 못난 고민입니다. 부질없는 고민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못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 못난 고민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못난 고민을 하고 있는 요나를 위하여
요나가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실물 교훈을 하기로 하고 박넝쿨을 준비합니다.
이 박넝쿨을 인하여 기뻐하는 요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게 뭡니까? 요나가 6절 [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 합니다
성읍이 어떻게 되다니요? 바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멸망 받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요나는 은근히 하나님의 심판이 유보하신 것이므로
은근히 다시 심판을 시행하게 될지 모른다는 바램으로
성밖에서 초막을 치고 니느웨성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요나의 심통을 꿰뚫어보신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여
요나를 설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작은 것에 쉽게 감동합니다.
때론 이것이 지나쳐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명분도 없는 일에 이성을 잃어버리고 무모한 짖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박 넝쿨에 대한 요나의 민감한 반응에서 우리는 한번 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급조하였기에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초막에 앉아
니느웨 성읍의 망하는 꼴을 보려고 눈망울을 굴리고 있는 요나에게
예기치 않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박넝쿨 그것은 덩굴 식물의 일종이었습니다.
살며시 싹을 틔운 뒤 아주 빠른 속도로 덩굴손을 뻗으며
초막을 감겨 오르기 시작하였고
이내 작열하는 태양 빛을 막기에는 설긴 초막을 절묘하게 뒤덮었습니다.
쾌나 고생하고 있었던 차에 이 얼마나 좋은 그늘이 만들어졌는지 모릅니다. 요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겨워했습니다.
니느웨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었던 처사에
몹시 불쾌하였던 감정이 이 작은 식물을 인하여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주변의 작은 것들을 사용하시어 가르쳐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늘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불쑥 내 뱉는 아이의 거슬리는 말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실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지나쳐 버리는 작은 사건에
우리의 심금을 만져주는 주의 놀라운 가르침이 담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심코 읽어 내려가는 신문기사를 통해
오늘 나에게 다가 오시는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거실을 물걸레로 닦다가 힘든 허리를 잠시 펴며 베란다에 눈길을 돌리는데 언뜻 들어오는 난초의 꽃이 잊었던 주님의 감미로운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T.V 화면에 잡힌 어느 노숙자의 잔뜩 주름진 얼굴을 보는 순간 편히 누울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주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박 넝쿨, 바로 우리가 주변에서 부닥치는 작은 것들을 통해서도 주님은 우리를 효과적으로 교훈 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우리도 하나님이 예비한 박넝쿨을 인해 기뻐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벌레가 그 박넝쿨을 갉아먹어 박넝쿨이 시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어제 낮 동안 박넝쿨로 뒤덮인 시원한 그늘에서 편한 시간을 보냈던 요나는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끔찍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원인은 동이 트기 전 새벽
해충이라는 놈이 박 넝쿨을 깨끗이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해가 뜨오르고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니
요나의 머리에 사막의 햇빛이 그대로 내려 쬐는데
도저히 기진맥진하여 아휴! 죽는 게 낫겠다고 불평을 터트리고 맙니다.
요나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고 그 같은 불쾌한 기분은
뜨거운 햇볕이 곧바로 머리위로 떨어지는 한낮에 이르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요나는
하나의 식물에 불과한 박 넝쿨에 요나는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작은 박 넝쿨에 희희낙락하기도 때론 불같은 성을 내기도 하는 요나.
얼마나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가에 따라 그는 반응하였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생입니까?
사소한 것에 섣불리 행동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질까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의미 있지만
철저히 자기 입맛에 따라
사소한 것에도 지나치게 반응하는 모습은 참으로 추하기 짝이 없습니다

불과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죽은 박 넝쿨을 보며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한 요나를 보시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9절에 [ 이 박넝쿨을 인하여 성냄이 합당하냐 ]
[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
라고 불평하는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봐라 !
영적으로 눈이 가려져 있어 자기네들이 걷고 있는 길이
멸망하는 길임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니느웨성의
자그만치 십 이만여 명의 이 가련한 영혼들을 내가 아끼는 심정, 넌 그 심정을 이해하겠니?
넌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로 들어갈 식물 하나를 무척이나 아꼈는데 입장 바꿔 놓고 곰곰이 생각해 봐라.
네가 얼굴 붉히고 불같이 성낼 만한 일이었던가?
눈초리 치켜 뜨고 나에게 거칠게 대들었는데
내가 너에게 심하게 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근시안이고 지극히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요나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박 넝쿨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심통이 난 요나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박넝쿨을 주연으로 삼고 바람과 태양을 조연으로 삼아
극적인 드라마를 펼친 것입니다.

이 박넝쿨 드라마를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합니까?
우리는 본문에 계속 이어지는 10절 이하에서
박 넝쿨을 통한 하나님의 값진 교훈을 보게됩니다.
요나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려고 또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박 넝쿨을 사용하셨는가를 무릎을 치며 감탄을 하게됩니다.

