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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과 경제생활 (요 6: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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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강국 목사 (신시내티교회)

지난주일 예배 후에, 우리와 함께 예배드린 어린이 혜린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사순절이 뭐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대답해 준다는 것이 대답을 못해주고 오늘까지 넘어왔습니다. 사순절은 오래 전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선조들이 정한 절기입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넉 四”자에 “열 旬”자를 합한 것으로 “40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순절이란 부활절 전부터 뒤돌아 계산해서 주일을 뺀 사십일을 지키는 절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40일이냐? 그것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이러한 삶을 사순절이라는 기간을 통해 의식하면서, 실제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사순절을 지키는 목적이라 하겠습니다.

지난주일에는 전도서 3장의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사순절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나 때가 어떠한 상황인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강하게 긍정하면서, 우리는 단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내적인 기쁨과 감사한 마음과 여유가 없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넉넉히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과 자세가 없으면 늘 짜증나고, 불평하는 마음으로 예민해 짐으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기쁠 때든지 슬플 때든지, 안심할 때든지 불안할 때라도 언제나 기뻐하며 하나님을 긍정하는 가운데 여유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특히 이번 사순절 기간에는 더 염두에 두자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 3주간은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내용을 우리들의 현실에 적용해보면서 우리가 늘 만나는 삶의 현실들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마땅한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시험은 사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만나게 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만난 시험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이고, 둘째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그리하면 천사들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줄 것이라고 성경에 나와있다”는 시험이고, 셋째로는 “나에게 절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네게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험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우리는 단순히 먹는 음식의 문제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으로 “경제 문제에 대한 시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경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예수님이나 몇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시험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먹는 문제로 이 시험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제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부자들은 돈 걱정 안하고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돈이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는 사람보다 더 걱정하고 불안해한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크리스천은 이러한 경제 문제에 대하여 바른 자세를 지니고 있음으로 이에 대한 시험이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경제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기본적으로 경제 원칙에 대해서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경제 원칙이란 곧 이익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즉, 조그만 노력이나 희생을 가지고 될 수 있으면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 원칙이 때로는 사람에 따라서 은연중 욕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욕망으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바로 이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 문제를 받아 든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의 경제관을 생각해 보고 또 이에 따른 하나님의 말씀의 입장을 생각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떠한 경제관을 가져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시험 문제에 대한 답안 작성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현실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차원으로는 복권, 도박 혹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사기 치는 일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져다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지금 한국에는 한참 Lotto 선풍이 불고 있습니다. 로토 복권을 사려고 줄지어 서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원도 정선인가 하는 곳에 도박장을 세웠는데, 거기에 가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미 사회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나타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경제적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여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경제적 윤택을 염두에 둔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에게 경제적인 능력과 주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러한 경제적 윤택을 꿈꾸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주변에서나 혹은 우리 스스로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왔던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들은 이러한 경제적 윤택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 속에 이러한 경제적인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우리들은 안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자체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고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의 자세와 방향을 추적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원하시는 정답을 우리의 시험 문제에서 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믿으려는 모습과 자세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만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대단한 수고를 하였습니다. 24절에 보니,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확인하고 배를 타고 왔다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의 대단한 열심을 봅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인 것입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지녀야 할까요?  우리는 이들과 어딘가 다른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이유에서보다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모습을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규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봄으로써 이들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있은 다음 벌어진 일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제공한 빵을 먹고 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멀리서 배를 타고까지 예수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본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은 이들은 기적과 표적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요구한 것은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표적보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기적으로만 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표적은 sign이고, 기적은 miracle입니다. 