니느웨의 불쌍한 심령들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심정을 요나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박 넝쿨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5. 박 넝쿨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10-11절)
박넝쿨로 인하여 죽기까지 합당하다고 하면서 불평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10절 [ 너는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
11절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야? ]

모르긴 몰라도 요나는
'박 넝쿨도 네가 그토록 아꼈다면,
나는 얼마나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겠는가?'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을 것입니다. 지옥의 자리가 늘더라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는
우리네 무딘 심령에 확 불을 붙여 주는 말씀의 교훈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비록 우리가 원수라고 여겨지는 생명까지라도 사랑하시는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의 심정을 꿈에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을
아무런 느낌도 없이 멀뚱멀뚱 바라다보고만 있다면
아직 우리 주 하나님의 그 뜨거운 심정을
제대로 가슴에 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는 도저히 선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요나를 설득하시는 하나님 앞에 설득을 당하여
[ 오, 주님, 주님의 심정을 품고 살게 하소서! ] 라고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요나를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중국의 첫 선교사이고, 중국의 선교의 문을 여셨던 분입니다.
그분이 선교사업 하던 중에 고국에 돌아가서
동역자, 후배 선교사들을 좀 많이 모집해 오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지망생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면접을 해서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선발하게 되는데 그 때에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
그러니까 "중국의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제가 구원하기 위해서요. ]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 중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의 세계로 인도해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가 꼭 있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 당신은 왜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
[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려고 합니다. ]
테일러가 말하기를
[ 이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런 동기만을 가지고는 못 갑니다 ]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지망생 하나가 되돌려 물었습니다.
[ 선교사님, 당신은 왜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
그 때에 허드슨 테일러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 나는 중국사람을 사랑하거든요. 오로지 사랑 때문에. ]
여러분, 사랑이 없는 선교, 이게 문제요. 사랑 없으면 원망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없는 희생,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위해서 한평생을 사느니 남편을 위해서 한평생을 고생했느니 가정을 위해서 온 생을 바쳤느니,
교회를 위해서 충성했느니. 선교를 위해 열심했느니
이 말이 다 왜 나오는지 아십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수고, 소용없습니다.

요나는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정말 제정신을 차린 선지자라면
니느웨가 40일 후에 망하게 되었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축제입니다, 축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이고 감사해야 할 시간에
왜 원망을 합니까? 왜 죽겠다는 것입니까?
감사와 찬송으로 축제를 벌어야 될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고민에 빠집니까? 이렇게 절망합니까?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났습니다"라니 참으로 못난 인간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찬송을 불러야 할 시간에 절망하게 됩니다.
아직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 미련한 인간은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또 원망과 불평으로 끝납니다.
여러분, 구원받는 니느웨 성을 보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영광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축제의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 마음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앞에서까지 죽어도 합당하니이다 하고 골이 나있습니까
하나님이 요나에게 4절, 9절, 11절에 세 번이나 질물을 하시는데
왜? 요나는 자기 고집만 부립니까?

하나님과 요나의 대화를 요약해 보면
[ 너가 성 냄이 합당한냐? ] [ 죽기 까지 합당합니다 ]
왜? 성도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냉전을 폅니까?

<윌리엄제임스>라는 분의
종교체험(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라고 하는 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성숙의 단계를 네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점점 자라서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1) 그 첫째 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현실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자기를 부인하는 것,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내가 좁은 생각에서 자기 생각에 집착하는 것,
이것은 아직도 신앙생활 입문도 못한 것입니다.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이고.
2) 두 번째는 초능력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내 생활 속에 연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 안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역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낍니다.
내가 할 일은 이것 뿐이요,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자기 한계를 확실하게 인정하는 순간,
그 신앙생활은 온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4) 그리고 나아가서 정서 중심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의 극치입니다. 영성의 핵입니다. 그 중심에 사랑이 있어야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세상을 사랑으로 보게 됩니다. 사랑으로 듣게 됩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사랑의 세계를 전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성의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 점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지만 요나의 마음에는 영성의 핵인
하나님의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좋아해야 할 때 싫어하고, 기뻐해야 할 때 성을 내고
감사해야 할 때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내일의 가족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선교 선교 하지만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뜻과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박 넝쿨의 교훈'을 주셨다.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던 박 넝쿨이 시들자
그로 인해 크게 화를 내는 요나에게
니느웨 성읍에 살고 있는 12만명의 영혼이 그런 하찮은 박 넝쿨보다
매우 가치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느웨성은 가로 지르는데만 3일이 걸렸고
성의 둘레를 도는 데는 10일이 걸릴 정도였으니
그 성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됩니다.
앗수르는 선지자 나훔의 예언대로
BC 612년에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지금도 니느웨에는 요나의 무덤이 남아 있고
그 지역 주민의 25%가 시리아정교회에 속한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관심을 가는 사실은
니느웨는 현재 한국군 파병 예정지인 모술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사랑하시어
다시 선교의 불길을 일으키시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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