이 표적과 기적의 공통점은 일반적으로 보통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이 표적과 기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일어난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표적은 그 나타난 사건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거나 가르치기 위해 그 사건을 나타낸 것으로 알고 그것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적은 그 사건 자체에 도취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바랬던 모습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을 믿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멀리서 배까지 타고 예수님을 찾아 온 이들의 모습에 이러한 모습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표적으로 인식되기를 바랬는데, 이들은 오히려 기적으로 여겨 이러한 일이 언제나 자기들이 원할 때마다 주어지기를 바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경제에 대한 자세는 경제적인 이유와 타당성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경제 활동의 배후에 하나님의 sign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의 sign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으면 왜 부자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타당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로 우리가 지녀야 할 경제적인 자세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경제 활동을 표현하는 “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경제생활은 “일”이라는 활동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이는 27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누구든지 수긍하는 말씀입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윤택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공감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열심히 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어느 누구도 흉보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일이 바람직한 일인지?, 이 일을 해도 괜찮은 것인지?, 이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정말 유익한 것인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등등.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고 질문하는 유대인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즉 내가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열심히 일만 했지, 그 일에 대한 의미와 타당성을 염두에 두어 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여하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찾아오는 것이 보람인지 아니면 후회인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일했는데, 그것이 결국 헛고생이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상심되겠습니까?  반면에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간곡히 원해서 해 주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일을 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도 좋고 나에게도 유익이 왔다면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우리는 여기서 일에 대한 유대인의 입장과 예수님의 입장을 비교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8절, 29절입니다. 28절,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오리이까?’”,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번역상의 문제가 있는데요. 28절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들”이라는 복수형태로 되어 있는데 우리 성경에는 그냥 “일”이라고 단수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9절의 “하나님의 일”은 단수로 씌어져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28절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질문을 보십시다. 이 질문은 조급함과 욕심이 내재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즉 자기들의 염려에서 오는 질문으로서 기본적인 바램을 버리지 못한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집어넣음으로써 이러한 자기들의 숨은 욕망을 은폐하고자 하는 고상하게 보이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란 표현은 있지만 일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은밀함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나를 위해서 한다면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서 이러한 입장을 정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29절의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규정지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비록 내가 하는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하는 일에 대해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일이더라도 그 대상에 따라 그 일은 하나님의 일도 될 수 있고, 사람의 일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이라는 우리의 활동에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을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해서, 우리가 교회 일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생각에는 “교회 일=하나님의 일”이라는 공식이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교회 일이라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는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지에 따라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이는 결과를 놓고 볼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일했는데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훌륭하고 거창한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이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는데, 내게 이럴 수 있느냐?” 한다면 하나님이 과연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우리 목사들에게 가장 겁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삯군”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이를 강조합니다. “목자가 되어야지 삯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삯군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목사가 사례비를 많이 받으면 삯군이라고 그럽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가 분주하게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으면 삯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목회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향하게 하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면 삯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은 여러분에게도 해당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흔히들 말하는 대로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면” 여러분도 삯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비록 돈 버는 일이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이러한 차원과 연결해서 경제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경제 활동에 대해 과연 책임을 지고 그 결과를 보장하는 분이 누군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은 인간이 경제의 주체인 것을 고집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이들은 모세가 주었던 만나를 언급하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옛날에 모세는 우리 조상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을 우리에게 주겠는가?” 하는 질문에서 나타납니다.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경제의 주체가 인간임을 고집하고 있고 하나님은 단지 이러한 인간의 의도대로 따라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경제의 주체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맘대로 뭔가 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며 이루시고자 하는 바를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 경제 활동을 감당하기를 원한다면 경제의 주체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며 감당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업과 내 직장과 나의 모든 경제활동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믿고 거기에 맞게 감당코자 기도해야 합니다. “내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고 그것이 믿음 없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경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하나님은 제 사업장에 들어오실 필요가 없답니다. 제가 알아서 하지요” 하면서 자기 사업을 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과 내가 하는 사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 제가 돈을 잘 벌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에 대해 물질적으로 보탬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솔직하고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경제생활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바르게 해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이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제활동에 대한 기본적인 신앙적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런 이해와 자세를 가지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하나님의 일”을 결과를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 결과는 3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바로 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주어지는 모든 결과는 아름다울 것이라는 확인을 예수님께서는 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포기하는 이유는 결과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다. 이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에 입각한 경제관을 가지고 모든 경제 활동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보장해 주심을 믿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경제관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일들을 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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